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같은 시각.
B급 던전-고블린 제국 본성.
“인구 추정 40만이라며! 근데 왜 이렇게 많은 건데에에에에에! 끝이 안 보이잖아! 아니, 40만 고블린이 전부 다 전투병은 아닐 거 아니야? 어린 개체도 있을 거고! 암컷도 있을 거고! 노인도 있을 거고! 사회 구성이라는 게 그렇잖아! 근데 왜 이렇게 많은 건데에에에에! 젠장할!”
[키에에에엑!]
콰직!
눈앞에 달려드는 고블린을 티탄의 말뚝으로 곤죽으로 만들어 버린 나는 그럼에도 전혀 줄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오는 고블린의 파도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3개의 첨탑을 공략하는 동안 거짓말 안 보태고 10만 마리는 넘게 죽인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면 진작 병력들은 다 고갈이 나야 정상인데, 어디서 나오는 건지 고블린들은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폐하, 말씀드렸잖습니까? 알고 보니 지하에도 도시가 만들어져 있다고 말입니다. 아칼론 경이 스캐닝해 본 결과 그거 다 합치면 추정 인구수가 10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잠시 현실 도피하느라 잊고 있었어. 왜 여기에 아무도 안 오려고 했는지 잘 알겠군. 고블린으로 B급 경험치 먹을 수 있는 건 개꿀이다 싶었는데, 대부분 욕심부리다가 망할 걸 두려워한 거군.”
“사실 폐하가 아니면 여기는 보급이나 식량 각종 문제 때문에 ‘전쟁’ 스케일이라서 길드 단위로는 무리일 겁니다. 흠!”
“그나마 천검군 애들도 있고, 첨탑을 점령해서 거점으로 쓸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근데 아무리 봐도 여기가 B급이라는 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일종의 밸런스 패치인지 중앙의 성을 마법으로 보호하는 첨탑을 점령하면 그곳의 보호 기능을 첨탑 자체로 돌려서 일정 시간 동안 적의 공격을 방어해 주는 보호막을 설치할 수 있었고, 그곳을 수면, 식사, 휴식을 할 수 있는 거점으로 쓸 수 있었다.
다만 마력 용량으로 인한 제한 시간이 있어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지만, 그래도 수만 단위의 싸움을 하고 난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재정비를 할 수 있는지라 감지덕지였다.
“‘그분들’이 그렇게 정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폐하.”
그분들이란 하늘 위에 있는 ‘성좌’들을 뜻하는 것이리라.
각성자의 기적도 그들의 유산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수많은 별과 세상을 놀이판으로 쓰는 놈들. 아무튼 절대자인 그들이 이 B급 같지 않은 던전을 B급이라고 하면 B급인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싸우는데, 내성의 고블린들은 바깥보다 훨씬 더 중무장한 것은 물론 금속으로 된 골렘과 조잡하지만 나름 전차랍시고 만든 것까지 동원해서 타고 오고 있었다.
[키이이에엑! 키엑키엑!]
“으음… 여기 온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후우~ 슬슬 경험치 벌이 그만하고 본성으로 갈까?”
현재 유성원의 레벨은 61.
한 달간 파도처럼 몰려오는 고블린들을 도륙해서 이미 C급 던전 커트라인은 넘어선 지 오래였다.
여기서 쭈욱 더 업할 수 있기는 했지만 결국 고블린들이라 경험치를 적게 줘서 레벨 업이 슬슬 지지부진해지고 있었다.
또한 계속된 전투로 인한 정신적 피로와 씻지 못하는 스트레스로 지쳐 가는 중이었다.
“61레벨이 되니 효율이 너무 떨어지네. 1천 마리 정도 잡은 것 같은데, 1퍼센트도 안 오르네. 싸움만 계속해서 내 꼴도 말이 아니고. 한 달가량 목욕도 안 하니 거의 짐승 꼴이잖아.”
“원래 전쟁이란 그런 법입니다, 폐하.”
[흠하핫, 아니면 나처럼 심연의 존재로 거듭나는 건 어떤가? 목욕할 필요가 없다네.]
“됐네요.”
어느새 시꺼먼 가울프가 검에 묻은 피와 지방을 털어 내면서 다가와 한마디 거들었지만 유성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편해 보여도 인간을 벗어난 존재가 되는 것엔 두려움을 느껴서인지 거부하는 그였다.
“저 가울프 경의 말은 그렇다 치고, 그럼 지하 쪽은 건드리지 않고 봉쇄만 한 다음 본성을 치는 걸로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래도 할 수 있을 때 레벨 업을 해야지. 휴우~ 힘든 싸움을 계속하는 것도 나름 도움이 되는 것 같고… 결국 지하에 100만이나 더 있으면… 뭐, 경험치도 좀 되겠지. 그리고 다행히 상점을 열 수 있는 덕분에 마정석들을 팔아서 물자도 보충 가능하니~ 아무튼 한계까지 가 보자.”
오늘 두 걸음 걸으면 내일 한 걸음 덜 걸어도 되며, 다른 던전에 가면 더 힘든 일이 있을지 모른다.
경험치가 적어져도 여기서 뽕을 뽑자고 생각한 유성원은 고블린들을 계속해서 쳐부숴 나갔다.
그렇게 아칼론이 안내한 좌표로 가서 지하 도시로 진입하려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뿌우우우우우!]
[키가가각! 키아각! 키아각!]
그와 동시에 갑자기 싸우던 고블린들이 전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놈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일단 유성원에게 모여들어 상황을 보고한 뒤 주변을 경계했다.
“물러난다고? 뭐지? 뭔가 다른 방안을 펼치는 건가? 아니면 마법? 아니면… 역시 중간 보스 같은 놈이 등장하려나? 어쨌든 물러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니까 경계를…….”
“단장님! 황성에서 적군이 나오고 있습니다.”
“역시 최종 병기 같은 게 등장하는 건가? 후우~ 그래, 성안에서 승부를 내는 것보다 여기서 보는 게 낫겠지. 엘드라엔을 불러서 단숨에…….”
“그게… 백기입니다! 단장님! 적들은 지금 무기를 버린 채 백기를 든 고블린 엠퍼러를 따라서 오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드디어 결전이겠구나 싶었지만 들어온 소식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당황한 유성원은 주변의 건물로 올라가서 적들이 오는 것을 직접 바라보는데… 과연 섬멸의 말대로 고블린 부대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무기를 버린 채 고블린 황제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아마 항복이겠죠.”
“던전의 몬스터가 항복을?”
“어쩌면 계책일지도 모르니 모두에게 대비를 시켜 두겠습니다. 폐하 또한 갑옷을 절대 벗지 마십시오.”
저번에도 그렇고 던전 내에서 자꾸 기묘한 현상을 겪자 아리송해하면서도 유성원은 유청의 말대로 제자리에서 고블린 엠퍼러를 기다렸다.
일단 백기가 저 고블린들에게도 항복의 의미인 건지 놈들은 전부 무기를 버리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유성원에게 다가왔다.
“…근데 이거 어떻게 대화하냐? 아칼론, 고블린 말 번역 되냐?”
[해당 기능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즉, 못 알아먹는다는 거네. 어쩌지? 고블린어 스킬이라도 배워야 하나?”
“다른… 별… 장소부터… 넘어온 키 큰 자들에게… 우리 생각 전한다. 우리… 항복… 더 싸움하기를 거절.”
“뭐야? 우리말 하잖아?”
난감해하던 차에 고블린들 사이에서 한 명이 나오더니 스크롤 같은 걸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키이익.’이나 ‘케엑.’ 같은 의성어로 이야기하던 놈들의 입에서 약간 어눌하고 어색하지만 한국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왕… 빅-왈드 13세… 더는… 백성과 병사들이… 무의미함으로 아파 받는 걸… 못 참아. 내린 결정… 키 큰 황금의 왕에게… 항복. 제국… 운명… 키 큰 황금의 왕에게… 맡기겠노라. 라는 말을 건넨다.”
“어떻게 우리말을 하는 거지?”
“아마 전투 중에 우리가 하는 말을 연구했나 봅니다. 마법사들이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학자였군요. 게다가 단시간 내에 이 정도까지 연구했을 줄이야. 이 제국, 고블린들 주제에 꽤 문명 수준이 높군요. 아마 아카데미 혹은 칼리지 같은 고등 교육 시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유청의 해석을 들으면서 유성원은 고민에 빠진다.
예상치 못한 항복 의사 표현. 그것도 본성에 아직 싸울 여력이 있음에도 먼저 내려와서 항복을 하는 건 정말이지 예상외였다.
본래라면 끝까지 저항하는 놈들을 따라 성 내부까지 들어가서 싸워야 정상일 텐데… 뭔가 혼란이 오는 그였다.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뭔가 의견 있어? 어쩌면 좋을까?”
“그건 폐하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모든 운명은 폐하에게!”
‘…아니, 이 새끼들아. 나보고 어쩌라고?’
진짜로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해 본 유성원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눈앞에 무릎 꿇은 수만 단위의 고블린들, 그리고 주변에서 자신의 결정을 기다리는 기사들.
등 뒤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는 유청까지, 모두 부담스러웠다.
‘그냥 엎을까? 아니, 그럼 X 되잖아.’
유성원은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고민에 빠진다.
이 제안을 엎으면 그대로 다시 전쟁이 시작될 거고, 이놈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저항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한 달 내내 싸워서 피로와 스트레스로 가득한 상태였기에 가능하면 제안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받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혼란이 온다.
‘이거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뭔가 새로운 이벤트가 생기나? 아니면 재수 없으면 여길 못 나간다든가? 젠장, 꼭 이럴 때는 망할 기사도의 길이 나타나서 조언도 안 해 주고! 제기랄! 아… 맞다.’
“…키엑?”
‘…아무튼 나도 지쳤어. 운명을 맡긴다는 게 아마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의미일 테니까 나오지 말고 짱박혀서 살라고 하면 되겠지.’
차후에 이 고블린 제국이 자신의 말을 어길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유성원이었다.
나중에 배신하더라도 그러면 그때 다시 들어와서 던전을 작살내면 그만이었다.
최종전이라서 텐션 잔뜩 올렸다가 항복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욱 탈력감이 커진 그는 여기서 그만하고 싶었다.
“좋아. 승낙한다. 무기를 내린 이상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 나 유성원은! 고블린 제국의 항복을 받아들이겠다.”
“키엑?”
“물론 내가 너희 언어를 하는 게 아니니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주지. 나는 항복 받아들이겠다. 싸움 더 안 한다.”
아주 친절하게 고블린들에게 맞게 말해 줌으로써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눈앞에 새로운 상태창이 나타난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의견을 들은 고블린 마법사가 몸을 돌려 고블린들에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데, 충격적인 내용이라 경악에 빠졌다.
[항복해 온 상대의 제안을 훌륭히 받아들였고 그들을 배려하는 그 마음씨, 기사도에 부합합니다. 고블린 제국은 이제 당신의 속국이 되어 당신의 지배를 받게 되었기에 여러 가지를 요구할 수 있게 됩니다.]
“뭐?”
“감사! 키 큰 황금왕, 만세! 우리 제국! 새로운 인도자와 함께 한다! 키 큰 황금왕! 경배한다. 찬양한다. 따를 것이다. 키케렉 케케콕! 키케옥! 카악! 코올든! 콜! 더 칸! 칸타카스!”
고블린 마법사의 유창한 고블린어가 퍼져 나가고,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이한 유성원의 안색 역시 파래지기 시작한다.
‘속국’이라는 개념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대충 보상이나 받고 나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그는 마법사의 인도 아래 자신의 앞에 무릎 꿇는 고블린 황제를 바라보며 난감해하는 동시에 기사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려고 바라본다.
“야, 너희들, 보고만 있지 말고…….”
“폐하의 첫 정복을 감축드리옵나이다.”
[승리를 축하한다, 계약자여. 흠하하하핫!]
[주인… 승리…….]
망할 그의 기사들과 천검군 병사들까지 그의 주변에 무릎을 꿇고서 예를 갖추는 모습이 자신을 돕기는커녕 한술 더 뜨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도망갈 길은커녕 다른 방안이 없어진 유성원은 팔자에도 없는 지배자가 되어서 고블린 황제의 예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B급 던전 고블린 제국을 속국으로 삼게 된다.
이것도 보상이라면 보상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