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멀쩡한 남자라서 놀랍군요. 아영이를 현혹하고 거기에 기생하려는 자일 줄 알았는데…….”
“엄마! 내가 말했잖아. 이상한 인간 아니라고…….”
“넌 입 다물고 있으렴. 하지만 서류와 달라 보이는 게 많군요.”
음, 아름다운 여왕님의 시선을 받는 건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나에 대해서 간파해 보려는 눈빛이라 신경은 쓰였다.
거기에 이미 내 상태창에서는 자신에게 오는 마력이 감지된다는 경고문까지 뜨고 있었으니, 그녀의 의도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심판의 눈’이 당신을 꿰뚫어 보려 했으나 ‘신성에 물든 가죽’ 스킬로 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신성에 물든 가죽:신성의 가호를 받은 가죽은 각종 마법에 저항할 힘을 얻습니다.]
‘아이템 옵션 덕분에 막혔나 보군.’
“먼저 업무 내용이 대련이던데, 딱히 무술 자격증이나 교육 과정을 밟은 이력이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죠? 트레이너 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속 스태프로서 아영이에게 어떤 것으로 기여하시는지?”
‘시작부터 세게 나오는군.’
물론 이 일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저기 아영이가 한 거지만, 아무튼 서류와 이력의 갭을 안 메운 탓이라서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바로 물어볼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솔직히 기여하는 거 별로 없습니다.”
“아, 아저씨! 자, 잠깐만, 엄마! 기다려 봐. 이 아저씨, 그냥 쓸 만하… 읍읍!”
“조용히 있으렴.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는 중이란다.”
탁!
여왕님이 손가락을 튕기자 새하얀 빛의 끈이 나타나 아영이를 휘감아서 미라처럼 만들어 버린다.
그녀는 꿈틀대면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하지만 아무래도 무리 같았다.
이제야 방해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에 그녀는 긴 손톱으로 날 가리키며 다시금 묻는다.
“흐음~ 그런 주제에 달라붙어 있는 걸 보면 역시 허튼 목적이 있다고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계약은 따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요. 밑바닥에 있는 저로서는 급여 2배에 근무 시간 3분의 1이라는 유혹은 떨치기 힘들었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돈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락했다?”
“저처럼 밑바닥 인생이면 돈에 상당히 민감해서 말이죠. 자존심, 허영, 어린아이에게 의존한다는 비참함 등등… 다 팔아 치울 수 있습니다. 통장에 찍히는 돈은 정직하거든요.”
“흐음~ 말은 그럴싸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수상하군요. 남자라는 생물은 때로는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자들이 많으니까요.”
이거 완전히 대놓고 의심하고 있군.
하긴 부모 마음도 마음이고, 거기에 여자의 감이라는 것까지 있으니 거의 확정적으로 내가 딸을 노리는 늑대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혹만 무난하게 넘기면 대화는 평온하게 진행되거나 혹은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집착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으음~ 그렇게 보이실 수 있겠지만, 저는 어린아이보다는 성숙하고 품위와 지혜를 겸비한 쪽이 훨씬 좋습니다. 가령 어머님처럼 말이죠.”
“으읍?”
“…무, 무슨!”
됐다. 이 정도 의표는 찔러야지 딸에 대한 의혹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말이 아니라 장수를 노리는 전략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미친 소리였지만, 사실 저 아영이보다는 어머니 쪽인 여왕님이 내 취향에 맞기도 했다.
‘아무튼 14살 차이 나는 아이를 노린다는 의혹에서는 완벽하게 벗어나겠지.’
“…이… 이익!”
‘다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만 말이야.’
좋은 수였지만 반대로 악수(惡手)이기도 했다.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유부녀에게 호감을 표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까 전까지 냉철하고 날카로웠던 분이 얼굴이 붉어진 채 부르르 떠는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이제 분노의 파도가 몰려올 시간이다.
‘미쳤군요. 이거 먹고 떨어지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음~ 예상되는 건 이 정도이려나? 아플 각오도 해야겠지?’
한국식 막장 드라마에서 많이 본 광경이 떠오른다.
물싸다구에서부터 김치싸다구까지, 갖가지 싸다구가 다 나왔는데, 저분은 아마 마법사일 테니 나에게 마법으로 싸다구를 갈길 것 같았다.
음, 그렇지만 저 미모라면 그것도 나름 포상(?)이 될 것 같기에 난 나름의 각오를 다진다.
‘이제 다시 단독 헌터로 돌아가야겠군. 아카데미아 밖에 원룸이라도 잡을까? 아니면 던전과 가까운 북쪽 지역에 싼 방을 잡는 것도…….’
“과, 과연 그런 거라면 납득이 가는군요. 확실히 어린아이에게 욕정을 가지는 것보다 훨씬 멀쩡한 취미이고 말이죠.”
‘엥?’
“좋습니다. 우리 아영이의 전속 스태프 건은 허락하죠. 대신 받는 돈만큼의 성과를 보여 주길 바랍니다.”
이게 먹힌다고? 여왕님? 아니, 어머님? 미쳤습니까?
그걸로 왜 납득하시는 건데요?
지금쯤 지팡이나 마법으로 제 싸다구를 갈기시고 성내시는 게 정석 막장(?) 스토리거든요?
“원래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이란 다 그런 것이기에 지금까지의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전 이만,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내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어머님은 처음의 날 선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얼굴을 붉힌 채 도망치듯 신전을 떠나 버린다.
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아직도 내 혼란은 풀리지 않았다.
그사이 마법이 풀린 건지 엎어져 있던 아영이가 일어나서 내게 다가온다.
“와, 아저씨, 뭐예요? 미쳤어요?”
“그래! 바로 이 반응이야. 이게 정상이지!”
내가 기대하던 반응이 아영이 쪽에서 나오자 역으로 반가웠다.
저 여왕님 쪽이 이상한 거라고! 그래, 이렇게 화내는 게 정상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건데요?”
“무슨 생각이긴. 한 대 맞는 걸로 깔끔하게 이 상황을 넘길 생각이었지.”
“우리 엄마 꼬시는 게요?”
꼬시다니. 호감은 가지고 있지만 난 추호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역으로 약간 변태이긴 하지만 어린아이를 꼬셔서 이득을 챙기려는 쓰레기라는 의혹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는가?
“안 꼬셨어. 대신 14살 차이 나는 아이에게 손대는 로리콘 의혹에서는 벗어났잖아.”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그렇게 볼을 빵빵하게 불리면서 말해 봐야 설득력이 하나도 없단다.
아니면 적어도 발육이라도 나이를 초월해 보든가? 물론 어머님 쪽이 저 정도로 우월하니까 아마 얘도 장래성은 있을 것이다.
직접 말하면 성희롱이니까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14살 차이면 내 쪽에선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거든? 그나저나 너희 아버님은 참 좋겠군. 어머님이 저리 아름다우시니 말이지. 아무튼 너희 가정엔 피해 안 끼칠 거니까 걱정…….”
“우리 집, 아빠 없어요.”
“어?”
순간 충격적인 말에 뇌 정지가 오는 나였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충격을 받는 거지? 내 충격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아영이는 설명을 이어 나간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없었어요.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아주 날을 세우고 입 다물라고 해서 진작 포기했어요. 난 그거 알고 아저씨가 엄마한테 그런 소리 한 줄 알았는데요?”
“어, 아, 아니, 난 몰랐지. 너희 가족이 같은 길드라는 것도 방금 알았는데?”
“그럼 모르고 그랬다는 거예요? 진짜 정신 나갔어요? 아니면 젊을 때 제비였어요?”
제바라니! 나 그런 사람 아니야.
일하고 나면 맨날 숙소에서 뒹굴거리던 인간이었는데 무슨 제비 짓을 하겠는가!
그냥 얻어걸린 거 가지고 이렇게 추궁하니 억울할 따름이다.
“지금도 젊거든? 게다가 20대 청춘 시절을 모조리 아카데미아에서 바둥거린 것뿐이거든! 서른둘도 젊은 거야!”
“그래 봐야 아저씨잖아요! 예비군 끝났잖아요! 민방위 가잖아요!”
비, 비겁하다! 의표를 찌르다니!
확실히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다녀온 다음 아카데미아에 취직한 덕분에 예비군은 끝났지만!
“근데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카데미아에서 그런 것도 알려 주냐?”
“길드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 들은 거죠!”
“각성자는 면제인데 무슨?”
각성자는 군역에서 면제다.
이유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몬스터와 싸워야 할 자들의 기량을 닦을 시간을 빼앗을 필요는 없다는, 사회적 이해에 따라서였다.
단, 각성자임에도 헌터 일, 혹은 헌터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나 부여된다.
“난 전속 스태프라 포함되지 않나?”
“아뇨. E급 이하는 국방의 의무도 다 해요. E급 수준은 프로 운동선수 레벨이라고 해서 그들과의 형평성을 위해서래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승급 안 하면 민방위 또 가야 돼요.”
“아~ 민방위면 갈 만해. 예비군 끝나서 오히려 다행이군.”
무리해서 등급 올리려다가 괜히 협회에 들키는 것보다는 그냥 민방위 하루 가서 한숨 자고 오는 게 100배는 편하다.
아무튼 폭풍 같은 전속 스태프의 추궁도 결국 좋게 끝났으니, 이제 마음 놓고 보고서를 쓴 뒤 다시 던전에 가든 쉬든 하면 될 것이리라.
“흐음~ 아빠인가? 으음~ 그거 나쁘지 않네.”
“너 지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아뇨. 이것도 의외로 좋을 것 같아서요, 아빠씨.”
“이상한 빌드업 하지 마라. 애초에 너희 어머니 생각은 안 하니?”
까놓고 말해서 얘 어머님이 완전 내 취향인 건 맞다.
성숙미 넘치는 아름답고 냉철한 카리스마에 지적인 모습, 대화에서 피로가 느껴지는 얘랑 다르게 이야기가 술술 넘어가는 게 보이지 않았던가?
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당사자의 의사를 생각하지 않는 건 매너 위반이었다.
“그렇지만 엄마가 저런 반응 보인 남자는 아저씨가 처음인걸요? 우리 엄마, A급 헌터라서 웬만한 남자 연예인이나 길드장급들이 수작 부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저러진 않았거든요.”
“…헛소리 그만하고. 보고서 내고 쉬러 갈 거야.”
뒤에서 ‘네! 다녀오세요. 아버님!’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난 사뿐히 무시한 채 보고서 작성을 끝낸 다음 백야 길드를 빠져나온다.
목숨이나 내 정체에 대한 위협은 하나도 없었는데 뭔가 지쳐 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숙소로 돌아와 오늘은 이대로 쉬기로 했다.
***
같은 시각.
협회, 긴급회의 사무실.
유성원과 딸의 관계에 대한 의혹을 해결하고 돌아온 백야 길드장 신소미는 중요한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협회의 긴급 호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길드장들이 모두 참석한 채로 거대한 화면에 띄워지는 상황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은 현재 피가 튀겨서 붉게 변한 채로, 한 남성이 긴박한 목소리로 노이즈와 함께 힘겹게 말하는 광경이 나오고 있었다.
『치지직… 크헉! 보고… 합니다. 정찰대는 전멸. 하나 성과는 있었습니다. 치지직… 예, 정정합니다. A+급 마인으로 추정 되었던 정민수는… 치지직… S급 마인…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화면의 인물이 바뀐다.
원래 보고하던 청룡 길드의 대원은 사라지고 거기엔 S급 마인으로 정정이 된 정민수가 광기 어린 미소를 띤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봐! 제물 보내 줘서 땡큐! 쌩큐!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치지직! 덕분에 우리 성좌님에게 더욱 잘 보이게 되었어! 정말 고맙수다! 청룡 길드 여러분에게 후원 리액션 한번 오지게 가겠습니다. 룰루랄라~ 쿠쿠루쿠쿡! 쿠하하하하하하! 아드님도 맛있게 먹었는데! 이거 참 후식까지 챙겨 주시니 감사의 마음이 샘솟네.』
정민수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회의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다른 길드장들은 어쩔 줄 모르고 이미 분노로 눈에 핏발이 선 고천수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