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유성원의 트레일러.
유성원이 곤히 자는 동안에도 기사들은 각자 할 일을 하면서 트레일러 주변에서 머물고 있었다.
스킬로 구현된 기사단의 성소도 좋은 휴식처였지만, 새로이 유성원 일행에 합류한 멀블린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점도 있었고 잠자고 있는 대장을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유청의 말에 의해 다들 트레일러 주변이나 내부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각자 정비를 하거나 교류 중이었다.
“그래서? 마법사 멀블린, 폐하께서 당신들의 항복을 받아 줬다곤 하나 우리는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언어를 배우는 건 당연하고, 당신과 당신 제국이 폐하에게 진정한 충성심을 보이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경계할 겁니다.”
“대신(大臣)의 우려,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제국은 허언을 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항복했고 키 큰 황금왕이 자비롭게 받아 줬다. 배신 안 한다.”
“아무튼 폐하의 어명이나 어기지 마시고, 한시라도 빨리 언어를 모두 익히십시오. 일단 문자표입니다. 발음 기호는 당신이 못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몇 번 말해 드릴 테니 직접 적으십시오.”
“고맙다, 대신!”
멀블린은 유청에게 한국어를 좀 더 자세히 배우고 있었고, 심연의 존재인 가울프는 트레일러 위에 앉아서 주변 경계, 아칼론은 하늘을 날아서 좀 더 넓은 범위를 경계, 섬멸은 트레일러 안에서 유성원이 자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크록베인과 진석은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밧줄을 이용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또다시 땀을 빼는 중이었다.
[크르르르르! 인간 주제에… 제법!]
“오오! 역시 용인(龍人)다운 힘이군! 음? 손님이 온 것 같군. 흠…….”
[냄새… 난다.]
기사들이 그렇게 각자 볼일을 보는 사이, 누군가 이곳을 찾아왔다.
그것을 눈치챈 그들은 천검군 병사와 함께 무기를 뽑아 들고 철저히 경계에 나섰다.
하나, 멀리서 나타난 것은 바로 유성원과 어울리던 신소미 전 길드장이었다.
유청도 그렇고 기사들 전부 그녀를 알아보고는 모두 무기를 거두며 그녀를 맞이한다.
“누군가 했더니 신소미 님이셨군요. 아이언 포트리스를 지키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만?”
“유청 님, 역시 던전에서 나오셨군요. 연락을 받지 않아서 직접 왔습니다. 그래서, 유성원 씨의 상태는 지금 어떤지? 혹시 상태가 안 좋습니까? 치명상을 입었다든가.”
“아뇨~ 폐하는 무탈하십니다. 다만 던전 내에서 한 달가량 지속된 전투 탓에 피로가 심하셔서 씻고 곧장 잠드셨습니다.”
“휴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지금 보러 갈 수 있을까요?”
“되도록이면 폐하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폐하에게 위급한 사안입니까? 급한 건이 아니라면 안에 들어가서 폐하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대기하시지요.”
유청은 차분히 사유를 말해 주고서 그녀를 트레일러 안으로 안내한다.
곧바로 지금 바깥의 상황에 대해 알리려 했던 신소미는 순간 멈칫했다.
‘맞아. 그라면 분명…….’
이 기사들은 무조건 유성원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또한 유성원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나라가 위험하고, 이 목사가 이끄는 스캐빈저와 악(惡) 성향 성좌 대연합이 공격을 펼친다고 해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낮았다.
알다시피 유성원은 정부와 사회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딱히 지금 위기에 대해 알려 줘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컸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저한테까지 와요? 잘나신 분들이니 알아서 해결하겠죠. 더 자야겠다. 하아암~’
“예. 그러면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어떤 상황이 될지 불 보듯 뻔~ 하니 굳이 억지로 깨워 달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의 상태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으니 안심하고 기다리면 되었다.
트레일러 안에 들어온 신소미는 빈방으로 들어가면서 ‘섬멸’이 지키고 있는 방 쪽을 슬쩍 본 다음 들어가 백가연 어르신에게 연락한다.
“접니다, 어르신.”
(오오! 그래, 도착했나? 그 친구 상태는 어떤가? 많이 안 좋은가?)
“아뇨. 멀쩡하다고 합니다. 연락을 안 받은 건 장기간 전투로 인한 피로로 인해 나오자마자 잠든 탓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사들 중에선 유성원의 연락을 대신 받는 이가 없었으니까요.”
(그렇구먼… 음? 잔다고? 으음, 그래도 깨워야 할 것 같네만. 그러니까, 정부에서 ‘의뢰’를 맡기고 싶다고 했다네.)
“…의뢰요? 즉, 1조짜리 그거 말인가요?”
(그렇다네. 이 정도면 깨울 이유가 되겠지?)
절대 실행할 리 없다고 생각한 그 ‘1조’짜리 의뢰를 정부가 걸어왔다고 하니 기가 막힌 신소미였다.
아무튼 백가연의 말대로 이 정도면 충분히 깨울 만한 사유가 되었지만, 그래도 완전한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사람을 깨우기엔 뭐했다.
물론 다른 행동을 안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유청 님, 지금 그에 대해 중요한 문제가 생겼으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 차량으로 이동을 해도 괜찮을는지요? 제가 운전하지요.”
“음, 예. 그러시지요.”
신소미의 제안을 허락한 유청의 말에 다른 기사들은 알아서 기사단의 성소로 돌아갔고, 그녀가 직접 트레일러 운전을 해서 이동을 시작한다.
깨어나자마자 즉시 ‘협약’을 비롯해 싸움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아이언 포트리스로 돌아가는 거였다.
***
몇 시간 뒤.
음, 이렇게 죽도록 자 본 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눈을 감자마자 잠들어서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자다가 눈을 뜨자, 시간을 넘어온 기분과 함께 전신이 욱신거렸다.
마치 한 달간 미뤄 둔 근육통에 이자라도 붙은 건지 격렬한 통증이었다.
“으윽… 스테이터스가 높아도 근육통은 남는 건가? 진짜로 재생이나 육체 회복 스킬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끄으으으, 아무튼 목이 마르니 일단 뭐라도 마셔야… 음?”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려는데, 문득 창밖의 풍경이 내가 잠들기 전과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분명 차를 주차해 둔 곳은 고블린 제국 던전 입구여서 숲으로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한 장소였던 것이다.
“여기는, 그러니까… 아, 아이언 포트리스였나? 나 자는 사이에 누가 운전해서 옮겼지? 하아암~”
“일어나셨습니까? 단장님.”
“어? 섬멸이냐? 하아암~ 그나저나 누가 운전해서 왔어? 아칼론 녀석, 법 문제니 뭐니 하면서도 결국 운전한 건가? 아무튼 여기까지 온 거면 그냥 깨우지. 내 침대에서 자는 거랑 여기서 자는 거랑은 다른데 말이야.”
“그게, 신소미 님께서 오셨습니다. 군사인 유청이 그녀를 맞이해서 대화를 나눈 다음 허가를 해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언뜻 이야기를 들으니 ‘1조’짜리 협약을 제안받았다고 하더군요.”
푸웁!
물을 꺼내 마시면서 섬멸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충격적인 소리에 물을 뿜어 버린다.
뭐시라? 지금 뭐시라? 1조짜리 협약을… 제안했다고?
대체 무슨 미친 소리지? 서울에 괴물이라도 강림했나? 뭐야? 뭐야?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에게 직접 들으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하,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1조짜리 협약을 제안할 정도면 보통 난리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어디 있어?”
“다들 포트리스 내에 계실 것이긴 합니다. 한데 단장님…….”
“지금 바로 가 볼게!”
나는 날 부르는 섬멸을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절대 안 할 거라고 생각한 1조짜리 의뢰 신청을 한 건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다급히 트레일러를 나와서 중앙 통제실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1조를 나에게 버리려 하는 거지? 이건 진짜 예상 못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단장님… 저기, 지금 상태로는…….”
‘어쩌면 미끼인가? 다른 길드와 협력해서 나를 제압할 함정 같은 걸 만든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쪽엔 이제 머리가 잘 굴러가는 유청도 있으니까 그런 짓은 충분히 대처를 할 수 있을 거야.’
[임시 관리자님과 호위 기사 ‘섬멸’을 확인. 문을 열겠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기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온 나는 중앙 통제실 문이 열리자 바로 들어섰다.
안에는 신소미, 신아영 모녀와 백가연 어르신, 그리고 낯선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 한 무리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연 못 보던 양반들이 있는 걸 보니, 진짜는 진짜인 것 같네. 그래서 어르신, 이 양반들이 누군지 소개 좀 해 주시죠.”
“…소개보다는 자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네만?”
“예? 아뇨. 푹 자서 이제 괜찮습니다. 아무튼 여기에 없어야 할 꼰대 양반들이 있는 걸 봐선 섬멸이 한 소리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네요.”
“그보다는 자네에게 있어야 할 게 없는 것 같네만? 자네 모습부터 확인하는 건 어떤가?”
“네?”
어르신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내려서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전신 나체에 돌고래가 그려진 푸른 트렁크 팬티 한 장.
아, 맞다. 자기 전에 샤워를 하고, 나와서 팬티 한 장 걸치고 그다음에 바로 맥주 한 캔 따서 드러누운 뒤 곯아떨어졌지.
그리고 바로 일어나서 소식을 듣자마자 여기까지 왔으니, 리얼 나체에 팬티 한 장이었다.
“…으음, 이 친구가 그 황금 용기사가 맞습니까?”
“뭐 이런 친구가…….”
“하아아~”
백가연 어르신을 비롯해서 꼰대들도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고, 신소미 누님은 눈 둘 곳이 없는 건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제, 젠장! 젠장! 이런 실수를!
아니! 아니다! 아직 실수는 아니야! 여기서 당혹해서 물러나야 실수다.
“뭐라도 묻은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네요. 읏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서 앉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그것부터가 추태고, 저 꼰대들이 나체로 온 멍청한 놈으로 생각해서 우습게 볼 것이며, 지금 저기 있는 유청의 시선도 두려웠다.
그렇기에 마치 상관없다는 듯이 대범하게 앉아 버리는 걸 택한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다른 이들을 바라본다.
“…제정신인가? 아무리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않은가? 뭣 좀 입게.”
“에이, 한 달 내내 입고 다니면 좀 벗고 싶을 수도 있죠. 정 그러시다면 잠깐 다녀오죠.”
휴우~ 눈치 빠른 할망구 덕분에 내 위상은 지킬 수 있었다.
이래저래 기 싸움도 기 싸움이고, 저 꼰대들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 같은 걸 보여서는 대화가 쉽게 진척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나체쇼를 했으니 이제 와서 예의 차릴 게 없었기에 나는 대충 늘어난 티셔츠에 반바지만을 입고 다시 중앙 통제실로 돌아온다.
“…예의를 차리라곤 하지 않겠네만, 멀쩡한 옷은 없나?”
“없습니다. 사 둔 양복이 있긴 한데, 지금은 사이즈가 안 맞더라고요. 각성자가 되고 성장하면서 신체도 달라지다 보니…….”
“하아아~ 어쩔 수 없지.”
스태프로 일할 때보다 훨씬 많은 노동량을 가지게 되었지만, 각성자가 된 이후 던전을 가거나 싸우거나 하는 활동량이 많아지다 보니 근육도 더 불어나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입을 생각이 없었지만 그래도 몇 년 전에 사서 짱박아 둔 예전에 입던 옷이 지금 내게 맞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기에 나 같은 놈을 1조씩이나 쓰면서 고용하러 온 겁니까?”
“지금이 어떤 사태인지 전혀 모르나 보군.”
“근 한 달 내내 B급 던전 안에 있었는데 알면 제가 성좌죠. 아무튼 얼른 말씀하세요.”
“지금 유례없는 악(惡) 성향 성좌와 스캐빈저들의 대연합 공세가 이루어지고 있네. 도살왕의 사도, SS급 마인 인간 사육사 이 목사를 중심으로 생긴 이 사태는 대한민국 전역을 위협하고 있네. 여기 자료를 보게나.”
꼰대들은 자신들의 노트북에 나온 자료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대한민국 지도를 기준으로 다양한 색깔의 점들이 수없이 분포되어 있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는데… 대략 보니 저게 모두 스캐빈저나 성좌들에 따라서 일어난 것이었다.
정말로 전국 단위로 난리가 난 게 확실해 보였다.
“늘 한 번씩 오는 그거네요. 변기 안 뚫고 똥 싸다가 한 번씩 역류해서 개판 나는 거. 아무튼 그래서 나한테 1조를 주고 뭘 시킬 생각이시죠?”
“당연히 그만한 값을 하는 임무를 줄 걸세. 자네에게 맡길 임무는 ‘SS급 마인, 인간 사육사 이 목사 토벌’일세.”
무려 1조나 쓰는 거니까 보통 일을 안 시킬 줄은 알았지만, 역시 이 목사 토벌인가?
하지만 이것도 뭔가 냄새가 난다.
애초에 저 꼰대들이 먼저 제안하는 게 좋은 일일 리가 없다.
나보다 훨씬 머리 좋고, 음흉한 양반들이 어떻게 하면 나를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 다음에 여기 왔을 테니 말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니 바로 저 꼰대들의 생각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으음, 나름 1조 값어치 하는 걸 시킨 것같이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날 호구 잡으려는 거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양반들의 생각이 내 머리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사기질이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