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어떤 의미에선 마인(魔人)보다 골 아프군요.”
“그냥 마인(魔人)으로 놔두는 게 어떨는지요? 받아들이려 해 봤자 서울 길드의 입장이 안 좋을 텐데요?”
“그럼 SS급을 버리실 겁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정보가 세계로 퍼지고 있을 건데? 만약 저러다가 다른 국가 헌터로 넘어가 버리면?”
“아니, 안 넘어가도 저대로 반쯤 스캐빈저 같은 처지로 있는 것만 해도 불안해 미칠 지경인데… 어떻게 해서든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하지 않나?”
대한민국 정부로서는 저런 대형 길드급 화력이 통제받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어떤 대우를 해 주든 간에 한국 사회 쪽으로 편입하고 싶은 게 솔직한 그들의 심정이었다.
“웃기지 마십시오. 아직 신강남 사태의 상처도 아물지 않은 마당에 저 자식을 끌어들인다니, 말이 되는 소립니까?”
“SS급이면 솔직히 그쪽이 더 가치가 높지. 서울 길드와 신강남에서 싸웠는데 이겼으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고천수 길드장!”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놈에게 패배했으면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라, 오경훈. 차라리 너희가 그놈 밑으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것 같군. 어떤가?”
“그러면 아드님이 백야 길드에 껄떡대다 죽은 것도 운명이라는 거군요.”
“말 다 했나?”
3대 길드 중 두 길드 사이에 날이 선 비방이 오고 가는 가운데 올림푸스 쪽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아무래도 세계구로 움직이는 그들은 한국 정세와 약간 거리가 있기 때문에 살짝 물러나서 어떻게 하면 그를 길드에 끌어들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으리라.
‘참~ 한결같군. 이 세상은 결국 답이 없는 건가?’
그리고 그것을 보며 한숨이 절로 나오는 백가연이었다.
결국 유성원의 존재와 그가 등장한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SS급 헌터를 어떻게 구슬릴 건지, 그리고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만 생각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후우~ 정말 한심하구먼.’
길드장급인 두 놈 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책임지는 대한민국의 안전과 관련된 길드의 수장임에도 큰 그림에 대해선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앞으로도 유성원과 같은 ‘기적’이 나올 수 있음을 생각하고 국가와 사회 운영에 좀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에휴~ 이러니 저런 친구가 잠적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아무튼 지지리 고생이나 해라, 이놈들아~’
“그자는 그렇고, 백야 길드는 어떻게 하죠? 놈을 숨겨 준 것은 분명한 불법 행위인데 말입니다.”
“보아하니 신소미 길드장과 딸인 신아영만 관련된 것 같고, 나머지 길드원들도 몰랐다고 하던데 그게 길드 전체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
“길드장이 관련되면 길드 전체의 일이나 마찬가지죠. 엄연히 사도인데…….”
그러나 실질적으로 손댔다가 오늘 청룡 길드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봤을 때 괜히 SS급 헌터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었다.
지금 정부나 협회는 유성원을 어떻게든 잘 달래서 한국 헌터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3대 길드에서 단독 정점으로 올라선 청룡을 견제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둘째 치고 그냥 국가 안전에 대한 신뢰도 및 여러 수치가 오를뿐더러 한국 내에 있는 스캐빈저들이 더 큰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댁들은 김칫국 너무 마시지 말게나. 그놈이 무슨 만화에 나올 법한 10대, 20대 애송이도 아니고, 단순한 방법으로 설득이 되면 나도 고생 안 했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방금까지 한 말 못 들었나? 어휴~”
이쪽도 전혀 이해를 못한 건 마찬가지라 한숨이 절로 나오는 백가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으리라.
즉, 그를 설득하려면 희망이 있어 보이는 세상으로 고쳐야 하는 건데, 그 과정은 매우 험난하고 거친 길이며 결국 도달한들 알아주는 사람도 적기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뭐, 이제 시작이니 조급해할 필요 없지.’
유성원은 아직 45레벨. 더 올라갈 레벨도 많고 더욱 강해질 가능성도 높았다.
성좌 없이 인류 최초의 SSS급, 즉 트리플 S급에 도달하기만 해도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느긋한 시선으로 그들이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기로 한다.
***
다음 날.
금강산 언더시티.
과거 북한 정부가 ‘금강산 국제 관광 특별부’라는 이름으로 개발해 둔 덕에 건축물과 시설이 있어 언더시티로 애용되는 곳이다.
물론 맞대고 있는 강원도 지역이 그다지 실속 없는 곳이라서 이곳에 거주하는 스캐빈저들은 도살왕 세력과 거래하거나 주변 몬스터를 잡기도 하고 진짜로 농업에 종사하기도 한다.
혹은 러시아, 일본 간 스캐빈저들의 거래를 위해 중개 무역지로서 역할을 하곤 했다.
“…생각보다 살벌한 풍경이 아니네요.”
언더시티라는 곳에 처음 와 본 유성원은 생각보다 일반 도시처럼 멀쩡하게 굴러가는 모습에 조금 놀라웠다.
그의 상상으로는 언더시티라는 곳은 거의 북두의 권에 나올 법한 무법지대였는데, 그냥 재개발이 되지 않아 노후화된 일반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현재 그는 서울에서 한바탕 한 이후 신소미 길드장을 데리고 대피해 있는 상태였는데, 물자 보충을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지배자와 환경의 차이죠. ‘개성’, ‘남포’ 같은 경우 인구가 많은 수도권과 가까워서 돈도 되고 범죄도 저지를 만하지만, 여기는 또 사정이 달라서 오히려 공생하는 스캐빈저 도시지만 좀 더 중립적인 곳이에요.”
“그럼 개성이나 남포는 어떤데요?”
“…인간 사육사 이 목사가 지배하는 곳이니까 말 다 했죠?”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얼마나 끔찍할지 감이 오는 유성원이었다.
‘인간 목장’이라는 걸 운영하는 작자이며, 같은 스캐빈저들도 끔찍하게 생각한다고 하는 이 목사 세력인 만큼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일반 도시만큼 안전한 건 아니었다.
“이야, 못 보던 놈이 여자까지 끼고 있네?”
“여기 금강산 쪽이 좀 만만해 보였나?”
“여기도 엄연히 스캐빈저 소굴인데 말이야. 낄낄.”
“…음, 그러게 말이에요. 이렇게 미녀를 데리고 있는데 스캐빈저 소굴에서 댁들 같은 인간이 안 나타나는 건 말이 안 되겠죠.”
그래, 아무리 일반 도시 같아도 결국 스캐빈저들의 도시다.
치안이 제대로 되어 있을 리가 없는데, 딱 봐도 낯선 남성과 여성 2인조로 된 그룹을 노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역으로 유성원은 반갑다는 듯 미소를 지었고, 다가온 스캐빈저들도 실실 웃으면서 늘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한 작업용 멘트를 내뱉는다.
“뭐야, 알 만한 놈이라는 건가? 그러면 당장 그 계…….”
“야! 자, 잠깐만, 이 양반! 그거잖아! SS급 화, 황금 마인 기사! 병신아! 이거! 이거 보라고!”
“…어? 히이이익!”
유성원의 얼굴을 자세히 본 한 스캐빈저가 깜짝 놀라더니 작업 치려던 스캐빈저에게 공개 수배된 그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미 청룡 길드와 한판 붙고 온 시점에서 그의 신상은 세계로 까발려졌기에 누구라도 SS급 황금 마인 기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희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망가자!”
“조, 좋은 데이트 되십시오!”
이상한 쇼라도 하는 듯 그들은 즉시 허리를 90도로 꺾으면서 사죄한 다음 잽싸게 도망쳐 버린다.
대한민국에 둘 밖에 없는 SS급 마인을 건드리려 했으니 오늘 목숨 10개는 신에게 빚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황당한 쇼를 본 유성원과 신소미는 찝찝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참~ 개인 정보 보호라는 게 없는 세상이네요.”
“어쩐지 여기 사람들이 알아서 친절하게 대해 주더라구요. 바가지도 안 씌우고~”
“아영이가 봤으면 참 재미있어 했을 거예요.”
현재 이곳엔 신소미와 유성원만 온 상태였다. 신아영과는 합류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연락을 해 두긴 했지만 만날 수가 없었기에 일단 그녀는 백가연 어르신에게 부탁하고 지금 여기엔 둘만 왔다.
꽤 장기간 숨어 있어야 해서 식료품과 물자를 보충해야 했고, 지금 이 사태로 검색과 신원 확인이 엄격한 도시로 들어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언더시티로 온 것이었다.
“여기가 이 정도이니 이거 금방 진정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진정될 리가 없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게 SS급인데… 그 정체가 알려졌으니~”
“뭐, 그거야 당연하지만 그보다 소미 길드장님은 어쩌죠? 백야 길드도 완전 저랑 한패 된 느낌이라. 이거 돌아갈 수 있겠어요?”
“안 되면 책임져 달라고 해야죠. 후훗.”
그러면서 능글맞게 손가락으로 유성원을 가리키는 신소미였다.
그것은 꽤 귀여운 행동으로, 길드 업무에서 해방된 그녀는 평소의 굳은 표정을 짓지 않고 한 단계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나이답지 않게 소녀 같아서 유성원은 마음이 떨렸다.
‘…반대로 생각하면 길드장 자리가 그만큼 헬이라는 거지?’
“왜요?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이럴 때 보면 아영이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 것 같아서요. 아무튼 책임은 질게요. 당연히 져야죠. 청룡 길드랑 맞다이 깐 시점에서 결국 그게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죠.”
“사실은 올 거라는 믿음은 있었어요. 당신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다만 그렇게 막무가내로 올 줄은 몰랐네요. 배 회장 때는 끌려가서 갇혀 있을 정도로 신중했었잖아요.”
“그거야 내 상처라든가, 아픔은 나만 감내하면 그만이지만, 남의 건 그렇게 안 되잖아요. 안 좋은 기억은 평생 남으니까요. 아무튼 그동안 충분히 신뢰를 주셨으니 나도 되갚아 드린 겁니다.”
자기가 말하면서도 살짝 부끄러운 듯 유성원은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인생에서 남녀 관계라고는 겪어 본 적 없기에 그는 거리감을 잘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신뢰’랍시고 변명을 하면서 얼른 이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아~ 생각하기 싫지만 결국 생각해야 할 수밖에 없네요.”
“으음~ 대강 서울 길드는 결사반대할 거고, 신강남 유지들과 함께 손해 배상을 청구하려 들겠죠. 하지만 배 회장 문제가 있어서 만만치가 않은데, 결국엔 사법부에 맡겨야 하는데… 누굴 지지해도 지옥이라, 판사들도 위장이 뚫릴걸요?”
“대충 봤을 때 배 회장이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음으로 때우면서 손해 배상 때릴 것 같은데…….”
“그러면 SS급 헌터가 물 건너가잖아요. 아무튼 곧 당신은 결국 선택해야 할 거예요.”
유성원 앞에 놓인 선택.
협회냐? 길드냐? 아니면 이대로 스캐빈저처럼 살면서 도망이냐?
무엇을 하든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기에 고민이 되고 스트레스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피하기 위해서 그동안 그렇게 발악했는데……. 결국 실패하니 허망할 따름이었지만, 그래도 유성원은 나름 생각해 온 게 있는 건지 신소미에게 입을 연다.
“결국 뭐든 간에 제 목적은 하나입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받지 않고, 또 강요받지 않는 거죠. 모든 것을 내 선택대로~ 그러기 위해선 어느 쪽과 손을 잡든 간에 더 강해져야 하는 것뿐이죠.”
“그럼 결국 레벨 업이네요.”
“아뇨. 레벨 업뿐만이 아니에요. 청룡 길드랑 싸워 보고 느꼈어요. 소수의 강함만으로 싸우기 힘든 것도 있다는걸요. 결국 조직과 싸우려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이에요.”
“조직? 그럼?”
길드라도 설립하려는 걸까? 비장미 넘치는 유성원의 표정을 본 그녀는 긴장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어쩌면 지금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전환점을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SS급 헌터가 만드는 새로운 길드. 아마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래서 기사 뽑기를 더 많이 하려고요. 지금 남아 있는 보상 포인트 모두! 기사 뽑기 할 겁니다.”
늘 그렇듯 스케일이 작은 남자의 인식은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뭔가 대단한 듯 이야기했지만, 결국 기사들을 추가로 더 얻어서 일군(一軍)을 만들겠다는 게 전부였다.
신소미 길드장은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기사 뽑기요? 그 기사들을… 뽑는다고요?”
물론 그런 와중에도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소리에 반응해 질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