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차라리 간악한 고블린들의 함정이었습니다! 하는 결말을 기대했건만…….’
그런 것 없이 놈들은 유성원의 명에 철저히 따랐다.
혹시나 싶은 보복이나 복수의 공격 같은 건 일절 없었다.
순순히 던전 입구를 열어 주는 건 물론 마정석 및 귀금속을 한 아름 안겨 주고, 배웅까지 해 줬는데……. 여기까지라면 그냥 형식적인 ‘속국’으로 넘어가려니 싶었지만, 새로운 동료까지 생겨 버렸다.
“나는 익혔다! 키 큰 황금왕 님에 대해 폐하라 부른다! 우리 제국에 연락하고! 폐하의 명령 따른다! 그러기 위해 이제부터 따른다! 폐하! 나는 멀블린이다!”
“…멀블린? 어, 그래. 그러니까 일단… 뭐라고 해야 할까? 그… 던전 밖에 애들 보내진 말고 우선 당분간 얌전히 지내라고 전해 줘.”
“알겠사습니다! 폐하! 바로 전달하… 하… 하고… 겠습니다!”
아직 인간 말이 서툰 건지 활용이 이상하긴 했지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타 종족의 언어를 보는 것만으로 익히는 건 어려운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트레일러로 올라온 유성원은 드디어 한 달 만에 문명 생활로 돌아와 샤워실에서 씻을 수 있었다.
“후아아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와, 땟국물… 아니, 이건 핏국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장난 아니게 나오네. 근데 B급 던전들은 다 저러나? 왜 이렇게 이상하지? 앞으로도 계속 이런 거만 나오려나? 고민이 많아. 게다가 이 멀블린이라는 녀석에 대해선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하아~”
일단 무사히 마정석과 보물을 챙겨 오고 레벨도 61로 상승시켰기에 성공한 던전 클리어였지만, 이것저것 걱정거리도 추가로 딸려 와서 그다지 상쾌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생각할 거리는 뒤로 미루고 싶었던 유성원은 반나체로 냉장고에 넣어 둔 맥주를 꺼낸 다음 트레일러 구석 의자에 드러눕는다.
“푸하아아앗! 이게 행복이지! 하아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아무리 그놈들이라도 이 시간은 방해 안 하겠지?”
어차피 운전은 자신이 해야 하는 만큼 수면을 취하고 난 다음에 해야 안전하다고 말하고서 쉬는 거지만 사실 핑계였다.
기승(S+) 정도면 졸면서 운전해도 안전 운전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는 그저 한 달간의 피로를 씻어 내고 한숨 자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진짜 던전 내에선 시끄럽기도 해서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니까…….”
끝없이 몰려오는 고블린들의 공세와 첨탑을 점령했을 땐 보호막이 있었지만 놈들은 잠이 들지도 못하게 계속 케케켁! 같은 소리를 외쳐 대면서 수면을 방해해서 유성원은 정말로 조용히 죽은 듯이 자는 게 소원이었다.
“…아, 진짜 금방 잠이 오네. 하아암… 그래, 이젠 마음 놓고 잘 수 있… 지.”
그렇게 유성원은 눈을 감자마자 동시에 의식이 끊어지듯 잠이 든다.
전쟁 경험이 많지 않은 그에게 있어 오랜 전투로 인한 피로 누적은 말 그대로 누가 잡아가도 모를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위이이이이이잉!
캔 맥주와 안주를 먹으면서 보려고 올려놓은 그의 휴대폰이 아까 전부터 진동하고 있었지만, 이미 깊은 잠에 든 그를 그 정도로는 깨울 수 없었다.
주변에 있는 그의 기사들도 던전 임무를 마친 그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도 없었고, 각자 할 일을 위해 움직여야 했기에 휴대폰은 계속해서 공허하게 진동할 뿐이었다.
***
서울 외곽 전선, 청룡 길드 진영.
고천수를 비롯한 청룡 길드원들과 수도방위사령부의 장교들이 모여 있는 진영에서는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도살왕 세력들이 쳐들어오는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지만, 이번엔 특히나 힘들었다.
그 이유는 바로 적의 공세가 평소 때와 너무 달라서였다.
기타 하위 길드의 간부 및 장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고천수 길드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이 목사의 공격은 뭔가 다르다. 섬세하다고 하는 게 맞겠군. 알다시피 도시 외곽 장벽에 있는 방위 시스템과 무인 기관 포탑들이 작동해서 도시 방어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이번 공격에선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그 방위 시스템에 동력을 공급하는 제네레이터 쪽으로 공격이 집중되고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제네레이터 위치는 3대 길드장급이나 아는 극비 중에서도 극비고… 안다고 해도 노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나도 처음엔 그냥 우연인 줄 알았지만, 고의적으로 강한 전력을 그쪽으로 보내고 있어서 사실로 보인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전력을 보강하면 될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지금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태이지.”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내부의 적.
늘 스캐빈저와 헌터의 생활을 동시에 하고 있다가 유리한 쪽에 달라붙는 약소 규모 길드의 헌터들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물론 그들 중에서도 제대로 된 이들도 있지만, 승자 독식으로 굴러가고, 권력으로 패악질을 해 온 상위 헌터들의 행동이 오래되다 보니 대부분 기회주의로 변한 이들로 헌터들이 흥할 땐 그들 아래서 일하고, 스캐빈저들이 강하면 바로 배신해 버리는 자들이 더 많았다.
“그놈들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일반 마트나 가게를 터는 건 기본이고, 군수 물자까지 노린다니까요. 놈들은 특히 가격이 비싸고 몬스터에게 효과가 좋은 마정석 탄환과 포탄을 노리는데, 가격도 문제지만 그게 다 전선 보급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제만 해도 2만 발 가까이 운반하던 차량이 폭발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일단 아카데미아 학생들을 긴급 동원해서 내부 단속을 시키고 있습니다만, 힘듭니다.”
“그것도 그건데 고천수 양반, 댁들 일 잘하는 거 맞습니까? 아니, S급 몬스터는 빡세니까 그렇다고 쳐도 A급 몬스터는 왜 못 자르는 겁니까? 댁들이 엘리트 몬스터들을 잘라 줘야 밑에가 편한데! 밑의 놈들 아무리 잡아 봐야 놈들은 무한히 보충하는 거 모릅니까?”
“아주 무한히 보충하는 건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튼 이대로 계속 소모전해 봐야 우리만 X 되는데, A급도 빨리 못 잡는 S급 헌터가 어디 있냐고!”
역대급 공세에 혼란이 커지자 기어이 아군끼리 사이마저 나빠진다.
하위 길드로서는 그 많은 권력을 독점하고 재능 있는 인재들까지 다 가져간 3대 길드인 청룡이 지금 아무것도 못하는 게 한심하고 이해가 안 갔다.
물론 청룡 길드도 싫어서 A급도 못 처치하는 건 아니었고 나름 사정이 있는 처지였다.
“던전과 다르게 야전에서는 놈들이 약한 쪽만 노리고 치열하게 공세를 펼치다가 도망치는 작전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타격 조를 구성해서 처리하곤 있다. 다만 S급 몬스터들이 이렇게 많이 동시에 활동하는 게 역대급이라서 그렇지.”
“…아니, 그동안 대한민국에 그 어떤 위기가 와도 대비가 가능하다면서 오만 패악질을 다 해 놓고는!”
“그걸 따지려면 지금 제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다른 3대 길드에게 죄를 묻는 게 낫지 않을까? 신강남이라는 우물을 만드느라 나약해져서 대판 깨진 서울 놈들도 놈들이지만, 아직도 간 보는 올림푸스보단 낫지.”
“올림푸스……!”
저 먼 하늘 위에 떠 있는 천공섬의 주인.
그동안 없었던 거대한 위기임에도 그들의 본대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고, 한국 지부에서 일하는 하위 헌터들만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 여기는 그래도 S급, A급 같은 상위 헌터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사태 수습을 하고 있으니 그나마 나은 처지였다.
“그래서 장군님, 올림푸스의 상태는 어떤지요? 아마도 정부와 협의에 들어간 것 같던데, 제 쪽으로 연결하니 불확실한 대답뿐이라서 말입니다.”
“오기 전에 듣자 하니 올림푸스 길드에선 태평양 라인과 중국, 러시아, 일본 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긍정적으로 투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일단 헤라클레스의 가호를 받은 SS급 헌터가 오는 것도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올림푸스는 성좌들이 내려 주는 가호에 따라 각 구성원들에게 스킬과 능력이 자동으로 부여되는 형식이다.
헤라클레스의 가호의 경우 신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헤라클레스의 힘과 능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그 힘을 100퍼센트 모두 내지는 못하지만 레벨의 성장에 따라서 올라갈 수 있게 되며, 신이 내린 스킬들을 지니게 되기에 막강한 올림푸스 길드의 근원이었다.
12성좌들이 내린 가호를 가진 헌터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현재 세계를 돌면서 남은 가호의 적합자를 찾아내고, 또 세계의 위협이 되는 악(惡) 성향 성좌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거 반가운 소리지만 가능하면 빨리 오도록 해 주십시오. 지금 다행히도 이 목사 쪽에서 아크데몬 비스트들이 출전하지 않아서 이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지, 저쪽에서 조커를 꺼내면 사태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이미 지방은…….”
“지방은 난리가 났죠! 서울엔 자그마치 S급 헌터가 7명이나 있지만! 밑의 지방은 부산에 S급 1명! 광주에 S급 1명이 끝입니다. 이미 난리라고요!”
“대신 그만큼 적도 약하지 않나? 여기는 주변에 S급 몬스터가 10마리도 넘게 대기 중일세. 아무튼 슬슬 전장에 나가 있는 친구와 교대해 줄 시간이니 이만하지.”
지금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S급 헌터인 고천용과 채지영이 전선에서 싸우느라 정신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그들의 체력을 온존하기 위해서라도 교대해 줘야만 했다.
그렇게 고천수는 뒤에서 떠드는 소리를 무사한 채 일어나서 텐트 밖을 나왔다.
그러자 참혹한 전장의 소리가 일제히 그의 귀에 들려온다.
“장벽이 뚫리게 해선 안 된다! 공중 지원을 더 불러!”
“지금 공군 기지에 스캐빈저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놈들이 연료 탱크를 노리고 테러를 가하고 있어서 난리입니다!”
“젠장할! 망할 헌터들은 뭐 하는 거야?”
“큰일 났습니다! 마정석 탄약을 보급하는 보급대도 ‘성좌 산거정’ 수하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A급 몬스터 ‘용족 도살자’가 달려옵니다! 화력이 모자랍니다! 아! 다행히 막았습니다! S급 헌터님이 와 주신 덕분에! 하지만 끝장내려는 걸 막으려고 다른 놈들이 몰려옵니다!”
서울시를 지키는 장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참혹한 전장의 소리.
늘 어떻게든 이겨 온 대한민국의 인간들이었지만, 오늘은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만 들려오는 걸로 봐서는 힘들어 보였다.
유례없는 악(惡) 성향 성좌들과 스캐빈저 대연합은 고천수 그가 보기에도 엄청난 위기였고, 해결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음… 이거 어쩌면 한국을 떠야 할 수도 있겠군.’
길드의 장으로서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의 커다란 위기나 다름없었다.
SS급 마인 인간 사육사 이 목사는 인간 목장을 세우고, 인간 요리를 대접하는 그 독특한 성향과 광신적으로 도살왕을 섬기는 인물이라서 다른 스캐빈저나 악(惡) 성향 성좌들이 그와 연계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간과한 것이 큰 문제였다.
‘다만 대연합치고는 연계가 하나도 없는, 그저 동시 난립이라서 양만 많다는 거지. 연계로 인한 시너지가 나지 않아서 문제이지.’
이번 악(惡) 성좌와 스캐빈저의 대연합은 상호 간에 대화나 작전 같은 거 없이 그냥 같은 날 동시에 전투를 해서 각자 약탈이든 뭐든 하자는 수준의 연계였다.
실제 군대를 습격한 스캐빈저나 몬스터들은 그저 마정석 탄환, 식량, 무기를 약탈하기 위한 거지, 무언가 전략, 전술적 시야를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약간의 여유만 있으면 각개격파를 노릴 수도 있을 텐데… 흠…….’
상대의 약점이 훤히 보이는데도 그 약점을 찌를 여력이 없는 게 아쉬운 고천수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S급 2명만 뺄 수만 있으면 지방에 순회공연을 시킬 텐데 말이다.
지금 서울에 있는 S급 6명은 아크데몬 비스트를 대비하기 위해서 남거나 전선 유지를 위해 실시간으로 전투 중인 인원이었기에 별동대로 삼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A급, B급으로 구성하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되고 말이지. 올림푸스 놈들도 지능이 있다면 이걸 눈치챘을 텐데?’
올림푸스 길드.
일단 선(善) 성향이라고 공언한 길드였지만, 글로벌한 규모로 움직이며 여러 곳에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핑계로 대한민국에 큰일이 벌어졌을 때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얌체 같은 길드였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 일어난 사태는 매우 심각한 경우였다.
만약 대한민국을 온존할 생각이 있다면 진작 S급 헌터들을 투입시켰을 텐데, 지금까지 시간을 끄는 거라면 어쩌면 대한민국을 포기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러기엔 중국 견제와 일본 지원, 태평양 전선과 동남아시아 무역로 등등 복잡한 문제가 생길 텐데. 흠… 모르겠군.’
“아, 형니이이임! 오셨습니까아아?”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 고천수는 장벽 위에 도착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계속 싸웠는지 피와 몬스터의 체액으로 전신이 범벅이 된 고천용이 그를 맞이한다.
장벽 아래에는 지금도 몬스터들이 몰려온 상태에서 군인과 헌터들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고, 장벽과 공중에서 지원 사격이 계속 퍼부어져서 시끄러운 전장의 모습이 그대로 펼쳐진다.
“그래. 내가 왔다. 상황은?”
“별로… 안 좋습니다. 후우… 후우… A급 몬스터 놈들, 진짜 엄청 몸을 사려요! 몬스터들 주제에! 대신 B급은 다수 잡았는데… 군세가 꺾이질 않아요. 게다가 저기… 저기! 보호막 보이시죠? 저 안에서 이 목사 놈! 실시간으로 우리 희생자를 잡아다가 아크데몬 비스트들에게 요리 대접을 하고 있다니까요!”
그의 말대로 저 멀리 은은한 붉은빛을 띤 반구형 배리어가 설치된 곳을 바라보자, 약간 흐릿하지만 아크데몬 비스트들을 앉혀 두고 한창 요리 중인 이 목사의 모습이 보인다.
그 밑에는 악마들이 죽든 살든 전장에서 싸운 군인과 헌터를 잡아서 나르고 있는 모습까지,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미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이 목사 놈, 대체 어디까지 미친 짓을 해야 속이 풀리는 거지?”
“아무튼… 저거 부수려면 S급 헌터 정도의 화력이 나와야 하는데, 제가 가질 못하니…….”
“…진정하고 빨리 들어가서 쉬어라. 네가 쉬어야 그다음 채지영이 교대할 테니까.”
자신들도 물론 돈과 권력을 위해서 뭐든지 하는 이들이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
고천수 같은 이들은 그저 욕심 많고 추악한 인간일 뿐이지만, 인간 사육사 이 목사 저놈은 이미 괴물이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인간을 포기한 괴물. 그리고 괴물은 오직 영웅만이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