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개성, 스캐빈저 도시. 개성특급호텔.
“이거~ 참 그 양반, 그렇게 뒈져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S급 마인 정민수의 부관이었던 남자, 한종석은 한숨을 쉬면서 스캐빈저의 도시를 바라본다.
그나마 노예를 데리고 다니면서 조금이나마 굴러갔던 도시가 지금은 전쟁판이 되어 있었다.
스캐빈저들끼리 싸우고, 악마들이 들어오고, 이미 스캐빈저들 네트워크에 이곳의 지배자였던 정민수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지금 도시는 난리였고, 한종석도 짐을 싸는 중이었다.
“보자. 나는 어디로 갈까? 휴우~ 함흥으로 갈까? 아니면 평양으로 갈까? 남포는 절대 안 되고~ 어우, 그 기분 나쁜 노친네 이 목사랑은 어울리기도 싫어.”
“허어~ 거, 친구, 말이 좀 심하구먼. 기분 나쁘다니. 나는 그저 도살왕 님에게 충성을 다할 뿐인데~”
“히이이익!”
한창 열심히 빼돌린 귀중품들과 서류들을 챙기던 와중, 한종석의 뒤에 누군가 나타난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정장을 갖추고 안경을 썼지만 허리에 톱, 식칼, 꼬챙이 등이 달린, 도축장에서 장인들이 쓸 법한 벨트를 맨 기괴한 패션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남포에 있는 스캐빈저 도시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이 목사’라는 인물로, 정민수가 S급이 되기 전까지는 도살왕의 선택을 받은 자들 중 명실상부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A급 마인이었다.
“아무튼 자네마저도 떠날 준비를 할 정도면 정민수 그 친구가 죽은 게 확실하긴 하군. 허허허, 그런데 갈 곳을 찾는 것 같은데… 어디, 내게 올 생각은 없나? 허허허.”
“아뇨. 갈 데는 이미 있어서 말이죠.”
온갖 미친놈들이 판을 치는 곳이 스캐빈저와 마인들의 세계였지만, 이 목사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광인으로 같은 도살왕의 축복을 받은 자들끼리도 꺼리는 자였다.
그는 남포에 인간 목장을 만들어 도살왕에게 최고의 인간 미식과 제물을 바쳐 A급 마인이 된 케이스로, 실제로 한번 그곳을 본 자들은 두 번 다시 남포를 찾지 않았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할 정도였다.
‘…그걸 관리하라고? 미쳤어? 제정신인가?’
“음, 대우는 아주 잘해 줄 생각인데 말이지. 암컷들도 자유롭게 골라 먹을 수 있네. 이번에 러시아 ‘품종’을 새로이 들여와서 번식시키는 데 성공했거든. 허허허, 우리 친구들도 아주 만족하고 있지. 물론 그분도 만족하고 있고 말이야.”
“꺼지십쇼, 이 목사님. 우리도 사람 등골 빼먹는 미친 새끼들이지만 당신 정도로 미치진 않았어.”
“끄허허허헐! 이거 참 같은 도살왕 님의 가호를 받는 동지인데, 미치고 덜 미치고를 구별할 게 뭐가 있나? 뭐, 아무튼 아쉽게 되었군. 그래도 자네 정도의 인재를 그냥 죽이기는 아까우니 이걸 주겠네. 생각 있거든 나중에 이리로 돌아오게나. 내 손님이라는 징표일세.”
이 목사는 인벤토리에 손을 넣어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어 던져 준다.
찜찜하지만 그래도 이 도살왕의 영역 중 하나를 제패한 마인(魔人)이기에 그 성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을 받은 한종석은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해 본다.
‘마법 같은 느낌은 없으니 뭔가 징표나 패 같은 거려… 히이이이이익!’
내용물을 보자마자 한종석은 기겁을 하며 손에서 떨어뜨렸고, 바닥에 떨어지며 내용물이 드러난다.
그것은 아주 작은 태아의 형상을 한 조각 같은 것이었는데, 오랫동안 건조를 시킨 건지 바싹 말라 있었다.
“어이쿠, 그걸 떨어뜨리면 쓰나?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면 보지 못하는 매우 귀한 건데 말이지.”
“지, 진짜 태아입니까?”
살인과 폭력을 밥 먹듯이 하던 스캐빈저 한종석도 진짜 태아를, 그것도 이렇게 가공한 것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충격에 빠진 채 떨어진 물건과 이 목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밀려오는 혐오감에도 일단은 그의 성의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잽싸게 주워서 다시 상자에 넣은 다음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미쳤어, 저 인간은! 아니! 저건 이미 인간이 아니야. 도살왕 휘하의 악마들과 같은 자다. 빨리 떠나야!’
“쩝, 아쉽군.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친구가 같이 일을 해 줘야 ‘목장’을 만들기 편한데……. 어쩔 수 없지. 허허허.”
자신을 아까워하는 이 목사의 말을 들으면서 한종석은 바람처럼 달려서 도망친다.
이제 남포에서만이 아니라 이곳 개성에도 인간 목장이 생길 걸 안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함흥으로 목적지를 잡았다.
다시 돌아오면 분명 이곳엔 새로운 지옥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
며칠 뒤.
아카데미아 단련실.
천(天) 클래스는 길드의 주축이 될 자들로,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상당히 우대를 받았다.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는 단련실 또한 철저히 수련을 위해 밀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재 그 안에서는 수련용 도복을 입은 신아영과 유성원이 땀을 흘리면서 공수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윽! 이 아저씨, 대체 뭐지? 오늘은 영춘권?’
“왜? 뭔가 문제 있나?”
갑자기 물러선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자 유성원이 질문을 던졌다.
“이상한 게, 아저씨는 왜 맨날 다른 무술로 싸워요? 전에는 태권도, 저저번에는 무에타이였죠?”
“네가 단련이 되는 거면 충분하지 않나? 나는 트레이너이니 상관없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어떤 무술로 싸우든 결국 트레이너는 상대를 단련시켜 주는 존재. 그러니 그것만 지킨다면 뭘 해도 상관없는 위치였다.
하지만 신아영이 보기엔 이상했다.
“이상하니까 그렇죠! 하나의 무예를 단련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인데… 왜 맨날 어정쩡한 수준으로 다른 걸 하는 거예요?”
‘그야 같은 무술만 계속하면 금방 숙달되어 버려서 무슨 일이 날지 모르거든. 그 무재 스킬이 참 난감해.’
(유니크)만검(萬劍)의 기사 그란델의 무재(武才). 비단 검술만이 아닌 모든 영역의 무(武)에 반응하는 이 스킬 덕분에 유성원은 어떤 무예를 배워도 금방 숙련되고 빠르게 익혀 버릴 수 있었다.
그 성취의 속도는 보통 사람의 수만 배를 뛰어넘는 것이라서 분명 같은 무술로 반복하여 싸울 때마다 그 진척의 경지가 다르다는 걸 무술의 소양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챌 것이다.
‘특히나 성좌에게 선택받아서 격투가 클래스를 받은 거라면 더더욱 쉽게 알 수 있겠지.’
18세 사춘기 소녀의 감정이 과연 그 절대적인 벽을 느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생각해도 결코 좋은 반응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순순히 인정하고 자기는 자기대로 노력해야지 하는 반응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에게 보낼 시선은 또 다를 것이다.
‘나도 살아오면서 충분히 느껴 봤으니까…….’
10대와 20대 때, 남들보다 부족한 것에 열등감을 느껴 본 적이 있기에 유성원은 그것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조금이라도 허술해지려 트레이닝 때마다 다른 무예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정 싫으면 관둘까?”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더 진심으로 해 달란 말이에요. 전처럼 빈틈이 생기면 훅! 퍽! 쾅! 하고 막 때리라구요.”
“진심이라. 하~”
사실 진심으로 한다면 과연 그녀가 몇 수나 버틸까? 갈등이 생길 정도로 차이가 크기에 유성원은 거절한다.
게다가 귀한 몸 작살 내놓을 순 없으니 말이다.
“그건 내 방어를 뚫고 유효한 타격을 먹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얼마든지 해 주지. 전처럼 말이지.”
‘……!’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신아영은 뭔가 거대한 그림자 여럿이 유성원의 뒤에 서 있는 듯한 환영이 보이면서 위압감을 느낀다.
물론 금방 다시 원래의 적당하고 대충적인 분위기로 돌아왔지만, 딱 한순간 느낀 그 압력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자, 잠깐! 이, 일단 잠깐 쉬어요.”
“음? 그러던지. 휴우~ 나도 물이나 마셔야지.”
‘뭐였지? 방금 그건? 저 아저씨, 보통 각성자가 아닌 건 알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뒤에 보이던 그림자들의 존재감은 아직도 생생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 그것도 무시무시한 게 여럿이었다.
아무튼 당황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도 자신의 스포츠 드링크를 마시며 유성원을 관찰한다.
“가르르르륵… 퉷! 후우~ 시원하다. 읏챠.”
‘이렇게 보면 완전히 아저씨인데 말이지.’
아까 전 그 순간의 존재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슬쩍 앉았다.
지금은 그런 위험한 느낌이나 압박 없이 평소에 보이던 귀차니즘 가득한,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그것참 다행이군.”
“우리 길드, 중견에 살짝 머리카락만 걸친 곳이라서 이번 토벌에서 입은 피해가 꽤 치명적이었는데……. 덕분에 새로 C급 각성자를 구할 수 있을 것 같대요. 요새 지원서 받고 면접 보고 있어요.”
“흐음~ 잘됐네.”
백야 길드에게 돈을 건넨 것이 정답이었다고 생각한 유성원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러면 이제 한동안 안심하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 그리고 우리 엄마랑 뭐 약속했어요?”
“음? 왜?”
“엄마가 요리 학원 등록하시던데요? 풉, 각성자용 장비가 아니라 일반 복장 입고 가는 거 집에 올 때 빼고는 처음 봤어요.”
“요리… 학원? 아!”
그제야 자신이 지나가는 말로 밥 한 끼 대접해 달라고 한 게 기억났다.
사실 유성원은 큰 기대 없이 부담 가지지 말라고 대충 던진 말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그걸 이렇게 받아들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풉, 식사 대접이면 적당히 레스토랑 같은 데 가서도 할 수 있는데. 울 엄마, 의외로 귀엽죠?”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군. 아무튼 그럼 꽤 쉰 것 같으니… 이제 어쩔 거지?”
“음~ 다시 하기는 좀 그렇고… 놀러 가요!”
“그렇군. 여기까지 한다는 걸로 알겠다. 읏챠.”
유성원은 바로 일어나서 먼저 따로 가려고 했지만 신아영이 그의 도복 바지를 잡고 매달리며 반발한다.
어차피 이대로 단련을 끝낸다고 해도 따로 할 것도 없기에 심심해서 달라붙은 것이다.
“그게 아니라, 같이 놀러 가자고요!”
“그것도 업무냐?”
“그냥 놀러 가는 거죠!”
“나는 별로 놀러 가고 싶지 않은데? 친구 없니?”
“천(天) 클래스가 무슨 친구예요? 길드 간의 정치 싸움판으로 변한 지가 언젠데……. 아카데미아 직원이었던 거 맞아요?”
날카로운 반박. 그래, 이 아카데미아에 진정한 교우 관계란 지(地) 클래스, 인(人) 클래스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B급 이상의 각성자가 되어서 선택받은 자들의 그룹이다 보니, 자만심에 빠져서 상대를 존중할 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여기 신아영 같은 케이스도 있지만, 그녀 혼자서는 교우 관계를 만들 수 없기에 유성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승낙한다.
“하아~ 맞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다만 아저씨라 재미있는 건 기대하지 마라.”
“걱정 마세요. 제가 안내할 테니까요. 그럼 샤워하고 아카데미아 입구에서 봐요! 도망치지 마세요?”
“그래. 가서 기다리마.”
그렇게 둘은 단련실을 나가서 각자 샤워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그것을 보던 한 소녀가 조심스럽게 유성원이 가는 샤워실 방향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