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예. 잡기는 잡았죠. 진짜 말 그대로 죽을 뻔했지만요. 아니, 진짜로 죽을 뻔했습니다. 진짜 한 끗 차이로 겨우겨우 산 거예요! 저 포션이랑 비상약 먹어서 안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진짜 뒤질 뻔했어요.”
“역시……!”
“그러니 두 번 다시는 그딴 거랑 싸우고 싶지 않네요. 어휴~ 진짜, 진짜, 지인짜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거지, 원래 제가 황천 갈 거였다니까요. 그러니까 미리 말할게요. 다음에 같은 상황이 되면 난 무조건 도망갈 겁니다. 무조건요.”
그래, 인간이 한번 단맛을 보기 시작하면 또 찾기 마련이다.
그러니 다음에 또 어쩌고저쩌고 말하거나 또 걔가 위험해질 때마다 날 찾는 일이 있을지 모르니 미리 못 박아 놔야 한다.
내가 무슨 턱시도 가면도 아니고! 위험할 때마다 나타나서 구해 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예. 잘 알아 두겠습니다. 아무튼 아영이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걔보고 빨리 강해지든지 레벨 업을 하든지 하라고 하세요. 에휴~ 이제 좀 맘 놓고 자야겠다. 며칠 정도 입원해 있어야 하나요?”
“활력 스탯이 상식 이상으로 높으셔서 아마 엄청 빠르게 회복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지금 안 나온 후유증이 있을 수 있으니 여유 있게 3~4일 정도 푹 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뇨. 그냥 포션이랑 약이나 잔뜩 받고 가서 집에서 쉬겠습니다. S급 몬스터 잡았다는 거 알면 놈들이 어디부터 조사할지 딱 보이지 않나요? 중상자 이상 상처 입은 사람들 조사도 하겠죠.”
“예. 그럼 기록도 바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치료도 받았고 특별히 더 이상이 없다고 하니 가서 쉬는 일만 남았다.
‘포션이나 잔뜩 사서 가져가야지.’라고 생각하며 백야 길드를 나온 나는 아카데미아 주변에 있는 헌터 마켓으로 바로 향했다.
‘약이나 사자. 휴우~ 정말 치열했어.’
레그혼과의 전투로 금빛 신수의 갑옷이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자동 수복 기능이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고쳐지리라.
문제 되는 거라면 이렇게 부서진 건 처음이었기에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가 걱정이었다.
‘…수리 문제가 해결될 동안 얌전히 숨어서 쉬자.’
나의 소시민 같은 심성이 또 여기서 드러나는 것 같았지만, 나에게는 이게 딱이기에 바로 포션과 의약품만 잔뜩 사서 숙소로 돌아온다.
내 집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제야 마음 놓고 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밖에서는 못 부른 내 기사들도 불러냈다.
“으음, 나는 이 모양이라고 쳐도 너희는 어떠냐? 포션 필요하면 줄게. 잔뜩 사 왔어.”
그래, 포션을 잔뜩 산 건 내가 쓰기 위함도 있지만 그때 같이 싸워 준 내 기사 녀석들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S급보다는 약해도 A급, B급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걸 막고 있었으니 분명 손상이나 데미지가 있을 것 같았다.
[제 파츠가 일부 손상되었지만 자체 수리 시스템으로 수복이 가능합니다. 혹시라도 심한 손상인 경우 금속강과 재료만 구해 주시면 제가 가공해서 수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단장님의 마력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술이면 된다. 흠하하. 상처의 후끈함을 느끼며 마시는 술은 각별하지. 그리고 크록베인 경은 고기면 된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
넷 다 전부 다르네… 라기보다는 회복 수단이 아니라 그냥 본인이 원하는 거 아냐?
하지만 내가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을 줬으니, 상이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곧바로 놈들이 원하는 것을 배달로 주문한다.
요새 배달 시스템이 너무 좋아서 대형 마트에 대량 주문하면 될 것이다.
“크록베인은 물고기? 육지 고기? 물고기면 참치, 육지 고기면 소로 할 건데? 가서 물어봐 주라.”
[주인이 내리는 거라면 뭐든 먹겠다고 한다, 계약자.]
“…그럼 참치로 두 마리 큰 놈 주문해야겠다.”
물론 걔 취향이 아니라 소보다 조금 더 싸다는 이유였다.
덤으로 양주와 와인 몇 병, 안줏거리 및 식사류를 추가해서 결제하는 걸로 땡.
그렇게 여러 지출로 인해 훅! 빠진 통장 잔액을 보니 조금 힘이 빠지는 나였다.
9년간 아카데미아 직원으로 열심히 일해 가며 한 푼, 두 푼 모았는데, 각성자가 되고 난 이후부터 소비가 너무 헤퍼진 탓이리라.
“…이쯤 되면 진짜로 헌터 되는 거 고려해 봐야겠네. 하아~ 아! 맞다. 보상이랑 레그혼에게 얻은 아이템들 확인해야겠다.”
이리저리 구르느라 보지 못했던 보상, 습득 아이템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인벤토리와 상태창을 연다.
“레벨은 4나 올랐네? 오! 43레벨! 신수의 힘 적용 안 돼서 절반이네.”
[Lv.43 유성원]
스테이터스 성장치:21/21/21/21
Str:910 Dex:909 Vit:910 Mag:903
[보유 스킬]
위대한 기사의 길(SSS)
(유니크)만검(萬劍)의 기사 그란델의 무재(武才)
(유니크)정령 기사 ‘실레이온 포레스트 블레이드’의 비전
(유니크)KMG TECH Master Device
(유니크)패황 기사 ‘유천’의 사라진 유산, 패황천검류(覇皇天劍流)
(전설)흔적만 남은 기사단의 성소 차원문
금빛 신수의 갑옷이 부서진 상태라 신수의 힘이 빠져서 스테이터스는 절반이었지만, 그래도 1천에 가까운 S급 스테이터스였다.
아, 근데 이러면 근력이 모자라서 티탄의 말뚝은 못 쓰겠군.
“그리고 보상은… 뭐야?”
[40레벨을 달성하여 선택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기사 소환 or 스킬 포인트 +1 or 무구 증정.]
[레이디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강적과 싸움을 하여 무사히 구해 내다니! 그대야말로 기사도의 모든 귀감을 이루었노라!]
[보상-기사 소환 or 스킬 포인트 +1 or 무구 증정.]
[무적의 적수와 싸워 이겼구나! 그 위대한 승리는 하나의 별이 되었노라. 기사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을 축하한다!]
[보상-명예의 상징.]
와! 이게 뭐야? 보상이 셋이나?
40레벨 보상은 39레벨에서 한 번에 S급을 잡아서 43레벨이 되었으니까 당연하고, 스킬 포인트는 3개까지 받을 수 있네.
명예의 상징은 뭔지 모르겠지만, S급 몬스터인 레그혼을 잡아서 생긴 특수 보상이리라.
“으음, 이 정도면… 그냥 내가 힐러 할까?”
불확실한 ‘기사 소환’에 기대를 걸 바엔 내가 힐이나 치유 스킬을 가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내가 중태나 다친 상태가 되면 소용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살아만 있으면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
“좋아. 스킬 포인트로 2개 다 받는다! 치유! 내가 치유할 거야!”
[계약자여, 그건 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만?]
“음? 뭐가 문젠데?”
[계약자는 애초에 마법을 못 배우지 않나.]
그때, 가울프 녀석이 한 발 나와서 갑자기 내 선택에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지금 필요한 걸 보충하는 거잖아? 또 마법만이 아니더라도 의술을 받을 수도 있지! 기사 소환은 랜덤이라서 원하는 친구가 안 나올 거고. 그런데 왜 그러는 걸까?
[그리고 스킬을 받는 것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대는 이미 S급 몬스터-레그혼을 쓰러뜨린 무용을 증명한 몸. 한번 정한 길을 어그러뜨리면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면 끝을 향해 가는 것이 좋다.]
“뭔 소리야?”
[저도 동의합니다, 마스터, 궁극의 하나가 어설픈 여럿보다 낫습니다. 오늘 고생하셨더라도 그 귀중한 스킬 포인트를 자신의 강함을 위해 투자하여 다음엔 더 쉽게 S급 몬스터를 쓰러뜨리면 해결되는 일. 또다시 죽을 고생을 하는 걸 가정하시겠습니까?]
아, 씨… 기껏 치유 스킬 배울 마음을 먹었는데 아칼론까지 저런 소리를 하니 또 이상해지네.
이번에는 섬멸을 쳐다보니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거든다.
“단장님 선택을 존중하지만, 저도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굳이 치유 마법이나 힐을 배우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패황천검류만 해도 마력 소모가 심하기도 하고 말이죠. 따로 전문 힐러나 파티원을 구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왠지 이 녀석들, 나한테 약 파는 느낌인데……. 하지만 설득력이 아예 없지는 않아서 끌리기도 했다.
더 강한 힘이 있다면 굳이 치유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만약 또다시 S급과 싸운다고 했을 때, 더 강해지지 않으면 이번엔 한 끗 차이로 내가 죽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기껏 익힌 치유 스킬도 아무 쓸모없을 것이다.
“음, 내가 싸움의 고통에 너무 겁먹은 모양이군. 눈이 잠시 멀었나 보다.”
그렇게 난 스킬 리스트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스테이터스와 전투에 도움이 될 스킬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쉬운 게 아닌 게 전에 패황천검류만 해도 엄청난 고뇌와 고민 끝에 선택했을 정도로 이 스킬풀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장난이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 선택하는 데도 엄청 걸렸는데… 2개라.”
“단장님, 이번에야말로 성천 기사단 스킬은 어떠신지요? 빛과 같은 신속을 추구하며 퇴마와 부정한 존재들을 처리하는 데 적합하니, 악마들을 상대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계약자에게 어울리는 건 그런 정신병자 같은 무예가 아니다. 자신을 과신하지 않고 스스로를 깊은 심연 속에 묻어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당연히 심연의 기사의 무예가 어울리지 않겠는가?]
[부정. 은하 기사의 소양이 강함. 그러니 마스터는 은하 기사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좋다고 봄. 음? 크록베인 경이 의견을 전해 왔습니다. ‘주인… 용인검술도… 좋다.’라고 합니다.]
이 자식들, 은근슬쩍 자기 진영 기술을 나에게 강요하고 있네.
뭐, 다들 성좌의 기록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기사들이니 자기 소속이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를 택하면 남은 애들이 괜히 기분 상할 수 있으니, 얘네 넷은 무조건 빼고 고르는 게 최선이었다.
‘뭘로 고를까? 기사들이 너무 많아서 맨날 고를 때마다 고민이야. 후우~ 선택지가 너무 많네. 그냥 한 명 걸로 올인할까?’
너무 다양하고 광범위한 선택지 때문에 매번 이럴 때마다 골치가 아픈 걸 빨리 해치우고 싶어서 그냥 패황 기사 유찬이나 다른 유니크 스킬을 가진 기사의 스킬을 시리즈로 모을까 하는 고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왠지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복제품이 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아, 맞다. 기승. 나 기승 배울래. 뭘 타지도 않았는데 기사(騎士)라는 것도 웃기지 않아? 그리고 맞아. 너희도 뭐 타지도 않는데 기사라고 우기고 있잖아!”
“보행 기사(步行騎士)라는 존재도 있긴 있습니다.”
[계약자여, 전에도 말했지만 기사란 서약을 하는 자다. 뭘 탈 수도 있지만, 사정에 따라 못 탈 수도 있지.]
하지만 한번 불이 붙으니 기승 스킬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만의 탈것, 마이카(My-car) 같은 것을 원하는 건 남자의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인가?
애초에 기마(騎馬)는 기사(騎士) 계급의 특권 같은 것이다.
말이라는 생물은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터무니없이 비쌌으며, 사람보다 더 높은 곳에서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내려다볼 수 있는 그 지배감이고 나발이고, 아무튼 기승을 찍기로 한다.
“근데 이것도 많네.”
[스킬 리스트][검색:기승]
(영웅)비룡 기사단 비룡 탑승법
(전설)성수(聖獸)에게 인정받은 자
(영웅)울펜 기사단 펜리르 기승
(희귀)케시크 군단 기승
(영웅)라팔시온 경의 마상 전투법
…….
…….
…….
종류도 많고 탈 수 있는 것들의 한계가 없는 데다가 또한 기사(騎士)들 대부분이 탈것을 타고서 전장을 누비는 만큼 이것도 고르는 데 엄청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무슨 면허가 이래? 하나로 좀 통합하든가. 라고 불평하고 싶었지만 이것들 하나하나가 기록 같은 거니 그럴 수는 없었다.
“음~ 기승도 선택 장애가 오네. 너희들, 혹시 추천하는 거 있냐? 나는 개인적으로 용이 타고 싶긴 해. 어차피 성소에 집어넣으면 되지 않나?”
용 기사. 기사 관련 매체에서 가장 멋지게 나오는 로망 중의 로망이지.
기왕 상상한다면 최고로 상상하고, 선택할 수 있으면 제일 멋진 걸 택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실제로는 돈이 없어도 차를 산다고 하면 비싼 외제차나 스포츠카를 상상하듯이 말이다.
“으음, 용은 그다지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단장님.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크록베인 경 먹는 것의 배가 넘게 들어갈 유지비도 있고, 동양의 용이면 공중에 떠 있는 상태라 탑승감이 안 좋고, 서양의 용이면 신체 구조 때문에 또 조련이 힘듭니다.”
[물론 무력도 강하고 돌진력은 좋지만 성격도 더럽고 독선적이라 충성을 얻기가 매우 어렵다. 계약자여~ 나도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게다가 ‘성소’는 엄연히 기사단의 성소라서 기사가 아닌 자는 못 들어올 텐데?]
아니, 말 같은 탈것도 기사의 일부인데 못 들어오나?
판정이 너무 애매한데? 아무튼 문제가 한둘이 아니군.
[또한 파충류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냉대 지역에 매우 취약합니다. 물론 마력을 두른 용이라면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지만, 가울프 경이 말했듯이 성격이 매우 더럽고 민감해서 충성을 얻지 않은 상태면…….]
음, 외양으로만 따지고 생각하기엔 ‘용’은 문제가 많군.
확실히 기사의 탈것이란 기사(騎士)의 정체성이며 반신(半身)이라고 할 수 있으니 다들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용’은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단장님.”
너는 계획이 있는 기사구나!
방법이 있다는 말에 나는 눈을 빛내면서 ‘섬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