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놈은 그냥 내버려 두게.”
“예? 하지만…….”
“설사 그놈이 꾸몄다고는 해도 약한 놈의 잔꾀에 넘어가서 죽은 내 아들놈이 멍청한 거지. 다른 3대 길드에 알려지면 무슨 소리를 듣겠나? 차라리 마인(魔人)과 싸우다 명예롭게 죽은 거라고 하게.”
고천수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던 고성준의 아버지이자 길드장답게 냉정한 선택을 한다.
길드의 명예와 아들의 명예를 위해 하찮은 헌터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걸 택한 것이다.
“게다가 방금 청룡 님께서 그 A+급 마인(魔人)을 토벌하라는 시련을 내리셨네. 다른 것보다 이게 우선일 수밖에 없지. 그깟 잡초만도 못한 놈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A+급 마인 토벌 준비를 시작하지. 지금 가용할 수 있는 B급, A급 헌터 리스트부터 뽑아 주게. 그리고 놈의 행적을…….”
게다가 길드의 성좌인 청룡은 투쟁을 모토로 삼는 성격 탓에 곧바로 이에 관한 시련까지 내린 판국이었다.
청룡 길드로서는 하찮은 밑바닥 헌터에게 여력을 낭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드장의 명에 의해 이 자리는 A+급 도살왕의 마인 정민수 토벌에 대한 회의로 들어간다.
***
같은 시각, E급 던전 내부.
“하아… 하아…….”
한 달간 단련하고, 레벨까지 30에 가까워져서 스테이터스도 압도적으로 올랐는데, 어째서 단련만 하면 이 모양인지.
역시 실전은 달랐다. 싸움이란 일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게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몸이 무거워짐을 느끼면서 나는 힘겹게 일어나 내 앞에 선 거대한 용인 기사를 바라보았다.
“여, 역시 내 선택은 옳았네. 하아~ 하아~ 난 역시 허접이었어. 하아~”
[주인… 그래도… 많이 늘었다… 크록베인… 칭찬한다.]
“그래, 고맙다. 일단 좀 쉴게.”
[수분 보충을 제안합니다, 마스터.]
잠시 쉬기 위해 그대로 땅에 주저앉자 옆에서 아칼론이 차갑게 식은 스포츠 음료를 건넨다.
어느덧 한 달 넘게 하루에 던전 하나를 클리어하면서 내부에서 기사들과 단련하며 기량을 키우는 중이었다.
“그래도 실력이 엄청 빨리 늘고 계신 겁니다.”
[긍정. 마스터의 전투 숙련도는 나날이 진보하고 있다. 전투 시간은 길어지고 있으며 크록베인 경의 비늘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
[인정… 한다.]
크록베인, 아칼론, 섬멸 모두 한마디씩 칭찬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칭찬만 받는 건 생전 처음이라 뭔가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빈 음료수 병을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 벌떡 일어선다.
“읏챠, 뭐~ 받은 스킬 덕분이지. 휴우~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돌아가서 인강도 봐야 하니까~ 섬멸, 보스처리하고 와 줘. 아칼론은 나 스트레칭 도와주고…….”
“알겠습니다.”
“빠르게 처리하지요.”
힘들게 단련한 뒤에 몸을 푸는 건 더 중요한 일이었다.
슬슬 던전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이니 보스 몬스터 처리를 그들에게 맡긴다.
이런 식으로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는 매일매일 던전을 돌면서 단련과 공부, 일요일만 오직 쉬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단련을 했으면 밤에 곯아떨어지는 게 정상이었지만, 전설 등급 갑주를 비롯해 아칼론의 식단 관리와 스테이터스 덕분에 체력이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덕분에 시간을 100퍼센트 활용할 수 있으니 대박이지. 아, 그런데 학습 능력에 관한 스킬이 없으니 배우는 건 생각보다 효율이 떨어지네. 이것만큼은 원래 두뇌이니…….’
그나마 9년간 아카데미아에서 일하며 보고 들은 것 덕분에 배우는 진도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또한 각성자의 스킬이나 능력에 관해선 게임 비슷한 느낌도 있어서 한층 더 도움이 되었다.
소싯적 게임을 즐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부한다는 느낌이 적은 게 가장 큰 메리트였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하아~ 인간이란 적응하기 마련이구나.”
각성자가 되고서 혼란도 많았지만, 한 달 정도 평온히 지내니 이젠 적응한 느낌이다.
E급 던전 수익도 헌터치고는 적었지만 전속 스태프 월급보다는 많아서 나쁘지 않았고, 집안일과 던전을 도와주는 기사들 덕분에 생활도 많이 편해졌다.
SSS급 특성의 혜택을 톡톡히 보면서 아주 순조로웠다.
“이제 진짜 헌터로 거듭난 느낌이네. 아직 멀었지만…….”
“아뇨. 단장님의 기량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상승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해 주니 좋긴 하네. 자, 던전을 나가자. 다 쓸어버려!”
그리고 오늘의 단련을 마친 나는 다른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알다시피 E급 던전들로는 막을 수 없는 압도적 전력으로 던전 안의 악마들을 분쇄해 나간다.
[크오오오오오오!]
[크록베인 경, 포메이션을 유지해 주십시오.]
“큭! 크록베인 경! 혼자 명예를 다 차지하려는 건가!”
“…….”
그중에서도 용인 기사 크록베인은 거의 전차가 돌진하듯 부검을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다진 고기로 만들고 있었다.
기사라기엔 너무나 야만적인 전투를 하고 있었지만, 뒤에다가 단검을 날리려는 악마를 쳐부수고, 화살을 날리는 살점 약탈자를 몸으로 가려 동료의 방패가 되어 주는 모습은 그냥 야만적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흐흐흐, 고기가 스스로 찾아… 어?]
[너… 죽는다.]
콰직!
보스 몬스터는 우리가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크록베인의 부검에 이미 피떡이 되어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만큼 보상은 없었고, 레벨은 어느새 28에 도달했다.
[Lv.28 유성원]
스테이터스 성장치:21/21/21/21
Str:1,190 Dex:1,188 Vit:1,190 Mag:1,176
[보유 스킬]
위대한 기사의 길(SSS)
(유니크)만검(萬劍)의 기사 그란델의 무재(武才)
(유니크)정령 기사 ‘실레이온 포레스트 블레이드’의 비전
(유니크)KMG TECH Master Device
(전설)흔적만 남은 기사단의 성소 차원문
[적용되는 효과]
신수의 힘(모든 스테이터스 1랭크(2배) 상승)
“이젠 놀랍지도 않다.”
어느덧 네 자리에 도달한 스테이터스를 보면서 쓴웃음만 나온다.
이 정도 성장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제는 도가 지나친 느낌이다.
이게 28레벨? 제정신인가? 협회에서 알면 진짜 그냥 난리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3대 길드의 치열한 영입 전쟁이 시작될 만한 능력치인 것이다.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군. 게다가 강해지는 건 좋은 일이지. 보자… 뭐 연락 온 건 없나?”
우우웅! 우우웅!
인벤토리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쌓여 있는 문자와 부재중 통화 내역들이 미칠 듯이 뜨며 진동한다.
던전을 도는 중에는 연락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만큼 당연한 일처럼 여기며 메시지를 확인하던 찰나, 나는 아영이의 연락을 받는다.
「우주최강아영이:던전 도시는 중이죠? 끝나시면 바로 연락 좀 해 주시고, 곧장 저희 길드 본사 쪽으로 와 주세요.」
“이건 또 무슨 뜻이려나?”
뭔가 사건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동안 대련도 스무스하게 잘해 놓고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했지만 그렇다고 오라는 걸 안 가기도 그러니 바로 움직여야만 했다.
‘뭘 할 생각인지…….’
「유성원:무슨 일입니까? 일단 지금 던전에서 나와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우주최강아영이:우리 엄마가 알아챘어요!」
「유성원:그게 무슨 문제가?」
「우주최강아영이:사실 아저씨 고용한 거 엄마한테 비밀로 했거든요.」
「유성원:부모님 돈을 쓴 건가?」
「우주최강아영이:아뇨. 돈은 제 걸 썼죠. 당연히!」
하긴 B급 각성자면 나라에서 지원금도 듬뿍듬뿍 줄 거고, 아카데미아에선 품위 유지비라고 또 듬뿍 돈을 줄 것이고, 거기에 백야 길드 지부를 운영하고 있으니 거기서 또 급여가 나올 것이다.
그러면 돈에 대한 문제나 충돌이 전혀 없는데 어째서 부모와 다툴 이유가 생길까? 그저 전속 스태프를 고용했는데 말이다.
“그럼 뭐가 문제지?”
아무리 생각해도 예상이 안 되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백야 길드의 주소를 찾아 본사로 직행했다.
백야 길드의 본거지는 전에 보았던 신전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부지에 그리스 신전 같은 외양을 한 신전들 여럿이 서 있는 모습으로, 안에는 백야 길드의 유니폼이나 중세 갑옷 같은 것을 입은 각성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기가 안내 데스크인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신아영 아가씨의 호출로 왔습니다. 전속 스태프 유성원입니다.”
“아! 오셨군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접수처로 보이는 곳에 가서 곧장 길드 카드를 내밀고 접수원의 안내를 받아서 여러 신전 건물 중 하나로 향한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는 뭔가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 오셨어요?”
“이건… 그러니까… 음, 대강 알았어.”
일단 아영이는 지금 옥좌 앞에 무릎 꿇은 상태였고, 앞의 옥좌에는 여왕님이 앉아 있었다.
흑발에 금안, 살결이 보일 듯한 아슬아슬한 하얀 드레스에 거대한 지팡이 형태의 왕홀을 들고, 머리엔 금색 티아라를 낀 성숙한 여성.
다리를 꼰 채 오만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표현할 만한 단어는 딱 하나, 여왕뿐이리라.
더 파악할 거 없이 나는 알아서 아영이의 살짝 뒤로 가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딱 봐도 높으신 분에게는 눈치껏 굽혀야 하는 법이지.’
“흐음~ 보아하니 예의를 아는 자 같군요.”
“송구스럽습니다.”
“후후훗, 좋습니다. 일단 우리 딸아이보다는 말이 통할 것 같으니 그쪽과 이야기하면 되겠군요.”
‘딸아이?’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옆에 있는 아영이와 앞에 앉아 계신 여왕님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흑발에 금안이라는 것을 빼면 분위기는 천지 차이였는데, 자세히 보고 있으니 언뜻 닮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러면 이제야 불러진 이유가 빠르게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귀한 따님이 갑자기 30대 외간 남자를 단독 전속 스태프로 임명했으니 불안해할 만하지! 잠깐?’
그러면 고성준 그놈은 엄연히 가족끼리 운영하는 길드의 애를 빼내려고 했던 건가?
3대 길드의 오만함은 내 생각보다 더 심하다는 걸 다시금 느끼는 사이, 옥좌에 앉아 있는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히고 있었다.
음, 도저히 딸 가진 어머님이라고는 생각이 안 될 정도로 젊으시네.
연령에 대해서는 성좌의 축복으로 노화를 억제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속단해서는 안 된다.
“흐음, 생각보다…….”
내가 생각하는 사이 어머님의 입이 열렸고, 나는 정신을 다시 부여잡고 그녀의 말에 집중한다.
이렇게 전용 방이 있고 옥좌까지 있으면 빼박 백야 길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