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으음! 좋아! 처음엔 누가 감히 천검군(天劍軍)의 깃발을 거나 싶었네만 이분은 멍청하지 않군. 그래서 딱 좋아. 어떤가? 유청, 자네의 생각은?”
“본디 군주 된 자는 멍청하거나 오만하지만 않아도 절반은 갑니다. 한데 이분은 거기에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며, 아랫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우리 천검군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심하고 이 검을 맡길 수 있겠지! 축하드리옵니다, 폐하. 저희는 당신을 이 시대, 이곳에 다시 세운 천검군(天劍軍)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섬기기로 했습니다.”
“자유대로 하라고 하셨으니 자유대로 섬기겠습니다, 폐하.”
다시금 예의를 갖추는 그들을 보면서 유성원은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지만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돌아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 기사들에게서 나오는 눈빛과 압박감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꺼내면 왠지 당장 여기가 전쟁터가 될 것 같은 불안과 그러다가 잘못되면 기사 소환한 게 역으로 손해가 되니 힘껏 참고 에둘러서 말한다.
“저기… 일단은 나는 폐하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아니고, 두 분처럼 대단한 기사님들을 데리고 이룰 만한 거창한 야망이 없고!”
“괜찮습니다. 야망은 이제부터 만들어 가면 되는 겁니다, 폐하.”
“원 주인인 우리 유천 폐하도 처음엔 그냥 서자라서 검술 공부하는 것만 빼면 한량에 양아치였거든. 그러니 지금 폐하 정도면 아주 상태가 좋은 축입니다요. 하하핫! 아무튼 걱정 마십시오, 폐하.”
태연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둘을 보며 유성원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기만 좀 이해하면 이 범상치 않은 기사 둘을 손에 넣고 덤으로 천검군의 코스트까지 줄어드니, 모든 면에서 이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으음… 졸지에 황제가 되셨네요.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이 모든 상황을 본 신소미 길드장의 감상은 유성원의 위장을 더더욱 줄여 놓기에 충분했다.
하나 그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자폭이나 다름없었는데……. 그걸 지켜보던 진석과 유청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오해하고 말았다.
“과연, 이분이 황후 폐하이시군요.”
“아,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닙니다.”
“궁합이 좋으시군요. 아무튼 이제부터 폐하와 천검군 및 이 기사단의 재정과 일정 관리는 저 유청이 인계받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신지요?”
나타날 때부터 천검군의 참모라고 하고 딱 봐도 지략형 캐릭터 같은 유청이 예를 갖추면서 그리 이야기하자 거부할 명분도 없어서 유성원은 곧바로 승낙했다.
그리고 주요 일정, 유성원이 가진 돈과 이 시대의 경제 구조에 대해 그에게 정보를 계속 주도록 한다.
“으음, 알아야 할 게 많은 시대로군요.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 걸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차차 알아 나가도록 하고, 당분간은 폐하의 재가를 꼭 받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우선은 그 폐하라는 호칭 좀 바꿔 주면 안 될까? 다스리는 백성이나 영토도 없는데 폐하라고 불리는 건 이상하잖아.”
“무슨 소리십니까? 천검군은 패황의 친위대이자 황제의 군대입니다. 그런 분을 감히 어떻게 다르게 칭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무엇이라 부르건! 저희는 천검군! 고로 폐하는 폐하입니다.”
‘제발 그러지 말아 줘.’
너무나 간절한 그였지만 유청도 그렇고 진석도 이것만은 양보 못한다는 결연한 눈빛이라 기에서 밀린 유성원은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폐하 신세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정신 사나운 기사 소환이 마무리되고, 조직이 재편되는데……. 유성원이 딱히 나서지 않아도 마치 예비군 모임처럼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정비하고 있었다.
“과연, 가울프 경은 폐하의 계약자이십니까? 좋습니다. 폐하의 첩보단장으로 일하시는 게 좋겠군요. 섬멸 경은 단장이라고 하니 직접적인 경호실장 임무를 맡기겠습니다. 아칼론 경은 누가 봐도 보급관이군요. 나중에 저희 천검군 보급 담당이 오면 좋은 페어가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크록베인 경은 대기하셨다가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세요.”
[좋다… 알았다.]
“그러도록 하지요.”
[흠하핫, 이제야 좀 기사단 같아서 마음에 드는군.]
“폐하, 혹시 편성 중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으시면 기탄없이 하명하시면 됩니다.”
하나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청은 깔끔하게 인원들을 정리했고, 이는 다른 기사들도 불만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성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유청은 방금 소환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빨리 다른 기사들에게서 유성원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어 일정까지 정리한다.
“즉, 바로 내일 그 ‘협회’라는 자들과 협약을 맺는 행사가 있다는 거군요. 걱정 마십시오. 후후훗, 행사 의전이라. 폐하께서 천검군을 얻으신 것과 저희를 부르신 것 모두 다 의도가 있으셨군요.”
“아니, 그거랑 관련 없이 그냥 전력 강화인데…….”
“걱정 마십시오. 이 유청, 오랫동안 천검군의 운영을 맡아 온 몸입니다. 이 ‘지구’ 온 곳곳에 폐하의 위용을 알릴 만한 행차를…….”
“하지 마! 그냥 가서 대충 사인만 하고 올 거야! 그런 거 할 생각 없다고! 애초에 나 스킬 상태도 안 좋아서 병력도 많이 못 뽑는다고! 너희 둘이 와서 코스트가 줄었지만, 정예 병사만 뽑는 데 코스트가 90마력이라 20명밖에 소환 못해. 그 이전에 이미 그 계획은 세웠으니까 제발! 제발!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 줘.”
무언가 엄청난 짓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을 한 유성원이 다급히 말리자 그의 의도를 읽은 듯 유청은 아쉬워하며 이번에는 물러나기로 한다.
“흐음,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또한 제가 이곳의 세태에 대해 아직 자세히 모르기도 하니 나중에 진행하도록 하지요.”
“앞으로 뭐 할 때는 우리 꼭 이야기하고 하자. 응? 아무튼 너희도 일단 기사단의 성소에서 머물면 되고,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사다 줄게.”
“그러면 술을 부탁드립니다. 다시금 천검군의 깃발이 세워진 것을 기념하여 진석 대장님과 한잔하고 싶습니다.”
둘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 아니었기에 유성원은 곧바로 직접 소주, 양주, 맥주를 비롯한 안줏거리까지 잔뜩 사서 안겨 준다.
그것을 받은 둘은 유성원에게 깔끔히 예를 갖추고 성소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소환된 기사들에겐 알아서 스킬 정보들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한숨 놓겠네요. 후아아아~ 정신없었어요. 진짜 2명 추가된 건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건지.”
“S급 기사 둘을 얻었으니 그 정도는 감내해야죠.”
“예? 설마 아까 걔네 둘도 S급인가요?”
“예. 축하드려요. 이걸로 6명이나 되는 S급 기사들을 보유하시게 되었네요. 이제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나라와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SS급 하나에 S급 6명. 마음만 먹는다면 웬만한 나라와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물론 여러 제반 사항과 외교적 술수를 고려해야만 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여러 파장을 불러올 전력인 건 확실했다.
“물론 그럴 순 있어도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아무튼 이제 진짜로 안주할 수 있겠네요.”
헌터 일을 해야 한다는 제반 조건이 있지만, 그래도 먼저 걸어 둔 조건이 만만치 않았기에 자신들을 고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1조라는 돈이 어디 어린아이 이름도 아니고, 그걸 쓸 돈이면 차라리 다른 S급들을 고용하는 게 나을 것이다.
“아직 긴장 풀 때는 아니죠. 가서 떨지 않기 위해서 예행연습과 혹시나 있을 질문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죠.”
“아, 예.”
그녀의 말대로 아직 완전히 방심해서는 안 되기에 유성원은 곧바로 신소미의 말대로 내일을 위한 준비를 마저 해 나가기 시작했다.
***
다음 날, 협회 본부.
이른 아침부터 대한민국 헌터 협회 본부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제 오후에 소식이 뜨자마자 수많은 방송사는 물론 길드의 첩보원들은 기본이고, 정체를 감추었지만 알 사람은 다 알 만한 주변국 정보기관 사람들을 포함해서 신강남 사태 피해자들까지 대거 몰려와서 자신들의 재산에 큰 손해를 입히고 스캐빈저들과의 전쟁을 일으켜 신강남을 몰락시킨 주역인 황금 마인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협회장님! 그럼 이대로 황금 마인 기사에게 법적, 행정적 처분을 묻지 않고 그냥 헌터 활동을 하게 하실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 황금 마인 기사는 본인 자체만으로도 SS급, 거기에 대동하고 있는 이 네 기사들은 각자 S급 전력인데, 대한민국의 운명을 걸고 그럼 전쟁이라도 벌일까요? 오히려 그가 손을 내밀어서 ‘협회’와 협약을 맺어 준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입니다.”
“하나 통제할 방법 없이 ‘협약’만 맺는 게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요?”
“일단 서로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에 그 부분에 있어선 ‘거래’를 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겁니다. 우리는 질서와 안전을 보장받고, 황금 마인 기사는 분쟁 없이 던전을 돌 생각으로 보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협회 본부 입구에서는 벌써 협회와 정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기자 회견이 한창이었다.
황금 마인 기사와의 협약이 너무나 신속하게 이루어진 바람에 국민에게 알릴 시간이 없어서 그가 오는 것을 기회 삼아 한 번에 설명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협회장은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힘겹게 질문에 응하는 중이었다.
“그럼 차후 신강남 사태 피해자들과 황금 마인 기사 사이에 있을 분쟁이라든가, 서울 길드와 황금 마인 기사의 분쟁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하실 겁니까?”
“그 문제는 가능한 한 분쟁 없이 상호 합의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당초에 해당 분쟁의 시작은 신강남의 후원자 중 한 명인 정 회장의 추악한 범죄 행위의 여파로 일어난 것인 만큼 이 사안에 대해서는 쌍방이 모두 잘못이 있으니…….”
“그것을 고통받고 있는 신강남 사태의 피해자들이 납득할 것 같습니까?”
“즉, 결국 SS급 헌터를 위해서 일반 시민의 의견을 묵살하겠다는 거군요.”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화살은 이제 같이 참여한 정부 인사에게까지 돌아가서 기자 회견장은 난장판이었다.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서 참여한 인사들 모두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기자들의 질문이 거셌지만, 곧 있으면 황금 마인 기사가 나타나기에 그때까지 참자는 심정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려고 했다.
“그 사안에 대해서는… 그… 상세한 자료 조사가 다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저기, 오늘은 황금 마인 기사에 관련된 질문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른 문제에 대한 질문은 부적절하며…….”
“차후 대통령님을 비롯한 실무자들과 회담을…….”
역시 정치인과 정부 인사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덕인지 능숙하게 말을 돌리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기자들은 언제나 그렇듯 확실한 답변을 주지 않는 그들을 향해 계속해서 기삿거리를 얻기 위해 질문을 변용시켜 가며 던졌고, 협회와 정부 인사들은 철저히 방어하는 이것 또한 다른 형태의 전쟁이었다.
“그럼 다음 질… 자, 잠깐! 용이! 여, 여러분, 드디어 황금 마인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푸른 하늘에 반사되는 빛과 함께 등장한 황금의 용. 그 등엔 화려한 황금 갑주로 무장한 황금 마인 기사가 타고 있었다.
모든 시선과 카메라가 그에게 집중이 되었고,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서서히 내려오자 다들 깔리지 않게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기 시작한다.
“어우… 이건 너무 많은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카메라가 집중이 되자 유성원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물론 전장에서 주목받기도 했었지만 그거는 그래도 싸움이 주여서 신경을 덜 쓴 것이었고, 지금은 이 행사 자체가 목적이어서 긴장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아~ 참고로 행사엔 추가 요금이 붙는단다.]
“음? 저기, 그냥 태워 준 건데 추가 요금이 왜 붙어요?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은 거래 내용이던데?”
[긴장 풀라는 뜻에서 한 농담이란다. 그 시선이 얼마나 많든 어차피 모두 네 아래라고 생각하면 편하니라.]
“…하핫, 감사합니다. 읏챠! 그럼 가 볼게요!”
엘드라엔의 조언 덕에 조금은 긴장을 풀게 된 유성원은 기합을 넣고서 그녀에게서 내려와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눈빛에서 수많은 악의와 증오, 분노, 탐욕 등등…….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가득 담아 자신을 보는 게 느껴진다.
가능하면 이 지옥 같은 인간의 도가니를 피하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평화를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헤쳐 나가야 하는 늪이었기에 유성원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