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백야 길드.
마저 일을 하러 온 신소미 길드장은 신전 같은 자신의 길드 건물 앞에 놓인 트레일러 2대의 존재에 깜짝 놀랐다.
자신의 길드와는 절대 인연이 없을 과거 3대 길드인 청룡과 올림푸스의 트레일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아~ 우선은…….”
절대로 좋은 목적으로 찾아올 리 없기 때문에 신소미 길드장은 잽싸게 사진을 찍어서 유성원에게 보냈다.
세세한 내용을 적어 보내기엔 이미 길드 주변에 첩자가 깔려 있을지 모르기에 사진만 빠르게 찍어 전송한 것이었다.
“어쩌면 올 것이 온 걸지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일로 올 이유가 없는 자들이다.
올림푸스면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으로 길드 간 협력이나 A급 헌터인 자신을 빌리러 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들의 문제가 낀 청룡이 자신들에게 먼저 다가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렀으면 불렀지, 저렇게 사람들이 직접 올 리가 없지. 후우~’
그렇다면 자연히 유성원, 황금 마인 기사에 대한 문제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가 B급 던전 내에 있을 때 백가연 어르신과 점검해 본 결과 여기저기 틈이 있었고, 그중에서 티탄의 말뚝은 특히나 전수 조사 뒤에 CCTV들만 체크해도 행적이 확인되기에 그나마 쉬운 편이었다.
‘물론 영상 보관 기간을 생각하면 지워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헤파이스토스 성좌의 무기를 취급하는 가게라면 길게 잡을 확률도 높으니… 아무튼 긴장하지 말고 해야겠어요.’
“아, 길드장님 오셨군요. 던전 공략은 성공하셨습니까?”
“예. 그런데 손님이 온 모양이군요. 청룡과 올림푸스 차량이 있던데 누가, 그리고 무슨 용무로 왔다고 했죠?”
“그게… 꼭 길드장님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고천수 길드장에 레가스 A급 헌터님까지 오셔서 도저히 저희로서는 더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S급과 A급 헌터까지 납셨다면 더 볼 필요도 없이 무조건 황금 마인 기사 건이었다.
더 물어볼 필요가 없어진 그녀는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 낼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몸단장하고 나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그럴 필요 없네.”
방금 막 던전에 다녀왔으니 잠시 몸 정리를 한다는 핑계를 대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사전에 알아챈 듯했다.
이미 고천수 길드장과 레가스 헌터가 그녀를 맞이하러 나온 것이었다.
“서로 바쁜 처지이고, 오래 얼굴 보고 싶지 않을 테니 잠깐만 이야기하도록 하지. 아니면 뭔가 감춰야 할 것이라도 있는 겐가?”
“아뇨. 그럴 리가요. 그저 시궁창 같은 던전에 다녀와서 냄새라도 날까 봐 그런 겁니다. 고천수 길드장님, 그럼 VIP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평소 같으면 일반 응접실이었겠지만 이번엔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만들어 두고 관리만 해 온 VIP용 응접실에 둘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까지 알고, 또 어디까지 유성원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는지 알기 위해서 먼저 말을 꺼낸다.
“그래서, 이 별 볼 일 없는 길드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자네 길드의 E+급 헌터인 유성원이라는 친구, 어디에 있나?”
“그 사람이라면 저번 신강남 사태 이후 무섭다면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학원장인 백가연 어르신에게 거두어졌습니다.”
“…뭐라고?”
고천수와 레가스는 갑자기 나온 백가연이라는 이름에 흠칫 놀란다.
지금은 아카데미아 학원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들 세대 때는 현역으로 뛰던 모습을 보았기에 전설적인 헌터로 알고 있었다.
황금 마인 기사 후보로 생각되던 놈이 갑자기 그 전설의 헌터와 관련성이 생기니 그들에게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아마 이걸 노리고 그분과 협력하기로 한 거겠죠.’
“이건 꽤 놀랍군. 설마 그쪽과 관련된 인물일 줄이야. 아니지, 그러니까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건가?”
“최근 이쪽에 새로운 성좌의 강림 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역시 기존 인물이 와서 도움을 준 거네요.”
고천수와 레가스는 백가연이라는 인물과의 연관성을 넣어서 유성원에 대한 정보를 수정했다.
하나 그것은 엄연히 거짓 정보. 유성원은 그 어느 성좌나 조직의 인맥 같은 것도 없는, 순수 맨땅에서 나온 다크호스였다.
그 존재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백가연 어르신과 이야기할 때 이미 이런 점도 고려해서 서로 합의한 것이었다.
“좋아. 그러면 하나만 묻지. 그 유성원이라는 친구가 황금 마인 기사 맞나?”
“예, 맞습니다.”
“그래? 음, 부정할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인정하는군.”
“부정하고 싶어도 이미 두 분은 상당한 자료를 준비해 오셨을 거라고 봅니다만? 그 정도 확신 없이 청룡 길드의 장과 올림푸스 길드의 에이스가 이런 길드에 올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신소미 길드장이 순순히 유성원의 정체에 대해 긍정한 이유는 이랬다.
계속 부정하려고 해 봤자 그들은 이미 확신에 가까울 만큼의 자료와 증거를 가지고 온 게 분명했기에 괜한 공방을 해서 감정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음, 그러면 그쪽은 그놈과 어떤 관계지?”
“일단 은혜를 입었기도 하고, 장물 처리 및 길드와 헌터에 대한 정보를 주던 관계였습니다. 그는 협회라든가, 길드에 소속되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그것은 놈의 움직임만 봐도 알지. 한데 놈은 스캐빈저 지망이었던 건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따르는 성좌가 있는 거냐?”
“그런 자세한 것까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 협력 관계를 맺은 거라서 말이죠. 그 외에는 모릅니다.”
사실 유성원에 대해 자세히 알지만 때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진실보다는 이해 가능한 거짓을 말하는 게 좋은 경우가 있었다.
‘SS급 능력치과 스킬, 뛰어난 무구, 강력한 소환수를 겸비해 놓고 원한다는 게 그냥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짱박혀 사는 거라고 하는 인간입니다.’
라고 정직하게 말해 봐야 현재 한국 헌터계의 정점에 있는 이들에겐 미친 소리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
“으음… 좋아. 순순히 말해 줘서 고맙네, 길드장. 그러나 제1차 신강남 사태의 주범인 놈을 도운 죄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지.”
“우와아. 고천수 길드장님, 너무하시네요. 순순히 진술해 준 분에게 너무 가혹하시네. 그 사태 덕분에 아주 손쉽게 서울 길드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정점에 가셨으면서. 하하핫!”
‘…역시 그냥 확인만 하고 갈 사람들이 아니지.’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트레일러까지 끌고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청룡 길드장의 말은 사실상 대놓고 하는 협박으로, 죗값을 받을 처지가 된 백야 길드를 잡아먹으러 온 것이었다.
“참고로 거기 후원자 가문들과 서울 길드 인간들은 제2차 신강남 사태보다도 제1차 신강남 사태를 더 증오하고 있지. 악(惡) 성향 성좌 산거정이야 장벽이 세워지기 전부터 싸워 오던 숙적이고, 법적 공방을 할 수도 없는 상대이니까 말이야. 반면 여기는 다르지.”
“후우~”
백야 길드는 실제로 협회 산하에 있는 길드라서 충분히 소송이 가능했다.
제1차 신강남 사태 때만으로 한정 지어도 장벽이 붕괴해서 수천억 단위의 피해가 일어난 만큼 후원자 가문들의 소송 러시가 들어오면 중소 길드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게 되며 파산하려고 해도 스캐빈저들을 통해 그녀를 노릴 것이다.
“애초에 황금 마인 기사를 노리시던 게 아니었는지요?”
“겸사겸사 더 큰 이익도 노리는 거지. 잠재적 S급에 A급 하나. 이런 작은 길드에 있긴 또 아까운 인재들 아닌가?”
“일단 본인들의 의사부터 확인하는 게 어떤지요?”
“원래 이 바닥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헌터를 모으는 게 최우선이라는 거 모르나? 성좌님들 덕분에 계약이 확실해진 덕분이지.”
성좌의 맹세는 좋은 의미로는 확실한 믿음의 상징이었지만, 반대로 나쁜 의미로는 저항할 수 없는 구속 같은 것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자기들 쪽으로 데려와서 충성심이 어떻고 간에 성좌에 대한 맹세만 완료시키면 확실히 믿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 때문에 비위 맞추거나 할 거 없이 지금 이런 수단까지 동원해 가며 압박을 넣는 것이다.
“자~ 여기 아가씨, 이런 데 가지 마시고 저희 올림푸스는 어떠십니까? 어차피 청룡에 들어간다고 해도 원한 산 것 때문에 한국에 있기 번거로울 테니까 그냥 탈조선하는 게 가장 속 편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핫.”
비교적 가볍고 고운 말투였지만 청룡 길드가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게 전반이 깔린 말이었다.
하나 신소미 길드장은 이런 압력에도 두려워하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이 정도 협박과 압력에 굴할 정도로 배짱이 없으면 성좌의 사도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잘됐네요. 이 부담스럽기 만한 길드장 자리도 버릴 수 있고, 간만의 모험도 나쁘지 않겠는걸요?”
“허어, 배짱 하나는 좋구만. 그러면 교섭은 결렬이군. 그렇다면 이제 다음 방안으로 넘어가야겠구만. 황금 마인 기사의 협력자에 대한 임시 체포를 실행하는 수밖에…….”
결국 협박이 먹히지 않자 강제로 무력 제압하겠다는 의미였다.
대한민국을 책임지는 최고 길드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법과 상식을 무시한 양아치 같은 짓거리였지만, 각성자가 있기 전에도 세상은 법과 질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들이 즐비했던 곳이었다.
“결국 비열하게 나오시는군요.”
“합리적이라고 해 주게.”
이제 사실상 대한민국 최강 길드인 청룡을 막거나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
게다가 황금 마인 기사라는 좋은 명분까지 있으니 체포한다는 구실로 잡아가면 그만이다.
“아~ 이렇게 되면 결국 나눠 먹기가 되겠네요. 저희는 A급이면 충분합니다요. 딸내미는 아마 저 아줌마로 낚으면 되겠죠?”
“그렇겠지. 미리 사람들을 보내 놔야겠군.”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심지어 올림푸스와도 미리 합의가 된 게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 신소미였다.
지금 눈앞의 S급 헌터 고천수와 A급 헌터 레가스는 직접 전투 계열 헌터.
캐스터이자 던전 보조로 A급 헌터를 딴 그녀로서는 상성 최악의 상대였다.
상대하는 건 당연히 꿈도 못 꾸고 도망치는 것도 무리인 상황.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저 두 사람은 자신의 의식을 단숨에 끊어 버리고 제압할 것이다.
‘그냥 거짓으로라도 승낙한다고 했어야 했나? 아니, 그러면 분명 성좌에 대한 맹세를 시켰을 거야. 이제 어쩌지?’
식은땀이 목 뒤로 흘러내리는 상황.
고천수와 레가스는 다 잡은 쥐처럼 그녀를 바라보면서 살짝 즐기고 있는 듯했다.
물론 단순히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대치하는 걸로 끝까지 기선 제압을 해 두고 그녀의 진을 빼서 저항심을 약하게 만드는 것도 목적 중 하나였다.
그렇게 무형의 압박을 받아 내면서 최대한 저항하는 신소미였지만, 탈출구 없는 상자에 끼이면 결국 짓눌리게 될 뿐이다.
‘하다못해 아영이에게 연락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하나 마법은 물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할 만큼 수세에 몰려 있는 상황.
서서히 거세지는 투기의 압박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그녀였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성좌인 균형자에게 비는 것뿐이었지만 그는 지금 대답이 없었다.
‘…이제… 틀렸… 나?’
[젠장! 이렇게 나서는 거 내 체질이 아닌데!]
‘저건… 아…….’
쾅!
폭력 같은 무형의 압박을 견디기 힘겨워 의식을 유지하기 힘들어질 때쯤, 흐릿한 시야 속에 익숙한 황금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신은 없지만 구원은 존재한다는 걸 믿으며 그대로 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