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예상도 했고 충분히 예행연습도 했지만 역시 현실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
스테이터스가 높은 탓에 감각도 좋아진 건지 나에 대한 시선은 물론이고 떠드는 소리까지 너무 잘 들리고 있어서 내 신경을 박박 긁었다.
“황금 마인 기사님! 아, 아니, 유성원 씨!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정확히 각성한 시기를 추측 못하고 있는데… 언제 각성하셨고 왜 지금까지 협회나 헌터 생활을 하지 않으신 거죠?”
“섬기시는 성좌는 어떤 분입니까?”
“백야 길드의 길드장 신소미 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협약서에 사인 한 장 하러 온 건데, 정말 성대하게 맞아 주는 거에 감사해서 짜증이 솟을 지경이다.
애초에 이 기레기들은 내가 대답해 주길 바라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 성질을 긁어서 다른 기삿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건지 모를 상황인데……. 세이프 라인 뒤에 있지 않았으면 한 놈 잡아서 인체 표본으로 만들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야, 이놈아! 네놈 때문에 내 재산이 얼마나 날아간 줄 알아!”
“서울 길드에서 일하던 우리 오빠 살려 내!”
“황금 마인 기사의 협회 협약 반대!”
거기에 한구석에서는 신강남 사태의 피해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서 나에 대해서는 물론 협회와 정부에 항의 중이었다.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인 게 아닌데, 저 양반들은 내가 해악을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겁을 상실한 건가? 모를 지경이다.
내가 협약을 관두고 그냥 무력시위로 나선다는 생각을 못하나? 이래저래 짜증만 쌓이고 있었다.
‘그냥 엎을까?’
“투구를 쓰고 있어도 안의 표정은 다 보이는군. 자자, 진정하게.”
“조금만 늦었어도 무슨 짓을 할지 몰랐을 거예요. 사방에서 제 인내심을 시험하네요. 이런 거 처음이라서 가뜩이나 긴장되는데 말이죠.”
“내가 먼저 내려오길 잘한 것 같군. 안내하겠네.”
그나마 안내역으로 와 주신 백가연 어르신 덕에 내가 여기서 티탄의 말뚝을 뽑는 일은 없었다.
어릴 때 상장 한번 받아 본 적 없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낯선데……. 기자들의 시선도 그렇고, 사람들은 시끄러워서 멘탈을 붙잡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유성원 씨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신원에 대해선 다 알아 놓고는~ 마음대로 불러. 황금 마인 기사라고 해도 상관없어.”
“아, 예. 그, 그럼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이어서 어색하게 협회 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 회의실로 향한다.
회의실은 창문마저 없는 지하로 쭉 내려가야만 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당히 깊게 내려가니 왠지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비밀 기지라도 만드는 거야?
“지하에 로봇이라도 있습니까? 왜 이렇게 깊게 갑니까?”
“그, 그게, 저기…….”
“보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지. 카메라 기술은 물론 마법, 주술, 빙의 교감까지 오만 걸로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회의 내용을 노리니 어쩔 수 없지 않나?”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니 단번에 납득이 된다.
어느 정도 알려져도 되는 내용이라면 모를까?
이번 협약 내용은 내가 좀 무리수를 던진 걸 받은 셈이니 외부에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건당 1조짜리 계약 헌터라니. 외부에 알려지면 파장이 장난 아닐 테고, 길드의 반발도 충분히 이해가 갔기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들어오게.”
‘으음… 아무리 봐도 꼰대 같은 양반들 천지인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끝까지 내려와서 잠깐 복도를 걸어 도착한 회의실 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일단 그나마 아카데미아에 자주 행차해서 얼굴을 아는 협회장님을 제외하고는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공통적으로 높으신 분들에다 꼰대 냄새가 풀풀 나는 듯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들이군. 아니,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네.’
“그러니까… 유성원 군인가? 아무튼 앉게.”
“아뇨. 서류에 사인 하나만 하면 더 볼일은 없으니 그냥 서 있겠습니다. 진행하시죠.”
“그렇게 간단한 일도 아니고, 확인할 것도 많으니까 앉는 게…….”
콰아앙!
나는 티탄의 말뚝을 꺼내어 내 앞에 있는 의자에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고작 앉고 서는 문제 가지고 내가 성깔 부리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 꼰대들이 사람 말 좀 듣게 하려면 일단 초장부터 기선 제압을 해야만 했다.
아무튼 이제 의자는 없으니 더 이상 앉으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아, 알았네. 서든 앉든 마음대로 하게.”
협회장은 당황한 듯 상황을 중재하면서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해 준다.
역시 꼰대들은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 줘야 알아먹는다.
조금 거친 느낌도 들었지만, 어차피 내가 좋아서 협회와 협약 맺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줘야 하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협약서에 사인을 받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했으면 하네.”
“왜죠?”
“건당 1조짜리 의뢰를 맡길 헌터인데… 몇 가지 질문할 권리는 있다고 보네만? 그 정도 서비스 정신은 발휘해 줘야 하지 않나?”
“서비스야 주는 사람이 정하는 거죠. 아무튼 협약서나 주시죠. 사인하고 얼른 가게.”
어떻게 보면 냉정할 정도로 딱 잘라 버렸지만 사실 이 정도가 딱 내 마음에 들었고 나에게 유리했다.
이렇게 해서 반감을 쌓으면 쌓을수록 나중에 무슨 위기가 있을 경우 1조를 써서 고용할 생각은 하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감정으로도 꼰대 양반들이랑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거참,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좀 심하다는 생각 안 드나? 젊은 친구가 운수 좋게 각성했으면 그 힘을 세상을 위해 쓸 생각은 안 하고 돈이나 챙기려 하다니! 지금 세상 꼴이 어떤지 알기나 하나?”
협회장과 신경전하는 중인데… 다른 대머리 꼰대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삿대질과 함께 설교질을 시작한다.
뭐지? 저 아저씨는 목숨을 내놓은 건가? 미쳤다고 할 수준을 한참 넘었는데. 지금 내가 협회랑 협약하러 왔다고 해서 이런 걸 가만히 놔둘 거라고 생각하나?
“일단은 누구시죠?”
“나는 헌터 협회 운영총괄 이사인 박범철이라고 하네. 어찌 그리 자기 생각만 할 수 있나? 성좌의 은혜든 뭐든 각성했으면 세상을 위해…….”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꼰대 소리가 시작될 줄은 몰랐다.
신소미 길드장님의 예상에서 1밀리미터도 벗어나지 않는 헛소리라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 그 말, 청룡이나 서울 길드엔 하셨나요?”
“그들은 나름 협회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펼치고 있지. 하나 자네의 이런 행동은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 안 드나?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그렇지 않아도 SS급 헌터라면 충분히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식으로 하는 겐가?”
“알 거 다 아시는 양반이 왜 이러세요? 원래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 하잖아요. 저기 청룡 길드도 그랬고, 서울 길드도 그랬고, 각성자가 나타나기 전에도 그랬고,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늘 그래 왔는데 말이죠.”
다들 못 들을 내용이라도 들은 듯 충격을 받은 얼굴이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입씨름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지만 지금은 확실히 말해 둬야만 했다.
나중에 이상한 착각을 하니 마니 하면서 또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보단 나으니 말이다.
“청룡과 서울 길드가 협회 규칙을 준수한다고요? 뭐, 표면적으로는 그렇겠지만 뒤로는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겁니까? 아니, 모른 척해 주는 거겠죠. 협회 내에선 헌터를 독점하려고 온갖 패악질은 물론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스캐빈저까지 고용하는데 그 양반들, 언제 그런 걸로 처벌받은 적이나 있나요?”
저 꼰대 새끼는 내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태어나서 32년. 협회 보호 시설, 군대, 아카데미아를 겪으면서 세상의 꼬락서니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어떤 면에선 약육강식의 세계라 불리는 자연보다 더 가혹한 곳이라는 걸 말이다.
“아무튼 저도 그냥 평범하게 사려고 하는 거니까 사회 초년생이나 라노베뽕에 취한 고삐리들에게나 먹힐 소리 그만하시고, 빨리 협약서나 주시죠. 확인하고 사인하게.”
“…자네도 결국 똑같군.”
“현명한 거죠. 착하면 호구 되는 세상이잖습니까? 여기 옆에 예시도 있고 말이죠.”
말과 함께 백가연 어르신을 가리키자 협회 인사들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그래, 솔직히 아까 같은 소리도 이 할매 정도로 살아왔어야 할 자격이 있다.
자기들은 그렇게 안 했으면서 입으로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꼰대들의 말로는 턱도 없다.
아무튼 지켜보던 협회장은 사태가 정리된 것을 알고, 주변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전해 주게.”
“어라?”
그렇게 내 앞으로 한 장의 서류… 가 아니라 뭔 철판 같은 것이 다가온다.
순간 당황한 나는 이게 뭔가 싶어서 슬쩍 백가연 어르신을 보는데, 역시 눈치가 빠른 건지 그녀는 바로 커버해 준다.
“이번 경우처럼 최고위급 협약에 쓰이는 아다만티움 철판일세.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고작 종이 쪼가리나 전자 데이터 방식은 자칫하면 사라지거나 위조할 가능성이 크니……. 참고로 근력 S급 이상이 되어야 전용 펜으로 글자를 새길 수 있어서 위조 가능성도 적고, 신원 보증도 확실하지.”
“아, 그렇군요.”
설명을 들으면서 자세히 보니 철판엔 협약 내용이 음각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내 옆엔 도금이 된 통짜 금속제 펜이 잉크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협약에 대한 사인을 이걸로 새기는 식으로 하라는 거군.
게다가 무게도 묵직한 게 보통 사람이 아니라 웬만한 헌터들도 훔칠 수 없어서 정말 안심되는 물건이었다.
“으음… 내용은 문제없는 것 같고, 수작 부린 흔적도 없네요.”
“그랬다가는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는 아까 보았으니 당연한 결과지. 그런데 아주 개인적인 질문이 하나 있네만? 해도 괜찮겠나?”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해 드리죠.”
“만약 우리가 일을 맡기면서 자네에게 1조를 주면 말일세. 그걸 어디에 쓸 생각인가?”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는데…….
이 돈을 주고 일을 맡기겠어? 하는 생각에 그냥 막 질러 버린 금액인데……. 뭐에다 쓸지, 뭘 할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니, 그럼 설마 진짜로 나중에 이 금액을 주고 일을 시킬 작정이란 말인가?
순간 뒷골이 싸늘해졌지만, 그래도 1조라는 액수를 심심해서 적었다고 할 수는 없기에 급히 둘러대기로 한다.
“그냥 대충~ 좋은 일에 쓸 생각입니다.”
“그런가? 알았네.”
뭐지? 이야기 자체는 그냥 지나가는 듯 끝나긴 했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협약 서판은 체크한 결과 우리가 준 거랑 아무 차이가 없었기에 사인을 해서 넘겨줬다.
그리고 한 부는 그대로 내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협회장님과 악수로 깔끔히 협약 자체를 끝내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 기우겠지. 그래, 1조. 1조잖아. 어디 어린애 용돈 액수도 아니고~ 그 돈을 쓸 바엔 길드들 소집해서 시키겠지. 그냥 내 감정을 휘두르기 위해서 해 본 질문일 거야.’
그렇게 협회장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나는 이제 마음 편히 헌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생각을 하며 협회 본부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