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러면 용건만 간단히 하시죠.”
“그 돈 말일세. 아까 그 오징어가 은행에서 훔친 거라고 했지?”
“그렇죠.”
“이거 알고 있나? 은행 옆에 붙은 ATM만 해도 내부에 있는 돈을 그냥 뜯어서 꺼내게 될 경우 특수한 용액이 뿌려져서 돈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지. 각성자와 헌터의 시대가 되고, 온갖 능력자들이 은행을 노릴 때를 대비해서 그와 같은 시스템이 만들어진 거라네. 쉽게 말해 훔친 돈이라는 표시가 붙는 거지.”
막을 수 없다면 이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전략.
각성자의 시대가 되고, 온갖 마법과 능력을 지닌 이들이 범죄에 손을 대는 걸 힘으로 막을 수 없으니 이익이라도 얻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거기에 약품으로 인한 ‘훔친 돈’이라는 표시가 있으면 동선을 역추적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아아아! 젠장! 그럼 이 돈 다 쓰레기잖아. 사기당했네.”
“아마 그 S급 오징어 친구는 사기 칠 생각이 없었을 걸세. 스캐빈저들 암시장에선 나름 그런 돈도 쓰이거든.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소매 거래 정도는 문제없지만, 큰 액수 거래에서는 문제가 생기지.”
“에휴~ 뭐, 마정석 건진 걸로 만족해야겠군. 얘들아, 이거 깡그리 다 태우자.”
찜찜한 것은 아무리 가치 있어도 버리는 게 맞다.
유성원은 조 단위는 넘을 법한 지폐를 가차 없이 태워 버린다.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백가연은 생각보다 탐욕에 물든 것 같지 않은 황금 마인 기사에 대해 더욱 호기심이 커져 갔다.
‘으음… 점점 더 알 수 없어지는군.’
“어쨌든 제가 몰랐던 맹점을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건 꽤 도움이 됐네요. 뭔가 속셈이 있다 싶었으면 그냥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정말 무서운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군. 아무튼 황금 마인 기사 양반, 돈에 관심 많은 것 같은데 내 의뢰 하나 받아 줄 수 있겠나?”
“아뇨!”
칼같이 거절하는 유성원이었다.
더 이상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기에 그냥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좋은 정보를 알려 줬지만, 애초에 자신 역시 S급 몬스터 군단의 진격을 막아 준 만큼 이 정도는 거스름돈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떠날 생각이었다.
“흠… 그렇군. 정말 아쉬운 일일세. 전직 아카데미아 스태프였던 유성원 군.”
“……!”
뒤로 돌아선 유성원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곤 티탄의 말뚝을 뽑아서 그대로 백가연 학원장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생각을 읽은 기사들이 그녀의 사방을 포위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일절 발설조차 안 한 유성원은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묻는다.
“…그걸 어떻게 안 거죠? 학원장님은 성좌를 섬기지 않는 헌터일 텐데! 젠장! 대체 다들 어떻게 알아내는 거야? 아! 진짜 환장하겠네!”
“허허, 너무 그렇게 당황해하지 말게나. 나도 사실 이런 방식으로 알아낼 줄은 몰랐으니 말이야.”
“대체 뭘 한 겁니까?”
“자네 그 갑주, 마법 차단 능력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나 싶어서 ‘버프’를 넣어 봤네.”
하나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듯 유성원은 자신의 상태창을 틀어서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하지만 딱히 외부에서 버프 같은 게 들어온 흔적 같은 건 없었다.
“안 들어왔는데요?”
“정확히는 시전하려고 하는 ‘시도’였지. 사냥꾼의 조언을 걸어 주려고 하니 이렇게 뜨더군. ‘아카데미아 직원 유성원에게 사용하시겠습니까?’라고 말이야.”
“…아니, 무슨 버프가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럼 누군가가 버프만 걸면 정체를 들킨다는 건가요?”
“아니. 이렇게 나오려면 과거에 자네의 신원을 확인한 상태에서 ‘버프’를 썼어야 하네. 내가 예전에 학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직원들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걸어 준 게 있었지?”
“아… 아아아!”
그제야 왜 학원장이 자신을 알아챈 건지 깨닫는 유성원이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아 학원장으로 처음 왔을 때, 학생들에게 위협을 받지 않도록 모든 스태프들을 자신의 시야에 두기 위해 그녀가 버프 스킬을 걸었었다.
그때 유성원의 정보가 백가연 학원장의 상태창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여, 지금 다시 황금 마인 기사에게 버프를 시전하니 ‘유성원 님에게 시전하시겠습니까?’라고 나온 것이었고 말이다.
“하… 말도 안 돼. 참 나,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온다고? 하!”
세상살이에 대해 냉소적인 유성원으로서는 성좌가 알려 줬다는 것보다 더 신빙성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순수한 선의로 한 그 행동이 지금에 와서 자신을 알아차리게 해 준 것이라니,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봐야 하는구먼.”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네. 하아~ 젠장, 귀찮게 되었군. 그래서, 이제 어쩌실 겁니까?”
“으음, 어쩌긴. 자네 성격을 보아하니 세상에 알려 봤자 좋은 영향이 있을 리 없고. 비밀을 존중해 줄 생각일세.”
“후우~ 그거 하나는 다행이군요.”
슥…….
유성원은 슬쩍 티탄의 말뚝을 갈무리해 인벤토리 안으로 집어넣는다.
만약 그녀가 혹시나 흔한 꼰대들이 할 법한 소리를 했다면 과거의 은혜고 뭐고 그냥 머리통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아카데미아에서 돌아다닐 때 그런 광경을 꽤 많이 봤기 때문이다.
“막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큰 힘엔 책임이 따른다.’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실 줄 알았거든요.”
“허허,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지. 세상 물정 다 아는 친구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큰일 나지.”
“말이 통하는 분이라 다행이네요.”
“그럼~ 죽을 뻔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라서 말이야. 허허.”
신소미 길드장과는 다른 의미로 이야기가 통하는 백가연 학원장이었다.
둘 다 썩은 세상에 어느 정도 구를 만큼 굴러 봐서 허황된 이야기나 미사여구는 먹히지 않을 상대에 대해 빠르게 구분이 가능했다.
하나 그래도 기묘한 것은 한 사람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자기 자신의 안녕만을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지금 더 이상 이야기할 틈은 없을 것 같네요. 여긴 막았다 쳐도 다른 곳은… 음~ 나름 잘 막았네요. 다만 오히려 신강남이 문제겠네요.”
『(속보)신강남에 또 하나의 몬스터 무리가 다가오고 있음.』
『수원으로 향하던 ‘S급 몬스터 보하쿠’ 몬스터 무리가 ‘신강남’으로 오는 중!』
“어라? 이 오징어 녀석, 결국 그쪽으로 갔네. 다 죽어 가던 것처럼 보인 것도 연기였나? 아니면 결국 이리저리 손해 봤으니까 맨손으론 못 돌아간다는 건가?”
“그것도 있지만, 자네와 계약한 게 있으니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래서 어쩔 텐가?”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다른 싸움에 대해 도움을 바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백가연이었다.
하지만 유성원은 그 안의 감정을 읽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몸을 돌린다.
“어쩌긴요. 여기 있는 마정석들이랑 쓸 만한 아이템만 건져서 잽싸게 도망가야죠. 아~ 이상한 눈빛 보내지 마세요. 어차피 신강남의 잘나신 분들이 알아서 하겠죠. 전 이미 놈들과 거래해서 안 돼요.”
“후우~ 이보게. 그건…….”
“그리고 속은 놈이 잘못했다느니 하면서 같은 인간을 배반하는 인간보다는 성좌에 대한 맹세를 하면 무조건 지키는 쟤네가 훨씬 낫기도 하고 말이죠. 그럼 전 이만~ 내일 또 민방위 소집에 가야 해서요. 얘들아, 가자!”
“민방위? 그건 무슨?”
그렇게 백가연 학원장이 놀라기도 전에 유성원은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여러모로 충격을 받은 그녀였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가기엔 신강남의 현재 상황이 너무 급했기에 우선 그쪽으로 향하기로 한다.
***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아 전속 직원 숙소.
삐비비비빅!
결국 갈 데 없는 나는 아카데미아 내부에 있는 전속 직원 숙소로 돌아와 대충 씻고 잠들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알람 소리가 들려와서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났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씻고 준비해야 했기에 억지로 몸을 움직인다.
“하아아암~ 아, 망할, 민방위 가야 하네. 냠냠, 아칼론~ 나 커피 좀~”
[여기 있습니다, 마스터]
이젠 식모로서의 역할에 익숙해진 아칼론에게서 커피 잔을 건네받은 유성원은 잠에서 깨고자 살짝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들이켠다.
[그보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으음? 손니임? 이런 아침에? 아영이나 소미 길드장님인가?”
[마담 백, 백가연 학원장님입니다.]
“…푸우우웁! 그 할망구가 왜? 어딨어?”
[거실에…….]
젠장! 덕분에 잠이 확 깨 버렸다.
대체 그 할망구는 무슨 생각으로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온 거란 말인가?
방문을 열고 거실을 바라보니, 정말로 그 할망구가 어제 봤던 전투복 차림 그대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니, 너는 왔으면 알려 줘야 할 거 아냐?”
[이미 적대적 대상이 아닌 걸로 승인되어 있었고, 마담 또한 마스터의 체력 회복을 우선시해서 수면 상태를 깨우지 않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무튼 손님이 왔으니 일단 맞이해야 했기에 나는 옷을 갈아입고서 거실로 나왔다.
나가자마자 피비린내와 땀내가 확 풍겨 오는 걸로 봐선 밤새도록 싸우고 바로 온 것 같았다.
표정만 봐도 피로로 가득한데, 대체 왜 온 거지? 할망구가 집에 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오? 왔나? 황금 마인 기사. 저 아칼론이라는 깡통 친구, 커피 끓이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군. 안드로이드 및 기계를 만드는 메트로닉스 계열 성좌 휘하의 길드나 회사의 제품보다 우월한 것 같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담.]
“호호호, 어쩜~ 예의도 아주 바른 게 A.I도 좋은 걸 쓰나 봐?”
천연덕스럽게 아칼론 녀석과 대화하는 이 백가연 학원장… 아니, 할망구도 정말 대단하군.
하나, 민방위 출근해야 하는 바쁜 내 아침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난 바로 본론에 들어간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커피나 얻어먹자고 오신 건 아닐 텐데요? 민방위 소집 출근해야 하니까 후딱 끝내 주시죠.”
“아~ 그거 출근 안 해도 될 걸세. 오늘 새벽 6시까지 싸워서 겨우겨우 그놈들을 몰아냈으니 말이야. 휴우~ 휴대폰 확인해 보게.”
“으음? 어? 진짜네? 아싸! 출근 안 해도 된다!”
휴대폰에는 정말로 ‘신강남 사태 종결’이라면서 민방위 소집을 해제한다는 내용의 문자가 와 있었다.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정말 뛸 듯이 즐거워진 나는 커피 잔을 아칼론에게 도로 넘기며 안도한다.
“하나… 어제 사태로 인해 신강남을 포함해서 기습당한 다른 지역까지 사상자가 총 1만 명가량일세. 정말 치열한 전투였지. 휴우~”
“그래서 열심히 싸우시고 허튼소리 하러 오신 건가요? 생명의 소중함이니 그런 걸요? 그런 소리 안 먹히는 건 어제 서로 알았을 텐데…….”
“허허, 내가 그리 꽉 막힌 노인네로 보이나? 물론 꽉 막히긴 했지. 그러니까 나는 정당한 거래를 제안하러 왔네. 자네, 거래에 집착하진 않아도 돈이 필요하지 않나?”
거래라? 싸우자마자 와서 갑자기 뭘 제안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예감상 별로 좋은 이야기를 할 것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단 들어 둬야 거절을 하든 대응을 하든 할 것이기에 일단 들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