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후우~ 시원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나는 곧바로 도복을 세탁물 칸에 집어넣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보통은 자신의 것을 쓰지만 나는 그냥 아카데미아의 것을 썼기에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세탁은 나 같은 아카데미아 스태프들이 해 주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맘때 여자애들은 뭘 좋아하지? 하나도 모르는데, 난감하구먼. 아니면 아카데미아나 각성자 관련 이야기나 하겠군.”
대충 화젯거리를 좀 만들어야겠다고 고민하며 아카데미아 건물을 내려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날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서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미니맵을 확인해 보자,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누군가가 계속 날 따라오고 있었다.
‘으음, 아카데미아 여학생인가? 내 인생에도 봄이 찾아온 건가? 아영이 하나만 해도 난감한데… 는 개뿔. 미행인 것 같은데?’
슬쩍 확인하니 치마가 살랑이면서 체구가 작고 가녀린 몸매인 걸로 보아 여학생이 분명했다.
물론 절대 연애 목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나는 곧바로 어디서 붙은 미행인지 예측하기 시작한다.
‘일단 저 서툰 행색과 움직임으로 봐서는 스캐빈저는 아니고 길드 관련이 100퍼센트일 거고, 주변의 경비나 다른 여학생과 인사를 나누는 걸로 봐서는 아카데미아 학생이 맞는 것 같다. 그럼 이제 어디서 온 거냐는 건데…….’
가능성은 2개. 일단 하나는 청룡 길드.
보나 마나 S급 정민수를 직접 잡지 못해서 손해가 엄청 불어났을 테고, 따라서 잡은 놈을 찾기 위해서 토벌에 참여한 5개 길드의 조사에 나섰을 것이다.
‘음, 사실 내가 좀 수상해 보일 이유가 있긴 했지.’
난데없이 토벌대에 들어간 전속 스태프. 인원 부족으로 넣었다곤 하지만 귀중한 전속 스태프를 집어넣은 것은 충분히 수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미행을 붙인 것이겠지.
‘으음, 청룡 길드가 아니라면 아마 아영이 쪽을 캐기 위해서 붙은 애이려나? 그러면 신경 쓸 거 없겠지.’
흔한 아카데미아의 파벌 싸움 같은 것이리라.
기말고사도 끝났으니 곧 방학이었다. 당연하지만 아카데미아인 만큼 방학 과제가 주어지는데, 천(天) 클래스급은 협회의 인도 아래 던전 클리어가 그 과제였다.
물론 무리한 것을 강요하는 건 아니고, 자신의 각성자 등급에서 한 등급 혹은 두 등급 아래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보고서를 쓰는 것이었는데, 파티는 무조건 학생끼리라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오, 그러고 보니 이걸 화제로 삼아도 되겠군.’
아영이와의 대화에 쓰기 딱 좋은 화제가 떠올랐다고 생각한 나는 그것을 머릿속에 기억해 둔 채 아카데미아를 나오는 순간까지 따라오는 그녀가 어디까지 따라올지 두고 보기로 했다.
“아저씨! 여기예요. 빨리! 빨리!”
“재촉하지 마라. 그나저나 어디 갈 거냐?”
“어디로 갈지 정하지는 않았고요. 그냥 번화가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재미있어 보이면 멈춰서 해 보는 거죠, 뭐. 다행히 아카데미아 주변엔 번화가가 많으니까요.”
하긴 그건 사실이지.
여느 대학가 주변처럼 아카데미아 또한 주변이 번화해서 먹을거리라든가 놀 거리가 풍부하긴 했다.
특히 아카데미아 덕분에 각성자와 관련된 각종 가게도 많아서 일반인이 보기엔 신기했으니, 사람들이 모여 번화가가 생성되는 건 당연했다.
“아저씨는 보통 쉴 때 뭐 해요? 각성하기 전엔 아카데미아 직원이라서 주변에 놀러 다녔을 것 같은데……. 오늘이야 제가 데리고 다니니까 저 가고 싶은 데로 갈 테지만요.”
“별로 잘 돌아다니지 않아. 대부분 숙소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며 지냈지. 가끔 회식할 때나 나와서 고깃집이나 노래방 같은 데 간 게 전부였어.”
“와, 엄청 재미없어! 10대나 20대 때 뭐 해 볼 생각은 안 했어요? 아, 20대 때 아카데미아 직원 일을 시작하셨을 테니, 10대엔 뭐가 있겠죠?”
“시설에서 보호 관찰. 고등학교 과정까지 그냥 시설에서 보냈지. 그다음엔 성인이랍시고 내보내졌고, 군 복무 이후 아카데미아 스태프 지원해서 합격. 그걸로 끝.”
“엑…….”
“보호 관찰 전에는 그랜드마스터 사태가 났었는데, 서울 지역의 전력 공백으로 몬스터랑 던전으로 난리가 났을 때 집도, 부모도 다 잃고 어영부영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이미 거기에 있더군.”
굳이 꺼낼 필요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 철없고 텐션 높은 아가씨를 진정도 시킬 겸 확 다 까 버린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났는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변한 그녀의 높았던 텐션이 확 줄어들었다.
“으… 아… 으음… 안됐네요.”
“뭐, 이미 오래전 일이라 상관없어. 또 어차피 한 번은 이야기할 화제이기도 했으니 그냥 지금 해 버린 거야. 나중에 혼란스러운 일이 있을 때 충격받지 말라고.”
“아~ 저는 그랜드마스터 사태를 교과서로밖에 못 배웠어요. 태어나기 전 일이라 하나도 모르겠는걸요?”
당연하지. 애초에 별로 좋은 이야기가 나올 만한 사건도 아니다.
정부와 협회의 도가 지나친 갑질에 화가 난 그랜드마스터라고 하는 각성자가 공중파에 쌍욕 박으면서 자신의 길드 세력을 모조리 이끌고 해외로 탈주해 버린 사건이었다.
『씨X, X나 못해 먹겠네. 어지간히들 해야 내가 참고 일하지. X발! X같은 헬조선 탈출한다!』
“교과서에 쌍욕이 그대로 실릴 줄 몰랐다니까요. 비음 처리나 모자이크도 안 되고 생으로 실려 있어요.”
“그랜드마스터라는 호칭이 붙은 1세대 최강의 각성자였고, 잡음이 있긴 했어도 인류를 구하긴 했으니까…….”
물론 그의 탈주 여파로 인해 인생이 꼬이게 된 나였지만, 어른이 돼서 생각해 보면 그 양반이 화날 만하긴 했더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랜드마스터라고 이름이 남을 정도로 대단한 양반도 그런 꼬락서니를 보는데, 나같이 무능한 놈이 뭘 하겠는가?
물론 정부나 협회에서는 이후 많은 개선을 했다곤 하지만 결국 바뀐 건 형태뿐이고, 내용물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후퇴했지?’
이전과의 차이라면 이제 정부와 협회가 들고 있던 권력이 길드로 조금 넘어갔다는 것뿐.
그렇다고 해서 길드 놈들이 정부나 협회보다 더 나은 정책을 펼쳤냐면? 오히려 길드의 조직을 강화시켜서 더더욱 각성자를 지배하기 편한 쪽으로 나아간 것이다.
“아무튼 놀러 간다는데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해 버렸군. 게다가 너는 전혀 모르는 완전 ‘라떼는 말이야.’ 이야기라서 더더욱 재미없겠지.”
“그렇기는 한데, 아저씨가 못생기지 않아서 들어 줄 만했어요. 진지한 표정만 봐도 배가 부르거든요. 물론 못생기면 가차 없지만요!”
“그래, 다행이군.”
“참고로 엄마 취향은 저랑 비슷하니까 제 맘에 들면 엄마한테도 어필이 가능해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지만 아무튼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그렇게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던 중 각성자 전용 무기와 방어구를 파는 장비 숍 근처에 가자 그녀가 갑자기 반응을 보였다.
“아! 베오울프사에서 건틀릿 신상 나왔네? 꺄아아아! 파동 공격 추가, 버스트 모드, 조작 없이 음성으로 소모품 사용 가능하게 해 주는 수납공간. Str, Vit 스테이터스 +15 옵션! 정말 갖고 싶다아~”
“으음…….”
각성자라면 누구나 더 좋고 더 강력한 장비를 꿈꾸는 게 정상이었다.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 이상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녀를 따라 전시된 시제품을 바라보던 나는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0이 몇 개지? 으아아아, 역시 비싸구나. 각성자 장비.
“그나마 양산품이라 싼 거예요. 아, 맞아. 아저씨는 근데 뭐 입고 던전 가요? 설마 맨몸으로 가요?”
“어?”
갑자기 이렇게 내 장비에 대한 내용으로 화제가 전환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응, 전설급 아이템 끼고 있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로 구입한 장비라고는 그냥 일반형 철검이 전부인데,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에 둘러대고자 한다.
“물론 협회 세트이지. 싸고, 신뢰성 좋고, 튼튼하고, 신입 헌터가 쓸 수 있으면서 D급까지 사용 가능한 그거.”
“그거 잘못 입으면 스캐빈저에게 노림받는다고 소문났던데…….”
협회 세트. 너무 잘 만든 덕분에 가성비가 매우 좋아서 초보 헌터들이 애용하는 탓에 스캐빈저들에게 역으로 노림을 더 심하게 받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마법적인 옵션은 없지만 뛰어난 충격 흡수 능력과 세탁과 정비의 용이함 등등 여러 장비 제작 회사들에게서 소송까지 걸렸던 명품이었다.
물론 나한테는 없지만 둘러대기엔 딱 좋은 물건이다.
“무기는요?”
“무기? 그냥 일반 철검이야.”
“이제 D급 가시는데, 무기도 새로 장만해야 하지 않겠어요? D급부터는 마법으로 방어하는 적이라든가, 본격적으로 중대형 몬스터가 나오는데, 무기는 중요하다구요!”
“그, 그렇지. 조만간 구하려고 했어. 그런데 너희 어머니 돕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지. 하하하.”
제길, 이건 도저히 물러설 방안이 없었다.
아무리 내가 그녀에게 본래 능력과 다른 스테이터스로 신고해 달라고 부탁하고 감췄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아니, 나 그런 거 필요 없어.’라고 하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B급인 나도 무기가 중요하다는 걸 아는데, 이 아저씨는 대체 뭐기에 철검으로 D급 공략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지? 내 생각보다 더 센가? 얼마나 센 거지?’
그래, SS급에 이른 내 스테이터스, 거기에 전설급 방어구까지 있어서 굳이 철검에 목매지 않고 그냥 가서 맨손으로 처잡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진짜 물러서면 그녀의 의심만 키운다.
그러니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면 D급 던전을 위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대답하는 게 맞았다.
“잘됐다! 그럼 한번 보러 가요. 아이 쇼핑! 아이 쇼핑!”
‘사실 필요 없지만 어쩔 수 없지.’
(유니크)만검(萬劍)의 기사 그란델의 무재(武才) 덕분에 지금 내 ‘철검’은 보검처럼 수많은 적과 싸웠는데도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튼 그녀를 따라서 무기 숍을 올라가며 여기저기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돈이 있으시면 그래도 방어구도 D급에서 새로 맞추는 게 좋아요. D급까지 쓸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한계점이지, 항상 그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스펙은 언제나 여유를 둬야죠.”
‘힘숨찐도 쉬운 게 아니군.’
“혹시 돈 때문에 그런 거라면 무이자로 빌려 드릴게요. 사실 사 드리고 싶지만 제가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되어 있어서……. 아무튼 장비는 중요하다고요! 생명은 하나이니까요!”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이미 방어구는 있다고. 아무리 버려도 되돌아오는 망할 전설 등급이 말이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이미 그녀는 신나하면서 어디론가 날 데려가고 있었다.
“흐으으음~ 뭐부터 보는 게 좋을까?”
‘젠장…….’
어쩌면 S급 마인과 싸우는 것보다 더 큰 위기를 맞이한 게 아닐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식은땀이 흐르고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나는 우선 무기를 고른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