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 좀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네. 내가 너무 성급했네. 100년가량밖에 못 사는 인간에게 있어 용을 보는 것 자체가 일어나기 힘든 일이니까. 근데 어머, 갑옷 디자인 센스 좋네. 황금이라니, 너 뭘 좀 아는구나?]
“그, 그게…….”
[사담은 여기까지 하고, 바로 상담 들어갈게. 이거 계약금이니? 어머머, 마음에 쏙 드네? 예술품까지 있네? 이거 감정 좀 해야 하는데, 좀 기다려 줄래?]
뭐지? 이 용은? 제물이자 매개물로 올려놓은 보물 상자를 쏟아붓더니 금화부터 시작해서 안에 있는 티아라 같은 예술품을 하나하나 감정하기 시작한다.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애들에게 ‘원래 용이 저렇냐?’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다들 도리질을 치면서 부정해 왔다.
‘그렇지? 저 용이 이상한 거지?’
[오올~ 일단 성의는 충분하네. 좋아. 계약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어? 동료? 아니면 용 기사가 되고 싶은 거야? 내 등에 타고 창공을 누비는 그거 맞지?]
“예. 뭐, 맞는 거긴 한데…….”
[좋아. 그럼 소환할 때만 탈것 해 주면 되는 거지? 혹시 동료는 안 하고? 옵션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어? 마법은 기본 옵션인데, 브레스는 별도 옵션을 넣어야 해. 그리고 기승 스킬 등급에 따라 할인이 적용되는데, 스킬이 어떤 거야?]
내가 지금 용을 타는 것인가? 새로운 차량 계약을 하러 온 것인가?
브레스 별도 옵션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무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펼쳐지는 가운데 일단 난 내 스킬을 보여 준다.
“(전설)기승(S+)요. 저기, 그런데 드래곤님? 그… 왜 이런 방식으로 하시는 거죠?”
[뭐긴. 나도 보물 모으고 싶어서 그러지. 몇 번 여기저기 다녀봤는데, 그냥 계약을 해서 모으려니까 효율이 떨어지더라고~]
“…예?”
[영웅의 자질을 가진 녀석을 따라다니면 편하긴 한데 걔는 검소하고, 재물을 모으는 타입을 따라가면 걔는 또 욕망에 눈이 멀어서 실력 기르는 걸 게을리해서 결국 효율이 안 나와. 아무튼 재물을 모으기 위해 이렇게 영업 중이야.]
그러니까 돈과 금은보화를 위해서 직접 용병을 뛰시는 용님이라는 건가?
참 세상엔 별별 용도 다 있구나 싶었다.
뭐, 복잡하게 힘겨루기나 그런 거 없이 돈과 재물만 주면 깔끔하게 움직여 주니 나쁜 건 아니었다.
[아무튼 내 할 이야기는 다 했는데… 계약 계속 진행해도 될까?]
“아, 예.”
[보자… 일단 기승 스킬 있는 거 확인했고, 기사 클래스면 ‘서약’은 어떤 걸 했어?]
“안 했는데요?”
대체 서약이 뭐기에 이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계속 드는 의문과 함께 언제 한 번 쟤네가 어떤 ‘서약’을 했는지 물어보자고 생각하고 솔직히 말한다.
[그럼 혹시 종사로서 모시고 있는 기사는 있니?]
“그것도 없는데요? 저 각성자가 된 지 이제 세 달밖에 안 된 몸이라. 그럼 안 되나요?”
[아니, 오히려 좋아. 귀찮은 서약 같은 거 있으면 특약에 넣어야 해서 귀찮거든. 자유 기사라는 존재도 봤으니까 문제없어. 그러면 계약은 몇 년 단위로? 누나가 추천하는 건 10년 단위. 비용은 연마다 지불로 하고 추가 옵션은 이제 필요할 때마다 넣을래?]
“그… 정확한 비용부터 산정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저기, 브레스 옵션 추가할게요.”
드래곤 하면 브레스. 브레스 하면 드래곤.
이건 진리다.
그 콰아아아아아아! 하고 뿜어내는 드래곤의 마력에 심장이 쿵! 하는 건 진리라고!
얼마나 비싸질지 모르지만 무조건 해야만 했다.
[10년 단위. 비용은 연마다 지불. 탑승용이고, 마법, 브레스 옵션. 전투 중 명령은 기본적으로 따르지만 조언은 해 줄게. 마지막으로 죽는 경우를 제외하고 계약 파기 시 위약금 지불. 이 정도면 되겠지?]
“예. 그런데 비용이 얼마나 되나요?”
[저건 날 부르는 계약금이니까, 1년 요금으로 생각하면…….]
‘꿀꺽.’
[저거 한 상자 더 주면 1년 치야.]
뭐야? 그렇게 싸? 아, 아니지. S급 몬스터를 잡아서 얻은 보상이라고 치면은… 아니! 그래도 싸!
나 4만 포인트 얻었는데!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어머? 너무 많니? 많으면 수수료 조금 붙지만 할부로 계산이…….]
“1년 선불요!”
하지만 혼란은 혼란이고, 이 깔끔한 금전 계약으로 골드 드래곤 탈것을 얻는다는 건 매우 큰 메리트였기에 나는 지체 없이 인벤토리에서 예비로 사 둔 드래곤 미끼용 보물 세트를 꺼내어 바로 지불한다.
잠시 놀란 눈으로 날 보던 그녀는 금방 새로운 상자에 있는 보물들을 확인하고 계약서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머, 대박. 그러고 보니 곁에 있는 기사들도 다~ 굉장한 걸 보니… 혹시 추가 상품 및 옵션 구매할 생각은 없니?]
“예? 아뇨. 딱히…….”
[누나가 잘해 줄게. 응?]
따지고 보면 나보다 나이가 수백 살에서 수천 살은 많으니 누나보다는 할머니가 맞지 않을까?
뭔가 내가 돈이 되어 보이니까 들이대는 게 확 느껴지자 부담스러웠다.
와, 저 에메랄드 눈동자가 탐욕에 물들고, 우아하다고 감탄한 목소리가 이렇게 음습하게 느껴질 줄이야.
완전 나를 먹이로 보는 뱀의 눈이었다.
“아무튼 필요하면 부를 거고, 혹시 안장은 제가 구비할까요?”
[아니. 내 거 있어. 이래 보여도 이 누나의 등을 거쳐 간 영웅들이 몇 명인 줄… 크흠! 아무튼 거기 계약서에 사인이랑 피로 지문 찍으면 되고, 호출할 때는 이 팔찌에 마력을 넣고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갈 거야.]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엘드라엔이야. 자자, 계약 후딱 마치고 확인할 거 있으면 확인하렴.]
그렇게 계약서 교환, 비용 지불 및 팔찌를 받음으로써 무사히 계약을 마친다.
계약을 마치자 그녀는 곧바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1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표정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팔찌를 찬 채 자리에 주저앉는다.
“용이란 거, 정말 피곤한 생물이구나. 하아~ 그냥 눈을 낮춰서 드레이크나 와이번 정도로 만족할 걸 그랬나? 얘들아,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으음?”
“이미 계약 다 끝나셨는데, 벌써 후회되십니까? 단장님?”
[계약자여, 그래서 진작 말하지 않았더냐?]
[조언은 이미 많이 이루어졌다.]
[괜찮다… 그래도… 경험이… 생겼다.]
그래, 결국 크록베인의 말대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뿐 딱히 사기 거래를 당한 것도 아니고, 우월한 전투력을 가진 골드 드래곤을 탑승한 용 기사가 되었다는 걸로 충분히 이익이었다.
“자, 그럼 돌아갈까?”
[계약자여, 기왕 가는 거 타고서 가는 게 어떤가?]
“대한민국 공군이랑 맞장 뜰 일 있어?”
거대한 골드 드래곤을 탄 황금 기사가 대한민국 서울 상공을 누비는 순간, 곧바로 레이더와 위성에 잡혀서 사진이 찍히는 건 물론 공군부터 시작해서 각 길드의 비행 전력들이 출동해서 나를 잡으러 올 것이다.
[그럼 뭘 위한 계약인가?]
“나중에 탈 일 있으면 타려고 하는 거지! 그러는 너희도 애초에 탈것이 없잖아.”
[음? 계약자여, 나는 탈것이 있다만?]
뭣이라? 가울프의 말에 나는 눈이 커진 채로 내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진짜냐고 묻는 눈빛을 보내자 가울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옆을 돌아보니 섬멸과 크록베인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깡통이라서 믿고 있던 아칼론까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나 빼고 다들 탈것이 있다는 것에 난 큰 충격을 받았다.
“뭐야? 왜 있는 건데?”
[그건 기사(騎士)의 기본 소양입니다.]
“기사(騎士)이니까요.”
[기사(騎士)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크록베인… 엄연히… 기사(騎士)다.]
납득이 가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니,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 주든가! 왜 이때까지 조용히 입 다물고 있던 거야?
“딱히 물어보지 않으셨고, 또 저희가 참여한 전투는 대부분 좁은 지역이나 장거리 이동이 필요 없는 국지전이었기에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잔챙이밖에 없는 던전을 가니 볼 일이 없던 것이겠지.]
“…그러면 보여 줘! 너희 탈것 보여 줘어어!”
그동안 모르던 게 억울했기에 난 녀석들이 가진 탈것을 보여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각자 바로 소환하기 시작한다.
먼저 가울프. 심연의 기사답게 검은 안개 속에서 다부지고 거대한 흑마(黑馬)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이 녀석은 어비스 나이트메어다. 계약자에게도 추천했던 녀석이지. 흡!]
푸르륵!
‘개쩐다!’
붉게 빛나는 눈빛도 그렇고, 투레질을 치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입과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게 보통 말과 다르다는 걸 여실히 보여 줘 멋있었다.
그다음은 섬멸로, 빛기둥이 생기더니 거기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거대한 맹금류 같은 새가 나온다.
“성천조(聖天鳥)입니다. 성천 기사단원의 다리이자 창공의 동지이죠. 우리 단장님이란다.”
삐이이익!
‘저러고 어떻게 나는지는 몰라도 은백색 갑옷과 투구를 걸친 새라니, 정말 멋지다.’
일단 맹금류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에 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이것도 멋있었다.
뭐야? 다 괜찮잖아?
실물로 보니까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괜찮다.
그러는 사이에 크록베인이 무언가를 타고 나에게 다가온다.
크르! 샤아아아!
[진정해라… 주인 앞이다.]
“크록베인, 그건?”
[바실리스크… 튼튼하고… 석화 브레스… 쓴다… 다만 느리다.]
크록베인이 탄 것은 바닥에 납작하게 붙은 거대한 도마뱀으로 좀 느린 듯 움직였지만 마찬가지로 중무장하고 있어서 마치 걸어 다니는 탱크 같은 느낌이었다.
이쯤 되면 억지로 용을 선택한 내가 엄청 바보짓 한 것 같잖아!
[진짜 드래곤을 타시는 마스터에 비하면 조촐한 제 서포트 메카, 게오르기우스 호입니다. 아크라시움식 마정석 엔진을 사용했으며 출력은…….]
“…….”
부르르릉! 슈우우우!
뭐야? 이 SF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호버 바이크는?
이런 것도 기사의 탈것으로 치는 거야? 심지어 무기 거치대까지 뒤에 다양하게 있어서 엄청 멋있었다.
이, 이 기만자들 같으니! 나만 빼고 다 멋있는 탈것을 갖고 있었다니! 이런 거 있으면 진작 알려 달라고. 이렇게 보니 후회가 막심해진다.
‘에휴~ 내 팔자야.’
게다가 큰돈 들여서 비싼 차(龍)를 뽑았는데 쓰지 않고 놔두면 더 아깝기 때문에 나는 아쉽고 부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그 돈 밝히는 골드 드래곤 누님을 타야겠다고 생각하며 체념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