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오지랖 하나는 넓은 할망구, 안 끼는 데가 없네. 에휴~”
말은 험하게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존경한다고 해야 할까? 어른이라 생각하는 양반이다.
약 5년 전, 아카데미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막장으로 운영되어서 ‘스태프’에 대한 인권과 대우가 많이 안 좋았던 시절이었다.
애초에 스태프 숙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고, 학생 전원이 보통 인간을 능가하는 각성자였는데 이때만 해도 선민의식으로 가득해서 스태프에 대한 취급이 더욱 안 좋았지만 아카데미아는 신경도 안 썼다.
‘나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었지.’
‘오늘부로 스태프들의 안전은 내가 보장합니다. 내 상태창 파티로 등록해서 볼 테니 안심하십시오. 또한 대대적인 처우 개선에 들어가 제대로 된 아카데미아의 기반을 다질 겁니다.’
그러나 그 백가연 학원장은 달랐다.
오자마자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준답시고 스킬로 보호해 주었고, 교칙 개정까지 해서 진짜로 손댈 수 없게 만들었다.
완벽한 약자인 우리를 위한 개선이었기에 내부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그녀는 결국 해내었다.
‘닥쳐! 여기는 교육기관이다. 돈놀이는 운영에 무리가 안 갈 정도면 돼! 대체 교육기관에서 돈을 조 단위로 쌓아 두는 멍청이들이 어디 있어? 연구비는 연구 시설에서나 쓰는 거다. 또한 여기서 우수한 스태프들을 육성하면 길드의 질도 자연스럽게 올라가고 그렇게 되면 국방에 영향을 끼친다. 싸우는 자도 중요하지만 싸우는 자를 보조하는 자들의 노고를 무시하지 마!’
‘참 충격적이었지.’
흔히들 말하는 ‘커다란 뜻, 미래, 모두를 위한, 국민을 위해!’ 같은 미사여구는 높으신 분들의 깡패 짓을 합리화하기 위한 단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할망구는 절대적 약자인 스태프들을 위해 일했고 그것을 이루어 냈었다.
‘처음엔 의심했지.’
분명 다른 속셈이 있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할망구에겐 단 하나의 이득도 없었다.
스태프들의 인권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교직원과 학생들의 불만만 늘어났고 길드로부터 압력만 크게 받은 것이다.
‘…자기가 불이익을 받으면서 남을 위한다니, 대체 뭘 위해서?’
그럼에도 그 할망구는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듯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아카데미아의 개선을 위해 교직원, 길드, 학생들과 대립했다.
아카데미아 스태프들은 고마워하긴 했지만, 결국 일반인이었기에 응원밖에 해 줄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이걸 그냥 놔둘 순 없지.”
생각을 마친 나는 벌떡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이 망할 세상에 대해 떳떳이 욕을 하려면 나만큼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갚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무와 권력을 저버리고 사리사욕을 챙기는 놈들에게 내가 어떻게 욕하겠는가?
오십보백보, 겨 묻은 놈이 똥 싼 놈보고 뭐라 하는 격이다.
“덕분에 아카데미아 스태프 생활이 편했으니…….”
그리고 그 할망구라는 존재 덕분에 나는 인간에게 완전히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주 작고 희귀하지만 희망이라는 게 있긴 있다는 것을 알기 전과 후의 차이는 컸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저 할망구가 죽게 둘 수는 없었다.
***
신강남, 남쪽 전선.
총전력 투입으로 몬스터들의 후방을 기습한 작전은 유효했다.
신강남 내부의 몬스터와 지원 오는 몬스터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놔서 신강남 내부에 있는 몬스터들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젠장! 계속 쏘는데 왜 수가 안 줄어드는 거야! 작전은 성공했다며!”
“멍청아! D급 이상부터는 마정석 탄환과 장비가 안 먹힌다고! 그러니 안 줄지. 우리 역할은 다한 거야. 이제부터는 헌터들이 처리해야 해.”
마정석 기술의 발달로 각성자가 아니어도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한계점은 분명했다.
미사일, 탄환을 만들어도 직접 처리 가능한 건 F급과 E급 정도. D급부터는 교환비를 무시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퍼부어야 죽고, 본격적인 중대형급 몬스터인 C급부터는 무조건 헌터들이 처리해야만 했다.
이 한계의 존재만 아니었더라도 아마 성좌와 각성자의 의존도는 크게 낮아졌으리라.
물론 이런 상태를 만든 것도 그들 성좌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낮출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A급 기르마크부터 해서 A급 던전 주변에 모인 D급 이상의 숫자는 총 1,000여 마리쯤 됩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전원 산거정의 직속 수하들인 산거정의 약탈자들입니다!”
“성좌 산거정이 진짜 작정을 했군. 하나 차근차근 제압해 나가면 된다. 지원이 더 이상 없으니 약한 몬스터들부터 자르고 하면!”
도심 한가운데 폐허처럼 된 곳에 모여 있는 성좌 산거정의 직속 몬스터들은 종족이 통일되지 않은 대신 각자 대항해시대에서나 볼 법한 총기와 칼을 무장하고 있었다.
성좌 도살왕의 부하들이 고기에 굶주린 짐승과 악마들이라면, 성좌 산거정의 부하들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뭉친 산적, 해적, 도적떼 같은 콘셉트였다.
“젠장! 인간 놈들의 저항이 거세기 짝이 없군. 기르마크 님! 이제 어떻게 하죠? 후방 지원도 잘리고 전방은 진형이 두꺼워서 가기 힘들 것 같은데 말이죠?”
“걱정 마라. 이번 약탈은 모두 그분이 이끄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이번엔 머리를 쓰는 놈으로 데려왔지. 안 그러나? 스캐빈저 인간?”
“예, 예. 지금 완전히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멍청한 놈들, 여기에 기르마크 님만 계신 이유를 아직도 생각 못하다니……. 키키킥!”
기르마크 옆에 있던 간사해 보이는 인간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연락했다.
성좌 산거정 세력은 겉으로는 신강남을 반드시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올인하는 척했지만, 사실 진짜 목표는 바로 주변 세력 약탈이었다.
스캐빈저 참모가 연락한 순간, 이미 대기하고 있던 성좌 산거정의 다른 사도들이 마치 고삐 풀린 개들처럼 주변 지역으로 정신없이 달려가기 시작한다.
“급보입니다! 성좌 산거정의 거점이 있는 산 쪽에서 대규모 몬스터 무리가 셋… 아니, 넷으로 갈라져서 흩어지고 있습니다. 기르마크 외에 가크오즈, 처느오우도 등등, 성좌 산거정의 모든 직속 사도 몬스터들입니다!”
“성좌 산거정……. 제정신인가? 그렇게 되면 자기 성소는 지킬 생각이 없는 거야?”
성소, 신전 등등 여러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이곳은 인간을 구슬려서 사도로 삼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자신의 군세를 직접 이끄는 성좌들에게는 핵심적인 장소였다.
사라지거나 클리어당하면 그 성좌는 다시는 군세를 이끌고 이 지구에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와, 진짜 목숨 걸었네.”
“이걸로 올인해서 뒤집을 생각인 거겠지. 게다가 잘못돼도 그냥 놀이판에서 추방당하는 거니까…….”
중심이 되는 던전 성소나 신전을 털리면 추방.
자신의 군세를 놓고 정복하려는 성좌들의 공통적인 패배 조건이다.
그리고 반대로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자신의 사도로 만들어서 지구를 지키는 성좌들은 이 지구가 정복되면 자동으로 패배하게 돼서 사라지고, 결국 정복에 성공한 성좌의 손에 들어가 그의 것이 된다.
“그동안 신강남의 마정석 ATM 기기 노릇 한 게 엄청 빡쳤나 보네요.”
“안정적인 사냥터랍시고 얕보인 게 빡친 것도 있죠.”
“지금 그걸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않나? 빨리 수원 및 주변 지역에 연락을 하고! 국방부에 연락해서 주변 부대에 비상! 그리고 해당 지역에 있는 길드들에게 연락해서 시급히 도시 방어 계획을 실행! 할 게 많네!”
아무튼 신강남 전선 지휘부는 갑자기 변모한 적의 전략에 재빨리 대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문제점에 부딪치게 된다.
일반 몬스터들 중에서 F, E급들은 군대가 상대하고, D, C, B급까지는 헌터들로 어떻게든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하나 A급 몬스터부터는 규격 외의 존재라서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력이 필요했다.
“심지어 넷 중 하나인 보하쿠는 산거정 직속 중 유일한 S급 몬스터! 수원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설마 자기 성소를 지키던 핵심 사도까지 투입할 줄이야. 하아~ 내 평생 이런 놈은 처음이군.”
“그만큼 이례적인 경우라는 거군요.”
“그렇지. 어차피 성좌라는 것들은 수명이라는 게 없어서 보통은 이렇게 말려도 그냥 기다리는 쪽을 택하거든. 도박수를 던지는 놈이 이상하지.”
40년 넘게 헌터 일을 해 온 백가연조차도 이례적으로 느낄 정도로 성좌 산거정의 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래서 성좌인 거라고 납득이 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또다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서울 길드의 오경훈까지 부른 백가연은 S급 몬스터를 막기 위해 인원을 지원받고자 한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A급이 오는 곳은 어떻게든 그쪽 길드 단위에 인력을 붙이면 되지만! S급은 이야기가 다르지. 수원 쪽에 내가 가 볼 테니 A급 헌터 친구들 좀 빌려 줄 수 있나?”
“…죄송합니다만, 저번 사태 이후 멀쩡한 친구들이 많이 없어서 저희도 힘듭니다. 어르신.”
‘이 지경이 되고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후우~ 올림푸스에 연락을 한들 그자들도 마찬가지겠지?’
다른 곳들을 설득해서 기껏 지원을 왔고, 회심의 수를 통해 진압을 편하게 해 주었지만 오경훈은 냉정할 정도로 칼같이 거절한다.
이어서 올림푸스에 연락을 해 볼까 생각했지만, 그놈들도 움직임이 느리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기껏 도움을 받았으면서 다른 이들을 돕지 않은 태도에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 새끼들, 답이 없네.’
‘아니, 그럼 우리는 호구라서 도와주러 왔나?’
‘S급 몬스터 때문에 특별시 날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국방부 및 협회와 다른 길드에서 온 이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오경훈을 노려봤지만, 그는 예전부터 이래 왔다는 듯 당당할 따름이었다.
유일하게 정부 요인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눈치였지만, 백가연은 이럴 시간도 아깝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았네. 그럼 내가 수원으로 갈 테니 여긴 자네들이 알아서 하게나.”
“그러십시오.”
시끄럽게 일을 키우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진 오경훈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반면 백가연은 그 가증스러운 미소를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 채 지휘부를 나와 자신의 트레일러에 탑승한다.
‘망할 애송이 같으니! 자기는 불 다 껐으니 상관없다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화가 나는구먼.’
“학원장님, 그러면 곧바로 수원으로 갈까요?”
“그러게나. 시간이 매우 급하네. 나도 무장을 할 터이니 김 기사 자네가 수고해 주게.”
그렇게 행선지를 결정한 백가연은 곧바로 S급 몬스터를 상대할 무장으로 갈아입기 위해 트레일러 내에 있는 탈의실을 사용한다.
일단 국방부에도 연락을 했으니 본격적으로 상대하기 전에 마정석 미사일을 탑재한 공군의 폭격으로 어느 정도 숫자는 줄일 수 있으리라.
문제는 S급 몬스터였는데, 놈들도 결국 약탈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만 저지하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을 하며 트레일러는 수원으로 빠르게 달려간다.
“학원장님? 아! 방금 나가셨는데? 그 전화로 연락 안 됩니까?”
“비상이라 그런지 계속 통화 중이셔서 말이죠. 급히 전할 말씀이 있는데……. 그래서 어디로?”
“수원 쪽으로 갔습니다. 성좌 산거정 놈이 머리를 써서 별동대까지 주변 지역으로 보냈는데… 그들 중 S급 몬스터가 있어서 그놈을 막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S급? 아아… 그렇군요. 수원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현장에 도달하게 된 유성원은 ‘아카데미아 스태프’인 척 용건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백가연 학원장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가 여기에 있으면 이제 ‘작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죠.’ 하면서 빠지면 되고, 다른 곳에 있으면 그리로 가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수원 방향으로 S급 몬스터라……. 에휴~ 나는 왜 이렇게 만만치 않은 놈들과 인연이 생기는 건지.’
아영이를 구하기 위해 레그혼과 싸웠던 기억을 되살린 유성원은 한숨을 쉬면서도 상태창 확장 바에 있는 지도를 열어 수원을 찍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기껏 은혜를 갚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S급 몬스터가 있다고 해서 도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이번엔 썩어도 준치라고, S급 헌터인 학원장님이 있기에 혼자 싸우는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