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몇 시간 뒤.
청룡 길드 아지트 ‘인공 섬’ 길드장 사무실.
고천용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형님 고천수에게 보고서를 내밀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고천수는 이미 엉망진창인 토벌대를 보고 미리 예상은 했었지만, 보고서로 보니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해서인지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내가 널 보낸 건 이런 결과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을 텐데?”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S급 마인은 보통 놈이 아니라서 지략을 포함해 당한 피해는 그렇다 볼 수 있었네. 애초에 내 원한 때문에 전력도 빡빡하게 준비한 탓도 있었지. 하지만 그래도 ‘청룡’님이 부여한 ‘시련’을 돌파했으면 다 좋았지.”
성좌 청룡은 ‘투쟁’을 좋아하고 시련을 돌파하는 것을 더더욱 좋아한다.
특히 극적인 승리를 매우 좋아해서 S급 마인 정민수의 지략에 기습을 당하고 보스 몬스터 소환으로 큰 피해를 입었더라도 어쨌든 승리하기만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확실히 챙겨 주는 성좌였다.
“아니면 그 망할 년을 스캐빈저 손에 죽게 했든가! 하지만 결과는 어떻지?”
그래, 백야 길드의 장을 죽이기라도 했으면 실패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죄송합니다.”
모든 손해는 고스란히 청룡 길드가 부담해야 했고, 지금 시련의 실패도 모자라 목표물을 빼앗기기까지 해서 ‘투쟁’에서 패배한 걸로 돼서 청룡이 실망한 상태였다.
“뭐, 그래도 순전히 네가 잘못해서 실패한 건 아니긴 하지. S급 마인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이 정도 화력을 가진 놈이 갑자기 나타난 게 문제이겠지. 자료는 정말 이게 다인가?”
“기록 장치와 드론, 위성사진 전부 종합해서 나온 것입니다.”
“으음…….”
인간인 이상 살아가면서 실수와 실패의 시기는 무조건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것이냐? 와 그 실패를 자신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느냐? 였다.
고천수는 보고서에 나온 자료를 보면서 자신들을 방해한 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애쓴다.
“이… 황금 갑옷?”
그리고 나온 사진이 딱 한 장.
바람처럼 달려가는 사진의 잔상을 최대한 보정하고 프로그램까지 돌려서 나온 모습으로, 전신을 감싼 화려한 황금 갑옷에 망토와 검이라는 정신 나간 센스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고천수는 살짝 당황한 듯 사진을 가리키며 재차 묻는다.
“정말… 이놈이 맞는가?”
“예. 거기 바로 옆에 잔상이 하나 더 있는 걸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게 정민수입니다. 찍힌 시각도 그렇고, 그 황금 갑옷 자식밖에 의심할 대상이 없습니다.”
“이런 유치찬란한 갑옷 디자인은 올림푸스 놈인가?”
올림푸스 길드.
12성좌가 운영하는 글로벌 길드로 한국에도 지부를 두고 있는 3대 길드 세력 중 하나였다.
그 12성좌는 모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신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능력과 스킬을 주었기에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놈들은 양식이 다릅니다. 걔네는 그리스, 로마 양식으로 신체 일부를 노출시키지, 이렇게 꽁꽁 싸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서울 길드 놈도 아니죠.”
“그러면 결국 우리가 데려간 길드에서 숨기고 있던 카드 중 하나겠군. 황금 갑옷을 입은 스캐빈저나 마인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말이야. 떠돌이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건 완전 우연이고, 우리가 무엇을 할 방법이 없지.”
고천수는 곧바로 합리적인 근거에 따른 가능성을 제시했고 금방 진실에 접근한다.
이번 토벌에 자신들이 동원한 5개의 길드 중 한 곳에서 숨기고 있던 비장의 카드라는 가설이지만 거의 사실이라고 생각 중이었다.
“참여한 길드는 블레이드 엑셀리온, 극천대, 불굴, 페이션트 어벤저, 백야 이렇게 다섯 곳인데……. 그 황금 갑옷을 입은 기사 계열 클래스가 있을 만한 곳은? 불굴과 블레이드 엑셀리온 딱 이 두 곳이군. 하지만 그렇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 아무튼 놈을 찾아내야 한다. 굴욕도 굴욕이지만, 11번째 S급 헌터를 이대로 감추게 놔둘 수는 없지.”
“찾아내서 제안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어도 드러내서 공식화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거군요.”
이번 같은 예상치 못한 경우를 또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 황금 갑옷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안 그러면 다음 토벌 동원 때나 아니면 길드 간의 분쟁이 있을 시에 중견 다섯 길드를 배제하거나 혹은 눈치를 봐야 해서 골치가 아파지고, 나중에 어떤 역학 관계의 변화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아무튼 수고했고, 사망자들에 대한 보상금 및 일의 정리를 끝낸 뒤에 당분간 쉬어라. 이 일은 다른 쪽에 맡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상당한 손해를 입긴 했지만 그래도 3대 길드의 정점인 청룡이었다. 이 정도에 굴하지 않았고 또 S급을 비롯한 고위 각성자들은 여전히 살아남았기에 기분 나쁜 정도로만 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고천용이 나가자 고천수는 좀 더 심화된 조사를 할 친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연락처를 꺼낸다.
***
몇 시간 뒤.
아카데미아 전속 스태프 숙소.
“하아아암~ 잘 잤다. 몇 시지? 으음, 벌써 저녁때인가? 아이고! 깜짝이야.”
어제 새벽, 마인의 기습으로 인해 벌어진 난리를 정리하고 돌아온 나는 곧바로 휴식을 취한 뒤 저녁 늦게나 되어서야 눈을 떴다.
일단 일어나자마자 보인 것은 아칼론과 가울프, 섬멸로 다들 예를 갖춘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갑자기?”
[성토할 조언이 있사옵니다, 마스터. 이미 5인 체제로 구축된 기사단이 완성되었음에도 홀로 전투를 하신 것은 무슨 생각이십니까?]
[계약에 관한 이야기다. 계약자여, 혼자만 재미 보면 좋느냐?]
“왜 전투 때 저희를 부르지 않으신 겁니까? 신뢰할 수 없는 겁니까? 참고로 크록베인 경도 큰 놈과 싸우고 싶었다고 성토 중입니다.”
아니, 그냥 내가 상대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위장하고 있었으니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안 부른 건데, 왜들 이런대?
으음, 그러니까 이 녀석들이 보기엔 멀쩡히 기사단을 두고 있는 대장이 자신들을 부르지 않고 혼자 싸우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건가?
아무튼 이 녀석들에게 맞는 대답을 해 줄 필요는 있었다.
“그 녀석은 나를 노리는 자였다. 그렇기에 나에게 내려진 시련이지. 비겁한 기습으로 나에게 공격을 해 온 적은 하나! 나 또한 하나! 군대끼리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나에게 걸어온 도전을 다수의 힘으로 짓밟아야겠는가?”
[마스터의 답변, 이해 완료.]
[흐으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음엔 혼자만 재미 보지 말라고~]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 그러고 보니 전쟁터 속에서도 오직 숙적을 기다리셨던 거군요.”
아무튼 이놈들, 종족도 성향도 가지각색이지만 기사도라는 질병에 걸린 놈들이라 그런지 다들 내 답변에 만족한 것 같았다.
단순한 건지 아니면 그냥 정신줄 놓은 건지, 어쨌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저녁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며 휴대폰의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우주최강아영이:아저씨! 고맙습니다! 엄마에게 들었어요. 전쟁 중에도 스캐빈저들을 잡아서 얻은 마정석이랑 귀금속을 그냥 주셨다면서요.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거 못할 텐데!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게 돼서 정말 다행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엄마랑 이야기해서 사례 꼭 해 드릴게요. 아! 그리고 내일 대련할 거니 잊지 마세요!」
“으음, 호감은 산 것 같군.”
「우주최강아영이:그리고 엄마가 아저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표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이대로 아빠가 되는 날까지 파이팅!」
기껏해야 돈으로 그냥 호감을 좀 산 것뿐인데 오버가 심하군.
게다가 어린 나이도 아니고, 이미 세상사에 대해 대충 볼 거 다 보고 느낄 거 다 느낀 만큼 정열적인 사랑의 감정 같은 게 쉽게 생길 리도 없었다.
‘물론 나는 좋긴 한데… 으음, 그렇다고 너무 막 들이댈 순 없지.’
상대는 이미 딸아이까지 있는 분이니, 자칫하면 미움받을 수도 있다.
사실은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하는 관계가 되고 싶은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조급하지는 않았다.
잘 풀리면 좋고, 아니면 뭐 포기하는 거고?
“에휴, 이게 무슨 청승이냐. 저녁이나 먹자. 그리고 그다음엔… 심심한 우리 기사들 데리고 던전이나 가야겠다. 아칼론, 저녁 혹시 만들어 놨어?”
[명예로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원하시는 음식을 리퀘스트 받으려고 합니다.]
“어. 그래? 그럼 피자 되나? 아, 이 집에 오븐 없나? 나중에 하나 살까?”
[제 내부에 오븐 조리 시스템이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너 이쯤 되면 기사가 아니라 메이드 로봇 아니냐?”
너무 다재다능한 거 아냐? 대체 그 몸에 어떻게 그 많은 기능이 들어가 있는지 이젠 의아할 지경이다.
이 녀석, 분명 전투용 맞지? 분명 같이 싸울 땐 검을 휘두르면서 싸운 놈이었는데?
아무튼 녀석은 내 요청에 따라서 능숙하게 부엌에서 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어제 살펴보지 못한 전리품을 확인한다.
“어제 너무 바빠서 제대로 확인 못했지.”
장비류와 정민수의 개인 소지품을 하나둘 꺼내 놓은 나는 그것들의 옵션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S급 마인이 가진 물건이라서 그런지 보통 정보가 아닌 것들이 있을 걸로 추측된 나는 우선 그의 수첩을 읽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웬 수첩인가 싶었지만, 인벤토리에 넣어 둔 덕분에 해킹 같은 전자전으로 빼앗길 걱정이 없기에 거물급 스캐빈저들은 이걸 더 선호한다고 한다.
“어우, 이게 다 뭐야?”
“왜 그러십니까? 단장님.”
“기가 막힌 내용들뿐이라서…….”
수첩의 내용을 읽기 시작한 나는 심연의 문을 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스캐빈저나 마인이 고위층이나 길드와 비밀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는 건 잘 알았지만, 그걸 직접 보니 혼란이 가득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열어 보지 말걸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찝찝하고 더러운 것들이었다.
“이거는 뭐, 엮이지 않은 데가 없네? 이쯤 되면 인류의 적이 아니라 동업자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지당한 감상을 내뱉으며 나는 계속해서 수첩 속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안에는 도살왕 영역에 사는 다른 스캐빈저의 도시에 대한 자료들도 있었다.
썩어도 일단 도시라서 그런지, 건물들이 있어서인지 놈들은 북한의 대도시 몇몇 곳에 영역을 만들어서 살고 있다는 내용과 도살왕의 아바타(化神) 및 던전에 대한 것도 있었다.
<평양 도시에서 식량 대금으로 C급 마정석 400개 받음.>
<백두산 목장에서 마수 고기 거래 성사 완료.>
<함흥에서 일본 각성자 협회와 거래 중…….>
“와, 무슨 막장 같은 건 줄 알았는데…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게 참 기가 막히네.”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치는 것이나 정부에서 하는 이야기로는 도살왕의 영역은 아비규환에 지옥이고, 미친 마물과 악마로 가득하다고 했지만 실제는 약간 달랐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포칼립스의 풍경이었지만, 실제로는 아포칼립스 이후 막장인 인류 사회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 같았다.
“별… 차이는 없나? 이건 뭐야?”
<도살왕의 사도 ‘이 목사’의 남포에서 ‘인간 목장 설립’ 설명회. 꼭 참석. 근데 가기 귀찮다.>
<‘이 목사’ 인간 목장 품종 개량용으로 노예 100명 구해 달라고 의뢰. 그리고…….>
탁!
‘인간 목장’이라는, 현실에서 쓰이지 않는 기괴한 단어 조합에 싸늘한 느낌이 목 뒤에서부터 타고 올라왔고, 나는 그 불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수첩을 닫아 버린다.
창작물이나 만화 같은 데서 보는 것과 달리 이건 실제였기에 상상이 되기 시작하니 더 이상 내 신경이 이걸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미친 거지? 이 세상은? 아니, 원래 미쳐 있던 거겠지.’
나는 바로 수첩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진실이었기에 잊고자 노력했다.
[마스터, 피자가 다 구워졌습니다. 파인애플과 베이컨을 듬뿍 올려서 구웠기에 매우 맛이 있을 겁니다. 왜 그러시는지요? 혹시 파인애플 피자는 싫어하시는지요?]
“민트초코만 아니면 괜찮아. 일단 먹자. 그나저나 너 몸에서 구웠냐? 치즈 냄새 같은 건 어떻게 하려고? 하하핫.”
다행히 때마침 아칼론이 식사 준비를 완료했다는 소식에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일부러 밝게 행동하며 부엌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엔 ‘이 목사’라는 자의 이름과 ‘인간 목장’이라는 단어가 한구석에 남아서 잊히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