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카데미아, 천(天) 클래스 교실.
얼마 뒤 종식된 듯한 제2차 신강남 사태는 대한민국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우선 신강남 장벽 포기 소식이었는데, 서울 길드가 신강남 내부의 피해를 저지하지 못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게 되어서 신강남의 후원자들이 결국 분열해 버렸다.
“야, 학생회장, 결국 자진 사퇴 결정했대!”
“와, 그 징하게 버티던 놈이 결국 물러났군.”
“3대 길드에서 나가리 됐으면 이제 주제를 알아야지.”
‘흥망성쇠 모두 한순간이구나…….’
그리고 신아영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냉혹한 일들을 구경하면서 사람의 인생과 사회의 변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는 중이었다.
예전에 청룡 길드의 후계자가 죽었을 때 한껏 치고 올라온 서울 길드. 그러나 이번 신강남 사태를 두 번 겪고 난 다음에는 이제 고개 숙이던 중소 길드 후계자들에게 얻어터지는 신세가 됐으며, 중소 길드들은 서울 길드와 계약하기로 했던 인원을 대놓고 빼 가는 중이었다.
“서울 길드, 진짜 븅신들이었네. 어떻게 자기 집을 못 막음? 황금 마인 기사는 뭐 SS급이라 그렇다 치는데, 그다음이 진짜 븅신 짓거리네.”
“걔네 막 서울만 지킨답시고 꽁 처박혀 있을 때부터 알아봤다. 실전을 등한시하고 쉬운 던전으로 돈만 벌면서 토벌 동원 생까면서 가오는 엄청 잡더니~ 키키킥.”
“야, 우성아, 결국 신강남 새끼들 똥꼬닦이 할 거냐?”
“미쳤니? 당연히 계약 파기했지. 위약금 어쩌고 난리 치는 거 그냥 법정 공방 끝까지 가자고 했어. 제대로 대우해 주면서 찾는 곳도 많은데 그 미친 동네를 왜 들어가냐? 또 까짓것 배상금 내라고 하면 협회에 중재 요청하고, 정 안 되면 지방 쪽 내려가서 스캐빈저 하는 거지.”
기존의 순혈 신강남 층에게 차별받아 왔음에도 서울 길드라는 브랜드 파워와 후원자 그룹의 힘으로 그동안 권세가 유지돼 왔는데, 이제는 서울 길드의 브랜드 파워도 떨어지고, 후원자들도 1차는 버텨 냈지만 2차 사태로 인해 장벽을 포기하면서 모두 자기 살길을 찾으러 흩어졌다.
결국 아카데미아 내에서 계약한 인재들과 기존의 서울 길드의 중간과 하부를 받치던 인재들까지 대규모로 사라지면서 서울 길드는 자연스럽게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럼 오경훈은 어떻게 되는 거냐?”
“어떻게 되긴? 그래도 S급이라서 어디 들어간다고 하면 받아 주긴 할 거야. 하지만 그 자존심 센 성격을 받아 줄 데가 과연 있을까? 청룡 들어갔다가는 ‘투쟁’ 당할 거고, 올림푸스 들어가면 대기업 들어간 중소기업 과장 꼴이지.”
“너 비유 되게 잘한다? 무슨 아저씨 같아.”
“아저씨들 하는 소리 듣다 보니 그런 거지.”
다들 고등학생 이상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애늙은이 같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이미 그들은 길드 업무를 통해 실질적으로 헌터 일에 대해 배우고 있고, 현역 헌터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든 것이리라.
“그나저나 아영이 쟤는 어디서 뭘 했기에 B급 죽돌이던 애가 A+급 스탯이 됐냐? 레벨 업도 안 했다며?”
“전설 등급 스킬 북 하나 제대로 얻었다는데……. 진짜 개부럽네. 전설급 스킬 북……. 하! 수백억도 넘는 걸 어디서 구했을까?”
“모르지.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제 쟤는 준S급 헌터 취급이라는 거지. 11번째 S급 후보니까 다들 난리 나겠네.”
원래라면 정체를 최대한 감추려고 했겠지만, 어디 길바닥의 돌 같은 취급을 받는 스태프인 유성원과 다르게 그녀는 기본적으로 천(天) 클래스 학생.
정기 검진은 물론이고 같은 중견 길드에서도 견제를 위해 상시 정보 파악을 하려 하기 때문에 무의미한 짓이었다.
“아영, 전에 한 제안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저는 그냥 어머니랑 같이 한국에서 활동할 거라니까요.”
“잘 생각해 보게. 장래 S급이 될 자네는 이런 작은 물이 아니라 큰물에서…….”
“그 작은 물에 SS급 마인이 둘씩이나 사는데요? 그러면 올림푸스 길드가 둘 중 하나라도 토벌하면 들어갈게요.”
청룡 길드는 후계자가 추근거리다가 죽은 경험 때문에 재수 옴 붙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서울 길드는 무너지는 길드 내부를 추스르기에도 바빴기에 그녀를 영입하려는 건 오직 올림푸스뿐이었다.
하지만 이쪽도 상당히 질척대는 것이 S급 헌터를 갖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아~ 외국에서 메일까지 오네. 아니, 아직 승급 시험도 못 치렀는데 이게 뭐야~ 아저씨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아저씨라니, 누구지?”
“어? 아! 그, 그냥 길드 아저씨! 우리 길드에 새로 영입한 C급 탱커 아저씨 있는데~”
그녀의 혼잣말을 듣고 말을 건 천(天) 클래스 학생의 물음에 신아영은 황급히 둘러댄다.
행여나 스태프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질 경우 단서가 될지도 모르기에 재빨리 화제를 돌린 것이다.
그녀는 빨리 수업을 끝내고 유성원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
헌터 협회장 사무실.
새롭게 재편되는 길드들의 질서 속에서 협회는 오늘도 이곳저곳 중재하느라 바쁜 상황이었다.
최근 몇 달간 감당할 수 없는 레벨의 사건이 자주 터지다 보니 협회장 황수환은 얼굴이 반쪽이 된 상태였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먼.”
“…예. 많이 힘듭니다, 학원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은~ 자네 짐 덜어 주러 왔네. 학원 쪽 말인데, 나 학원장 그만두려고 하네. 알다시피 결국 이 목사에게 잡혀간 사람들 구출하는 건 무리 같거든.”
“엑? 그건 또 무슨 소리이십니까?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가뜩이나 인간 새끼가 없는 이 업계에서! 한 줄기 희망이 학원장님인데! 학원장니이이임!”
“그래도 어쩔 수가 없네. 당장 이 목사 쪽으로 구출 작전도 불가능하고, 이미 잡혀간 인원들은 약물과 마법으로 정신도 멀쩡할 거라 보이지 않네. 그 상태에서 구해 봐야 2차 피해만 늘어날 뿐이지. 아무튼 책임은 져야 하니 내가 물러날 수밖에……. 아마 소송도 몇 개인가 할 게야. 뭐, 재판정으로 가도 문제는 없겠지만 말이지.”
이 목사의 군세가 내려오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아카데미아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었다곤 해도 헌터라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 소송으로 들어가도 큰 책임은 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거기에 말려들어 죽었고, 구출 작전도 시도 못하는 만큼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내려오려는 것이리라.
“그럼 물러나시면 뭘 하실 겁니까?”
“뭘 하긴. 그냥 제자나 후계자를 키우면서 길드 일을 해야겠지.”
“오? 후계자 말입니까? 눈에 찰 만한 인재는 죄다 성좌들이 채 갔다면서 안 하신다더니~”
“겨우겨우 한 놈 구했네. 좀 많이 다듬어야겠지만, 이런 마당이니 감지덕지이지. 다만 등급이 너무 낮아서 고생길이 훤하네. 이런 놈일세.”
백가연은 유성원의 사진을 건네주면서 슬쩍 소개를 한다.
그를 감춰져 있던 각성자였다고 소개하면서 성좌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놈이고, 성격에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키워 봄 직하다고 하면서 어디 가서 죽지 않을 정도까지는 키워 놓고 후대의 후대를 바란다는 이야기였다.
“과연, 이 친구인가요? 그런데 E+급이면 너무 낮은 거 아닙니까? 적어도 C급은 되어야…….”
“가진 스테이터스보다는 그 안의 자질을 살피라는 게 우리 스승님의 말씀이었네. 나중에 키워 줄 수 있는 걸 먼저 따져서는 마치 신입 사원에게 업계 경력 30년을 요구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으음~ 그래도 토대가 너무 안 좋긴 한데… 뭐, 어르신의…….”
협회장은 의아했지만, 그래도 그랜드마스터의 마지막 제자인 그녀의 안목이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백가연은 계속해서 유성원을 택한 이유에 대해 보충해 나간다.
“그래, 좀 모자란 친구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뭐 100년 넘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백가연 어르신이라면 충분히 사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그럼 이 친구는 협회 관리 대상으로?”
“그렇게 해 주게. 자라나는 새싹이 짓밟혀서는 안 되니 말이야.”
협회 관리 대상. 현재 길드들의 횡포가 너무나 크기에 협회에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인물과 길드에게 이익을 주는 방안이었다.
던전 정보를 우선적으로 전한다든가, 필요하면 국방부와 정부와 직통으로 연계할 수 있다든가.
또 길드원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정보 보호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 등등, 성좌와 길드에 밀린 협회의 발악을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기본적으로 정보를 차단하는데… 사유는 제자님이라고 해 둘까요?”
“그래 주게. 괜히 날파리들이 붙으면 난감하니 말이야. 그럼 난 이만~ 그놈 교육하러 가야 해서 금방 가 보지.”
“예.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학원장님.”
협회와의 조율을 마친 백가연은 신속하게 협회 건물을 벗어나 유성원에게 곧바로 연락한다.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그가 C급 이상의 던전을 도는 데 아무 문제없도록 조치를 취했다고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여보세요? 다 되셨습니까?)
“그래.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협회 관리 대상에 들어갔네. 이제 자네 정보는 어떻게 바뀌든 협회에서 차단이 될 거고, 보고 내용을 어떻게 해도 내가 조정할 수 있네. 그러니 걱정 없이 던전 가는 일만 남았지.”
(그거 잘됐네요. 그럼 나중에 뵙고 자세히 듣도록 하죠. 저도 지금 설명하느라 바빠서요.)
“알았네.”
그렇게 백가연의 전화를 끊은 유성원은 현재 백야 길드에서 신소미에게 설명을 하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받은 은혜를 갚다가 엮이게 된 점과 정체를 들킨 점, 결국 합의해서 백가연 학원장을 영입하게 된 것까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으음… 백가연 어르신이라면 S급 던전도 다수 클리어한 베테랑 오브 베테랑이며 협회와의 인맥도 두터우신 분입니다. 그러니 절대 손해가 없는 거래였습니다.”
“역으로 그거 땜에 주목받을지가 걱정인데…….”
“일단 ‘제자’라는 형태로 받았으니 주목은 받겠죠. 하지만 반대로 제자이기 때문에 당신이 일정 이상의 기량을 보여도 납득할 수 있는 배경을 얻었죠. 그랜드마스터의 제자 백가연 헌터의 제자이니까요.”
“그걸 알고 했지만…….”
안다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건 아니다.
백가연 밑에 있으면 결국 주목을 받기 때문에 혹시 자신이 들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 황금 갑옷과 패황천검류, 티탄의 말뚝. 이 세 가지 요소들만 빼면 당신을 황금 마인 기사로 특정할 방도가 없으니 별개의 인물로 위장도 가능합니다. 여러모로 편하겠네요. 물론 밖에서만 말이죠.”
“우리끼리 던전에 가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군요.”
“예.”
“아무튼 이제 확실하네요. 저, 길드장님, 아영이, 할망구까지 4인의 파티 구성. 음… 아쉬운 건 힐러나 치유사가 없는 거지만… 아! 소미 길드장님이 임시로 되죠?”
“의료 장비랑 포션, 앰플 충원했고, 이제는 협회 의료인 자격을 따는 중이에요. 남은 스킬 포인트를 치유 장비 숙달과 응급 치료술에 찍어서 보강했고요. 그때 이후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놨어요.”
진짜 미래를 읽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신소미의 대비는 훌륭했다. 힐러의 공백을 대신할 것을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그렇게 C급 던전을 돌기엔 너무 사치스러운 멤버 구성이었지만, 드디어 45레벨의 벽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유성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