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웃으면서 말했지만 전혀 웃으면서 말할 사건이 아니었다.
버림이든 계약 파기든 결국 성좌에게 받은 은혜나 특혜를 모두 반납하는 것은 물론 성질 더러운 성좌일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 저주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유성원은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아, 그래도 일종의 합의를 통해서 계약을 끊은 거라. 딱히 저주는 안 받았어요.”
“대신에 엄마도 나도 레벨이랑 스킬이 엄청 날아갔지만요. 참고로 저는 45에서 30, 엄마는 75에서 45로 뚝! 떨어졌어요.”
“그, 그렇게나?”
그나마 신아영은 15레벨 다운이었다. 30레벨에서 45레벨로 복귀하는 건 D급 던전만 돌면 되기에 쉬웠다.
하나 신소미의 경우는 심각했는데, 기존의 75레벨이 45레벨로 떨어진 건 레벨 하락 폭도 컸지만 C급, B급 던전들로 레벨 업을 해야 했기에 이는 헌터 인생이 끝날 수도 있을 만큼 심각한 사태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대가죠. 길드장 된 몸이 성좌의 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 본진을 지키지 못했고, 길드 신용을 크게 깎이게 했고 혼란을 일으켰으며 길드원들 모두의 반발을 샀으니…….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에요.”
“아, 참고로 저는 사실 굳이 안 그만둬도 됐지만 엄마가 나가는데 남을 수 없으니 그냥 끊어 버렸어요. 지금 저 혼란한 길드장 자리 받아 봐야 머리만 아프고, 또 결국 제가 엄마 딸이라서 논란도 피하지 못할 테니까요.”
신소미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신아영은 길드에 남을 수 있었음에도 어머니의 일을 포함해서 길드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게 싫었기에 마찬가지로 성좌와의 계약을 끊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유성원은 자신 때문에 이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기에 죄책감을 느낀다.
“정말 죄송할 따름이네요.”
“제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있으면 전력으로 도와드릴게요. 레벨 업이라든가, 스킬 북이라든가 말이죠. 으음…….”
“그럴 때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인재를 이렇게 내쳤네! 하면서 적극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거예요. 폐하.”
“악! 폐하는 하지 마세요!”
그녀의 지적대로 신소미는 길드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성좌에게 버림받았지만 누구나 탐낼 만한 인재다.
비록 레벨이 다운되고 스킬을 빼앗겼지만 A급 던전까지 클리어한 경험과 길드장으로서 중견 길드를 운영해 본 경험치는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신아영 또한 레벨이 낮아지긴 했지만 (전설)봉황무 스킬을 비롯해서 격투가 계열 클래스로서의 기반은 탄탄했기에 쓸모 있는 인재였다.
“…하아~ 아무튼 뭐, 아영이든 소미 길드… 가 아니라, 소미 누님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든 간에 이미 신뢰가 확실한 분들이라 어떻게 해서든 도와드렸을 거예요. 아무리 제가 밑바닥 쓰레기에 남 일에 상관 안 한다지만 은혜도 모르는 놈은 아니에요.”
“그래서 신용이 있는 거죠.”
“으음… 일단 레벨은 저랑 다니면 복구가 될 거고, 스킬은 뭐…….”
레그혼으로부터 얻은 (전설)도살왕의 가호가 깃든 반지를 사용해서 상점을 열어서 알아보는 방법이나 아니면 옥션이나 경매로 올라와 있는 아이템을 구입하는 식으로 방법이 있긴 했다.
다만 문제라면 이제 클래스.
유성원 자신은 아직 서약을 마치지 않아서 클래스가 없지만, 기존에 그녀들에게 부여되었던 저지먼트 계열 클래스가 사라진 건 어떻게 커버가 안 되었다.
“클래스는 꽤 중요한데 말이죠. 아니면 새로운 성좌를 찾는 건?”
“그들도 계약 파기된 이들은 별로 안 좋아하죠.”
“아, 맞다. 그렇죠. 하아~ 난감하네요. 그럼 성좌를 뺀다면 결국… 고급 스킬들은 전부 상위 클래스나 스킬 북을 통해 열리는데, 클래스 체인지에 필요한 스킬 트리를 찾는 것도 어려운데 말이죠.”
성좌가 없던 시절에도 각성자와 헌터는 있었다.
그들은 클래스 업을 어떻게 했느냐면 스킬 북을 얻어 자신이 배울 수 있는 스킬과 조합을 하거나 특정 던전, 몬스터를 잡으면서 필요조건을 채우는 식으로 새로운 클래스를 찾거나 클래스 업을 해 갔다.
“지금은 거의 다 성좌의 가호를 받거나 그 인도 아래 맞춰 가는 걸 택해서 저런 경우는 거의 재능이나 특수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방법이 되어 가지고… 스킬 조합이나 조건을 찾아야 하는데… 거의 사라진 방법이지.”
훨씬 더 효율이 좋은 방식이 새로이 생긴 덕분에 더 이상은 사용되지 않았다.
애초에 자질이 뛰어나거나 능력이 있어 보이면 성좌들이나 그들의 부하들이 귀신같이 찾아와 접선하기 때문에 이 방법은 결국 능력이 모자라거나 악(惡) 성향 스캐빈저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자네, 바보 같은 걸로 고민하고 있구먼.”
“네? 어르신, 뭡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겐가?”
“아이언 포트리스. 성좌들이 나타나기 전에 세계를 수호하던 그랜드마스터의… 아아!”
그렇다. 이곳 아이언 포트리스는 성좌들이 나타나기 전 최고의 각성자들과 헌터들이 모여 세계를 위해 싸우던 중심점이었다.
구세대지만 분명 그들은 세계 최고의 헌터들로 지금까지 인류 문명이 유지되는 데 큰 공헌을 한 자들. 이곳엔 그들의 데이터가 모두 남아 있었다.
그들의 클래스와 스킬 트리에 관한 데이터도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우리가 써도 될까요?”
“미래를 위해 쓰라고 남긴 게 유산 아닌가? 게다가 나는 자네가 관리하게끔 일임했다네. 그러니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면 쓰는 거지. 아, 참고로 보관되어 있는 아이템도 있으니 그것도 보게나.”
“으음… 뭐, 후회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럼!”
빠르게 결단을 내린 유성원은 곧바로 신소미 모녀에게 아이언 포트리스의 모든 자료와 스킬 북을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다.
성좌의 시대 이전 그랜드마스터가 미래를 위해 쌓아 온 지식과 재보가 두 사람에게 개방된 것이다.
“…와아, 엄마, 이거 꿈 아니지? 이 스킬 북 리스트 좀 봐. 말도 안 돼. 게다가 클래스 정보도 많고! 아이템도 넘쳐 나! 저, 정말 이거 마음대로 써도 돼요?”
“흥분하지 말고, 스킬 트리라든가 조건 잘 살피고. 일단 클래스 정보부터 보고 잘 고르거라.”
“이 정도면 웬만한 성좌 못지않은 특혜군요. 하지만 왜 이런 것들을 지금까지 그냥 보관만 하신 건지…….”
신소미의 의문은 당연했다.
웬만한 성좌의 은혜에 지지 않을 만큼 막대한 재보와 정보들이 쌓여 있는 이 아이언 포트리스를 왜 지금까지 개방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만약 유성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봉인되어 있었으리라.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무기라고 해도 쓰는 사람을 잘 찾아야 하는 법이지. 이상한 놈이 여기 있는 유산을 잘못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르신. 다만…….”
“알고 있네. 저 친구에게도 나름 결함이 있다는 걸. 하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기대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나도 계속 지켜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또 자네가 잘 보살펴 주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소미는 이내 자신의 스킬 트리와 아이언 포트리스 내의 자료들을 대조해 가면서 새로운 클래스 업과 스킬들을 얻기 위한 루트를 짜기 시작한다.
협약이 이루어졌지만 현재 유성원을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일촉즉발이나 다름없었다.
협회는 협회대로 불공정한 협약에 불만이 있을 거고, 길드들은 갑자기 자기들의 세력 구도를 바꾼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스캐빈저나 마인(魔人)들 모두 여전히 건재하다.
‘그러니 여유 부릴 새는 없어. 한시라도 빨리 던전에 가서 레벨 업을 하고 전력을 더욱 강화해야 해.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을 하겠지?’
“후우~ 자아! 주변 정리도 끝났으니, 곧바로 B급 던전 계획부터 짜야겠어요. 머물 곳도 생겼으니 이제 생각하던 일을 해야죠.”
유성원 또한 자신의 앞날이 그리 조용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튜토리얼이 끝나자마자 다음 할 일을 명확히 정하고, 그것을 이행해 나가기로 한다.
황금 용기사든 황금 마인 기사든 이제 자신은 미지의 존재가 아닌, 명확히 헌터계의 판에 앉은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
며칠 뒤.
개성특급호텔, 한라산 대연회실.
북한 정권 시절, 대한민국 적화 통일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던 시기에 만들어져서 ‘한라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대연회실에는 각기 개성적인 옷차림을 한 손님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각자 다른 성좌를 섬기는 스캐빈저 세력의 사도들로, 모두 도살왕의 사도인 이 목사의 초대를 받고 온 이들이었다.
“허허허, 다들 시장하실 텐데~ 마음껏 드시죠. 오늘은 귀한 손님들이 오신 만큼 모든 요리를 제가 직접 조리했습니다. 허허헛!”
연회실 벽 쪽에는 조리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새하얀 요리복에 요리사 모자를 쓴 이 목사가 친히 조리 기구를 들고서 열심히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은 앉아 있는 다른 스캐빈저들과 악(惡) 성향 사도들에게 그 요리를 가져다주는 중이었다.
“아니, 댁이 뭘로 요리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 티를 좀 덜 내면 안 됩니까?”
커다란 꼬챙이에 사람을 통째로 꽂아서 만든 바비큐에서 고기를 썰어 담는 모습을 보며 스캐빈저 그룹 ‘대림(大林)’에서 온 사자가 인상을 쓰면서 반발하지만, 이 목사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으면서 말한다.
“허허허, 음식이 가장 맛있는 건 결국 만든 직후입니다. 자자, 많이들 드십시오.”
“많이 먹으라고 해도 말이지……. 하아아~ 풀이나 씹어야겠군.”
아무리 악독한 스캐빈저들이라곤 하지만 인육 식사는 그들 역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다들 최대한 고기류는 피해 가면서 샐러드나 빵 쪽을 건든다.
그나마 맛있게 먹는 것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 사절들로, 그들은 매우 만족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참고로 오늘 만찬에 나온 샐러드의 드레싱은 모두 제가 직접 만든 것으로, 특별히 엄선한 암컷의 뇌수와 골수를 같이 갈아서 곁들였습니다. 허허허.”
“에라이! 진짜!”
“또 우유 또한 마침 새끼를 밴 암컷에서 나온 것을 사용했지요. 그래서 약간 비릴 겁니다. 하나, 그게 또 고기의 맛을 극대화시켜 주는 요소이지요. 허허허.”
“젠장! 젠장! 젠장!”
“아! 좀!”
“그만 좀 합시다! 이 목사 양반! 한창 준비하느라 바쁜 사람들 모아서 한다는 짓이 이런 역겨운 걸 대접하는 겁니까?”
“역겨운? 맛이나 보고 말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재료의 문제와 요리의 맛은 엄연히 별개입니다. 허허허. 정 불만이시면~ 다음 요리 재료로 해 드릴까요?”
지그시 노려보는 이 목사의 눈빛에 반발하던 스캐빈저는 결국 벌벌 떨면서 그대로 고개를 팍 숙여 버린다.
이 이상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음엔 아마 자신이 지금 눈앞에 있는 접시 위에 올려진 바비큐 신세가 될 것이다.
아무튼 모여 있는 대부분의 스캐빈저와 중소 악(惡) 성향 성좌의 사도들은 먹는 시늉을 하며 대강 시간을 보내면서 그가 어서 본론을 꺼내길 기다린다.
“허허허, 간만에 직접 요리해서 다른 분들에게 대접해 드리니 꽤 즐겁군요. 앞으로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러지 마!’
‘그런 건 너희 애들이나 데리고 하라고!’
‘저 새끼 하나 때문에 같은 ‘도살왕’ 세력인 우리도 식인종으로 몰리는데……. 총애를 잔뜩 받는 최고 사도라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자, 그러면 어느 정도 메인 식사도 마쳤으니 공지 사항을 알려 줘야겠지요. 허허. 아무튼 여러분,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특별한 손님이자 우리의 계획을 도와주실 분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을 테니 입장해 주시죠.”
그렇게 이 목사가 가리킨 곳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 나타난지라 스캐빈저들은 물론 참여한 다른 성좌의 사도들도 깜짝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놈이 어떻게 여기에?”
“이 목사가 납치한 건가? 아니, 그럼 손님이라고 할 리 없을 텐데…….”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킨 그는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와서 이 목사의 옆에 선다.
그는 대한민국 영역에서 사는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인물로, 현재 서울 길드의 길드장을 맡고 있는 오경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