[98화]
‘아무리 SS급 마인 이 목사라곤 해도 1조나 들일 가치가 있을 리 없잖아.’
진정으로 그 정도 금액을 들여서 잡을 가치가 있었다면 애당초 3대 길드에게 1조를 퍼부어서 잡게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사태를 일으켜서 그의 현상금이 올라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움직임을 봐도 딱히 그를 1조 주고 잡아야 할 가치가 없었다.
상황이 급해서 날 불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1조는 너무 과하다.
‘그리고 애초에 이 목사가 쉽게 잡힐 위인도 아니라는 점도 접목하면?’
‘아크데몬 비스트’라고 불리는 S급 몬스터 9마리와 함께 지내면서 머리도 쓰고 도망치기도 하는 그 이 목사는 쉽게 잡힐 위인도 아니다.
고로 이걸 받고 좋다고 이 목사를 잡으러 가면 실컷 싸운 뒤 공치고, 저 꼰대들만 이득을 보고 나는 호구 잡힐 가능성이 높은 그런 거래였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 양반들을 엿 먹일 수 있을까?’
“뭘 그리 생각하는 겐가?”
“아, 견적 잡고 있었습니다. 저 이 목사를 잡으려면 군자금이 얼마나 필요할까? 를요. 그게 아니더라도 헌터 일이라는 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선금은 일부 받고 일해야 하지 않겠어요?”
“뭐… 라고?”
선금 이야기를 꺼내니까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 1조니까 1할만 해도 1,000억이다. 저렇게 안색이 안 좋아지는 건 당연하겠지.
보자. 얼마쯤 부르는 게 좋을까? 내가 후달리는 입장이라면 조심스럽겠지만 여기선 내가 갑이다.
“뭐, 이것저것 해서 절반 정도 선금 받고 시작해도 될까요?”
“저, 저저저절반?”
“이 목사… 아니, 사실상 도살왕 성좌와의 전쟁이니 이 정도는 받아야죠. 북한을 넘어 러시아, 중국에까지 영향을 끼치는데…….”
크게 부르니까 기가 찬 모양이다.
하긴 5천억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런 걸 자승자박이라고 해야 하나? 자기들 꾀에 자기들이 넘어간 꼴이나 마찬가지이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건… 용납할 수 없네.”
“예. 그러면 이야기는 여기까지 끝이네요. 수고들 하세요.”
“아니, 잠깐, 이보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처사 아닌가?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네.”
“사람들이야 뭐, 언제는 안 죽었나요? 마치 이 목사가 아니었으면 안 죽었을 것처럼 이야기하시네.”
생명의 소중함이니 하는 걸로 감정선을 건드리려 하지만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다.
각종 부조리와 권력자들의 패악질로 인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만 해도 근 몇 달간 원치도 않는데 죽을 위기를 많이 맞았었고, 예로부터 스캐빈저가 아닌데도 사람들 죽어 나가는 것도 봐 왔다.
“댁들이 두려워하는 건 시민들이 죽고 다치는 게 아니라 양복 입고 나 잘난 놈이다 하고 뻗댈 수 있는 문명 생활이 붕괴되는 거겠지. 아포칼립스 되면… 아마 의자에 앉아서 고개만 까딱거릴 줄만 아는 늙은 댁들이 가장 쓸모없을 테니 말이죠.”
“말이 심하지 않나? 무슨 말을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아니면 진즉에 잘 좀 하시든가? 아무튼 선금 절반 주고 고용할 건지, 말 건지 알아서들 하시죠.”
“…으윽…….”
옛날이었으면 내가 고개도 못 들었을 저 꼰대들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니 뭔가 기분이 좋군.
갑과 을이 바뀐 것 같긴 하지만, 애초에 저쪽에서 먼저 날 호구 잡으려 했으니 그대로 돌려준 셈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저 밖의 상황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드느냔 말일세!”
“내가 저렇게 만들었습니까? 힘 있고, 권력 있는 댁들이 변기 막힌 거 안 뚫고 계속 같이 똥 싸니까 이 꼴 난 거지. 아무튼 거래할 생각 없으면 나가세요. 밑바닥 인간들이 아무리 정책이니 법이니 하는 거 애걸해도 댁들 뭐,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그럼 잠시만 시간을 주게. 윗선에 보고를 해 보겠네.”
“마음대로 하시죠.”
꼰대 둘은 아직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건지 윗선에 보고한다는 핑계를 대고서 각자 휴대폰을 들고 여기저기 연락 중이었다.
그런다고 뭐 1조짜리 거래, 그것도 5천억을 선지급하는 게 이루어질까?
그게 의문이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되든 말든 상관없는 문제이기에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네, 지금 상황이 매우 큰 위기인 건 확실하네만. 이걸 이대로 두면…….”
“아무것도 안 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어르신. 저도 나라가 다 망해서 배달도 못 시켜 먹으면 여러모로 불편하거든요. 뭐, 아칼론이 대부분의 레시피를 다 구현할 수 있지만요.”
“참 자네다운 이유군. 하지만 시간이 급한 건 사실일세.”
“에이, 그 정도로 망할 거였으면 진작 망했어요. 이 망할 세상, 생각보다 질겨요.”
그래, 청룡 길드의 그런 새끼들도, 신강남의 그딴 새끼들도, 대기업 새끼들이든 사법부든 정부든 그런 개판을 쳐 놓고도 잘만 살아가는 게 이 세상이다.
“그랜드마스터가 떠났을 때도… 성좌라는 게 나타나서 세계를 휘저을 때도… 또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무수한 사례들이 넘쳐흐르죠. 아무튼 뭐, 제가 뭘 안 한다고 해도 세계는 그에 맞춰서 변할 겁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나? 나라면 바꿀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나?”
“예. 안 들죠. 각성이니 뭐니 하면서 이거저거 받아도 제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요. 대체 저 같은 놈을 누가 각성시킨 건지, 정말 악취미라니까요.”
아마 날 각성시킨 놈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겠지.
성좌인지 뭔지 모르지만, 나 같은 범인(凡人)에게 이런 큰 힘을 맡긴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아무튼 정부와 협회에서 온 저 꼰대 양반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기에 나는 그동안 B급 던전 고블린 제국에서 나온 전리품과 레벨에 따른 새로운 스킬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난 오랜만에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보았다.
[Lv.61 유성원]
스테이터스 성장치:21/21/21/21
Str:2,548 Dex:2,544 Vit:2,548 Mag:2,520
[보유 스킬]
위대한 기사의 길(SSS)
(유니크)만검(萬劍)의 기사 그란델의 무재(武才)
(유니크)정령 기사 ‘실레이온 포레스트 블레이드’의 비전
(유니크)KMG TECH Master Device
(유니크)패황 기사 ‘유천’의 사라진 유산, 패황천검류(覇皇天劍流)
(전설)패황 기사 유천의 천검군(天劍軍) 소환
(전설)흔적만 남은 기사단의 성소 차원문
(유니크)마도 기사 카일라이드의 소환술
(전설)타락한 봉황의 정수
(전설)통솔(EX)
(전설)기승(S+)
[적용되는 효과]
신수의 힘(모든 스테이터스 1랭크(2배) 상승)
“와… 세상에 이거 참~”
모든 스테이터스 SS+등급. 사실상 아슬아슬하게 조금 모자라서 SSS(2,560)급이 아닐 뿐이지, 거의 SSS급 확정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영수증처럼 주루룩 내려오는 스킬들은 모두 전설 아니면 유니크 스킬뿐.
물론 이건 처음부터 과정이나 테크 트리 같은 거 없이 최고급 스킬들을 마음껏 고르게 해 준 특성 탓이라고 하지만, 경악이 몰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이제 여기에 2개 더 추가할 수 있지? 하하, 보자아~ 지금 모자란 것은…….”
50레벨에 1개, 60레벨에 1개를 받았고, 던전 보상으로는 고블린 제국을 아예 속국으로 받아서 다른 보상은 없었다.
아무튼 이 선택지 2개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싸움을 통해 느낀 것은 더 볼 것 없이 나의 지구력 문제가 핵심이었다.
B급 던전을 제대로 겪어 본 결과 진짜로 한 달 내내 싸워서 정신이 지칠 정도였다.
“정말 나 주먹구구식으로 스킬 찍었네. 물론 좋은 것들만 얻은 셈이지만……. 아무튼 피로 내성이나 활력 회복 같은 걸 찾아야겠지. 뭔가 좋은 게 없을까?”
“B급 던전에서 성과가 좀 있었나요?”
한가롭게 중앙 통제실에서 내 스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을 때 소미 누님이 곁으로 다가왔다.
한 달 만에 보는 건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군.
성과에 대해서 물어 오자, 다시금 그 지겹도록 싸운 고블린 제국 던전이 떠올랐다.
“예, 성과는 있었죠. 엄청 힘들었지만요. 망할 고블린 놈들, 무슨 던전의 인구가 100만이 넘으니 전투 병력이 끝없이 와서 돌아 버릴 뻔했죠.”
“아무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한 달이나 안 나와서 정말 걱정했어요.”
“저도 한 달이나 걸릴 줄 몰랐는데……. 아영이는 지금 뭐 하고 있나요?”
“여기서 자료를 얻은 다음 레벨 업 및 클래스 체인지를 위해서 던전에 갔어요.”
“지금 이 난리통에요?”
“이 난리통이 일어난 지 한 이틀 되었나?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 아이는 3일 전에 던전에 들어갔으니 곧 나오겠죠. 아마 거의 45레벨에 다다랐을 거예요.”
역시 한번 상위 레벨을 찍어 본 사람들은 떨어져도 금방 복구하는군.
이곳엔 충분한 자료와 자금, 스킬 북 등이 있으니 더더욱 빠르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라면 여기 소미 누님이군.
“누님은 던전 안 갔었죠?”
“예. 45레벨이라 C급을 가야 하는데……. 지금은 팀도 없고 혼자라서 가기가 힘드니까요. 대신 클래스를 뺏긴 덕분에 스킬 포인트 반환도 이루어져서 다시 스킬 트리 짜는 걸 완성했어요.”
“오… 그럼 다음엔 같이 던전 갈 수 있겠네요. 클래스는 마법사 계열 그대로?”
“아뇨. 이거요.”
철컥!
그 순간, 묵직해 보이는 검고 긴 쇳덩어리가 소미 누님의 손에 쥐어진다.
라이플인가? 밀리터리와는 징병제로 간 군대밖에 관련이 없는 나로서는 그 정도가 한계인데……. 아무튼 그 무기로 보아 후방 지원 공격 담당으로 전직한 건 틀림없었다.
“예. 성좌의 선택을 받아서 했던 서포터 역할이 지겹기도 했지만 남은 눈과 탐지, 정보 해석 관련 스킬들을 유용하게 쓸 방법을 생각했고 어르신의 조언을 받아서 이걸로 결정했어요. 일단 지금은 레인저 클래스이지만 스킬 한 개만 더 배우면 곧바로 자이언트 킬러로 올라가게 돼요.”
“오~”
“결국 지원 역할이지만 이번엔 능동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게 다르네요.”
내가 봐도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길드장을 해서인지 역시 우리 구성에 필요한 것을 정확히 캐치해 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감탄까지 나올 정도였다.
유청 덕분에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나를 포함해서 우리 기사단은 전원 검을 비롯한 근접 무기 사용자들이라서 그녀처럼 시야를 넓게 봐 줄 사람의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영이까지 근접이라서 혼란스러울 뻔했는데 정말 잘됐네요. 사격 후방 지원 클래스는 제가 더 감사할 따름이죠. 이제 진짜 힐러 하나만 찾으면 완벽한데…….”
“자금 사정이 부족하면 그렇겠지만, 반대로 풍족하면 의료 시설과 의료진, 포션을 비롯한 의료 용품으로 채워도 되니 그리 압박감 안 가져도 돼요.”
“천검군 병사들이랑 유청을 누님 호위로 붙이면 딱이겠네요.”
벌써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전열에서 나와 기사들이 깽판을 치면 천검군 병사와 유청과 같이 있는 그녀가 사격 및 조언을 해 주고 임시 기지가 되어 주는 광경. 정말 이상적이다.
아영이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던전 편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건 좋은 일이기에 기분이 좋아진다.
“맞다. 그보다 저 스킬을 추가해야 하는데…….”
“이보게, 자네. 정부에서 5천억 선금 승인이 떨어졌으니 다시 테이블로 돌아오라는군.”
“…네에?”
한참 기분 좋게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데, 어르신이 갑자기 다가와서는 깜짝 놀랄 소식을 나에게 전한다.
아니, 5천억 선금, 그걸 승낙했다고? 제정신인가?
그 돈이면 차라리 딴 걸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놈들이 거래에 응한다니 어쩔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그 꼰대들을 만나러 테이블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