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PC 라불리었다-202화 (202/215)

202

“후우…”

지친 한숨.

몸보다는 마음이 지쳤다.

말하자면 정신력이 모두 고갈되는 느낌.

알파에겐 간략하게 문자로 상황이 모두 정리되었음을 알렸다.

지금 그를 만난다면?

분명 알파는 어디부터 알고 있었으며 또 무엇을 알고 있는지 캐물어야만 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빨리 로그인 하고 싶다.”

지금 그에게 로그인은 일종의 도피였다.

“후우…”

하지만 그랑대륙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 역시 알고 있다.

그곳 역시 지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를 둘러싼 진실들. 타르칸의 의지와 선택에는 관계없이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확정되어 있던 운명들.

자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다가 강해지고 나자 그를 찾고 그의 도움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

지친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 숨고 싶다.

“강해져도 별 것 없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던 어린소년은 이제 양쪽세계를 통틀어도 적수를 찾기 힘든 강자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왜 그의 마음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공허한 것일까.

“시작한 일은 끝을 내야 하겠지.”

서버를 처단하여 양쪽 세계의 연결을 끊는 일.

그러면서도 양쪽 세계에 힘의 공급로를 회복시키는 것.

“빌어먹을.”

악다문 이 사이로 욕지기가 치민다.

어쩌면 그가 자신이 할 일. 사명이라고 믿고 있는 것 역시 누군가의 의지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

“타르칸. 무슨 일 있어?”

“일이야 많지.”

고개를 가로젓는 타르칸의 표정이 너무 무거웠기에 하동연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정말 사도들이 협조를 해 줄까?”

“괜찮아. 약속을 안 지키면 그때 죽이면 그뿐이야. 지속적으로 동태만 파악하고 있으면 돼.”

알파는 여전히 타르칸이 자신들과 같은 목적, 아둔한 전능자의 두 번째 계획에 동참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모든 인간들을 그랑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접속캡슐에서 로그인 상태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캐릭터 상태로 그랑에 계속 살아있는 건가.’

타르칸은 그랑대륙 어딘가에는 실제의 육체가 죽어 로그아웃하지 못하는 플레이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렇지만… 알잖아. 지금 스네이크의 도움을 받는 입장인 거.”

세계적인 헌터 협회를 만드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각국의 정부들을 향한 스네이크의 영향력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기존의 각성자들이야 시스템이 정비된다는데 반대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하동연을 비롯한 전 세계 상위 랭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소식에 내심 쌍수를 들고 반기는 입장.

강한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오히려 잘 된 거야.”

“잘 되다니?”

“스네이크나 사도들. 양쪽 다 그저 순순히 이용당할 녀석들이 아니야.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그러니까 오히려 둘 모두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서로를 견제하도록 한다. 뭐 그런 거지.”

“싸움을 붙여라?”

“싸움은 이미 붙었고. 넌 어떻게 하면 그 둘을 현명하게 이용할지를 앞으로 고민해야겠지.”

말을 마친 타르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슐트가 구해온 요트를 챙기려는 것이다.

“난 올트리아 대륙으로 갈 거야.”

“응? 올트리아? 거긴 아직 업데이트가 안 된 지역… 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하동연이 급히 입을 닫았다.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현실의 일종이란 것을 알아도 이렇게 무심결에 게임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슥 타르칸의 눈치를 본다.

“간다. 한동안 못 올지도 몰라.”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며 하동연의 사무실을 나섰다.

“사도들은 몬스터에 관해서는 나보다 더 해박한 녀석들이야. 분명 헌터부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적어도 9단계 게이트가 열리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럴 것이다.

9단계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한다면?

“그때까지 인간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타르칸은 사도들이 힘을 축적하는 이유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예상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은 이미 멸종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현재 전 세계에 열리는 게이트는 평균 3 등급.

아직은 1등급 게이트와 2등급 게이트도 심심치 않게 열리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문명은 이렇게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알파. 그 녀석이라면 다른 몬스터를 죽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일층.

헌터부 소속의 직원들과 일부 각성자들이 넓은 로비를 오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타르칸을 알아보는 자는 없었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극비로 부쳐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앗! 타르칸님!”

그 때 누군가 아는 체를 하며 그를 불렀다.,

타르칸을 모르는 각성자는 없다.

하지만 투구 아래의 맨 얼굴을 아는 자는 극소수.

타르칸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그를 반겼다.

“정만후씨. 오랜만이네요.”

“하하.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이름을 부르다니. 죄송합니다. 너무 경황이 없어 실수를 했네요.”

“괜찮아요. 그 정도는. 뭐 들은 사람도 없으니까요.”

정만후. 일본에 침투한 다크엘프를 사냥할 때 도움을 줬던 이.

“그러고 보니 스미레씨와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하하하. 어떻게 다크엘프에게 도망 다니던 것이 인연이 되었네요.”

정만후는 일본 각성자 스미레와 사귀고 있었다.

헌터부 인트라넷이니 뭐니 온 사방에 소문을 내고 다녀서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던 소식.

“축하합니다.”

“하하하. 부끄럽네요. 연예는 포기하고 살았는데.”

“스미레씨가 보는 눈이 있는 거죠.”

정만후. 그는 머리숱은 적어도 마음만은 풍성한 남자니까.

“타르… 크음… 전부 다 헌터님 덕분이죠. 뭐.”

“좋은 소식 들리면 연락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헌터님. 헌터님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얼마 후 타르칸은 슐트를 만나 요트를 인수 받았다.

지난번 보다는 조금 크기가 컸지만 다행히 퀘스트 보상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슐트씨. 제이가를 잘 부탁드립니다. 저 녀석 마치 뭔가에 쓰인 것처럼 달려들고 있어요.”

“네. 갑자기 너무 과중한 책임을 떠 앉은 탓인 것 같아요.”

평범한 게이머이자 스트리머에 불과했던 하동연.

그런 그가 불과 몇 개월도 되지 않아 대한민국의 장관. 이제는 세계적인 기관의 수장이 되려하고 있다.

지금 같이 온 세계에 난리가 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테지.

“그렇겠죠.”

“타르칸님.”

슐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사실 저는 동연씨보다 타르칸씨가 더 걱정입니다. 오늘따라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일은 많았죠.”

타르칸이 피식하고 옅게 웃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반응인걸 보니 표정이 안 좋긴 안 좋나보다.

“타르칸씨는 이미 많은 일을 해주었습니다. 가끔은 쉬어갈 필요도 있는 법이죠.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세요.”

“네. 뭐…”

쉬려고 해도 쉴 곳이 없다고 하면. 그들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싱거운 생각을 하면 인사를 건네었다.

“고마워요 슐트씨.”

***

에드고 인근의 해안.

이번에도 역시 가이아의 방주가 운전대를 잡았다.

“와!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그리웠다 MSG~."

요트를 구하고 김무열까지 잡느라 예상보다 상당히 늦게 도착했지만 가이아는 과자 몇 봉지에 모든 화를 풀었다.

이제 올트리아를 향해 출발할 일만 남았는데…

“너는 왜 온 거냐?”

“타르칸님. 저도 올트리아에 함께 가겠습니다.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왜?”

쟌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스네이크. 그자와 만나고 싶습니다. 타르칸님과 함께 다니다보면 분명 만날 수 있겠지요.”

쟌에게는 그녀의 연인 공호영과 스네이크의 얼굴이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쟌 역시 사도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김무열. 그 아저씨가 죽기 전에 스네이크가 인간에게 기생을 하느니 그런 소리를 했었지.’

현재 스네이크의 육체가 진짜 공호영의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느라 타르칸이 말이 없자, 쟌은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타르칸님. 저는 올트리아에 거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뭐? 올트리아에 거주를 했었다고?”

“네.”

쟌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올트리아 대륙은 아둔한 전능자가 그랑대륙보다 먼저 준비했던 곳입니다. GM 역할을 하기 위해 불려왔던 저희는 처음에는 그랑이 아닌 올트리아에 도착했습니다.”

“…너희들이 에드고에 터를 잡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어찌저찌 바다를 건넜지만. 더 이상 이동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었죠. 이브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희들은 아사를 반복하며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터를 잡은 것이 아니라 그냥 지쳐 쓰러진 곳이 거기였다는 거군.

“타르칸님. 당신에게 올트리아는 조금 충격적인 곳일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올트리아행을 말리고 싶지만… 타르칸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실 테죠.”

“이미 충격은 받을 만큼 받았어. 그리고 나는 반드시 내 어머니를 만나야겠어.”

“가엔 언니 말씀이시군요.”

자신의 모친을 만나 물어볼 것이 너무나 많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일단은 만나서 그를 낳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니 애초에 그녀가 자신을 낳은 것이 맞기나 한지 따져봐야만 한다.

김무열이 내뱉었던 타나토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도 타르칸의 머리를 어지럽게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좋아. 네가 올트리아에 대해 알고 있다면 말릴 이유는 없지. 배에 올라타. 바로 출발한다.”

“네! 타르칸님.”

***

요트가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이전에 사용했던 호화스러운 요트에 비해서는 속도감이 좀 떨어졌지만 크기가 커 좀 더 안정감이 있었다.

지난번처럼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도 아니니.

음식은 타르칸이 충분히 챙겨왔다.

여차하면 인벤토리에 쌓여있는 던전용 비상식량을 뜯어도 될 일이고.

물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가이아가 있으니 언제든지 맑은 식수를 확보할 수도 있었다.

“타르칸. 곧 도착할거야.”

“그래.”

저 멀리서 아스라이 육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약 한 달간의 항해가 드디어 끝나가는 순간이었다.

육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째서 쟌이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모래와 바위, 그리고 무성하게 자라난 식물들.

그 어느 바닷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의 경계가 마치 칼로 잰 듯 정확히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

풀의 경우에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주변으로 넓게 뻗어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마저도 자세히 관찰하면 그 시작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영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각으로 반듯하게 나누어진 돌과 모래의 경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런 지형이 가능한 거지?”

“아. 여기는 개발이 중단된 곳이네요.”

쟌이 선미로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개발이 중단되었다고?”

“네. 저건 초기단계의 지형이에요. 저기에서 더 개발이 진행되면 적절하게 섞이고 어울리는 형태로 모습을 바꾸죠. 대륙의 안으로 더 들어가면 저런 지형은 더 없을 거예요.”

“아둔한 전능자가 만든 땅이다. 이거지?”

“네. 사실 저런 지형은 게임 안에서는 그리 특이한 모습이 아니에요. 오히려 매우 흔한 편이죠.”

이세혁의 기억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이름이 마이크래프트였던가.

“그래서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그래픽이지만 결국은 게임이라고 생각했죠. 바로 저런 지형 때문에요.”

“실제로 보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네.”

한 달간 항해를 마치고 육지로 올라섰다.

어느새 육체가 바다의 너울에 익숙해진 것일까? 지면에 올라선 타르칸은 작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육지는 육지인데…”

사방을 둘러싼 사각의 경계들.

지형과 지형이 만든 선이 지평선까지 죽 이어져있었다.

“정신병 걸리기 딱 좋은 곳이군.”

“우와. 이게 다 뭐야.”

가이아 역시 타르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

“네가 만든 거잖아. 놀라지마.”

“그렇지만 기억에 없는데 어떻게 안 놀라냐.”

“쯧.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바로 용을 만나긴 무리일 테고.”

“방주의 수리도 끝났겠다. 이제 슬슬 나도 업그레이드를 해야지?”

“9등급게이트의 몬스터를 사냥 하겠다?”

“그렇지. 도와 줄 거지?”

“내가 그런 놈들을 상대로 뭘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타르칸은 과거 시작의 섬에서 만났던 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때 트렌은 마을 NPC의 대부분이 올트리아 출신이라고 했었다.

“쟌. 혹시 이곳에 거주하는 인간들도 있나?”

“인간이요? 음…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우선 마을을 찾아보자. 다짜고짜 이곳을 헤매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쟌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눈치였지만 입술을 몇몇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설명하는 것 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빠르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럼 이쪽 방향입니다. 멀지 않은 곳에 해안도시가 있어요.”

“도시?”

도시가 있다는 건 이곳의 인간들도 꽤 높은 문명수준을 달성했다는 것.

아울러, 전해지는 것과는 달리 상당한 숫자의 인간이 이 올트리아 대륙에 살아있음을 의미했다.

결국 몬스터의 범람으로 올트리아를 빼앗기고 말았다는 역사는 거짓인 것이었다.

“빌어먹을. 이젠 놀랍지도 않구만.”

타르칸이 이죽거리며 쟌이 말한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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