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호수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자욱하다.
그 안에서 여유롭게 유영하는 거대한 붉은 뱀.
“후우.”
상대는 8단계 게이트의 몬스터.
살아있는 재앙이다.
이미 발록을 이기긴 했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시로코를 유지해야 해.”
방패에 내장된 스킬과 업적 열정의 불씨의 시너지 효과.
규격외의 괴물을 상대할 때 시로코의 유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일단 녀석을 땅위로 유인하겠어.”
우로보로스는 물과 지상 양쪽 모두 자유롭게 활동이 가능하다.
당연히 지상에 올라왔을 때 사냥하는 것이 편하다.
“가이아. 가능한 우로보로스의 주위에서 물을 밀어내 줘.”
“그래. 맡겨 줘.”
“그럼 간다.”
완전무장 상태의 타르칸이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생성된 검은 가시들이 호수를 직격했다.
“크와아아악!”
사나운 울음소리와 함께, 우로보로스가 그 붉은 거체를 들어올렸다.
우로보로스. 스스로를 삼키는 뱀.
특징은 남은 생명력에 반비례해 신체능력이 급상승 한다는 것.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난폭해지고 자체 회복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시로코만 믿고 있다가 장기전이 되면 곤란하다는 뜻이지.”
어느 정도 체력을 깍은 뒤에 한 번에 큰 데미지를 줘야 한다.
“크르르륵!”
우로보로스가 사나운 기세로 그의 뒤를 추적했다.
마치 동양의 용을 연상시키는 생김새.
하지만 짧은 팔다리는 없고 하늘을 날지도 않았다.
촤아아악.
놈의 몸에서 발생하는 열기에 두텁게 쌓인 눈이 녹아내렸다.
물과 증기가 마치 살아있는 구름처럼 우로보로스의 몸체를 휩싸고 돌았다.
지금 상태로 시로코를 사용했다가는 그 위력이 반감될 것이 분명하다.
타르칸이 뒤로 도망치며 외쳤다.
“가이아!”
“알고 있다고.”
그렇게 생긴 물을 놈의 주변에서 제거하는 것이 가이아의 역할.
가이아가 능력을 발동시켰다.
마치 거센바람이 불어 닥친 것처럼 우로보로스 주변에서 증기와 물의 기류가 좌우로 흩어졌다.
“좋아.”
타르칸이 왼팔을 치켜들었다.
발록전에서와 같이 끝부분부터 조금씩 부서져 흘러내리는 방패.
마치 모래시계처럼 조용히 사그라드는 방패의 잔해들은 어느새 광풍이 되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열정의 불씨의 효과 발동. 마나 1% 회복.]
[열정의 불씨의 효과 발동. 체력 1% 회복.]
[열정의 불씨의 효과 발동. 스테미너 1% 회복.]
[열정의 불씨의 효과 발동. 마나 1% 회복.]
….
타르칸의 입꼬리가 절로 씨익 올라갔다.
중독적인 실시간으로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
“한 방에 죽일 수 있을 때까지 차분하게 피를 깎아 보실까?”
***
[레벨이 올랐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칭호. ‘멸망의 인도자’가 강화됩니다.]
“후우.”
기다리던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제야 타르칸은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전투.
가이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시간은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네가 광폭화를 너무 일찍 사용해버렸어.”
“그래. 생각보다 훨씬 생명력이 높은 녀석이었네.”
우로보로스는 발록보다 공격력은 낮지만 그보다 훨씬 튼튼했다.
속칭하자면 한 마디로 피 돼지라 할 수 있었다.
놈의 체력을 발록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한 타르칸은 생각보다 일찍 광폭화를 사용해버렸고, 광폭화의 디버프가 남아있는 1시간동안 갖은 고생을 감내해야만 했다.
“흐아. 지친다 지쳐.”
타르칸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의 검은 갑옷은 진흙으로 완전히 엉망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갑옷의 전개를 해제하면 모두 사라지니까.
상태를 주기적으로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내구도 자동회복이 붙은 장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
스스슥.
살아있는 뼈를 전개시키는 모습이 역재생되었다.
그를 보호하던 육중한 갑옷이 작고 검은 해골모양의 목걸이에 모두 흡수 되었다.
“흐흐흐.”
전리품 상자를 얻는 순간은 언제나 기쁘다.
이번에는 시크릿 등급의 장비를 얻지는 못했지만 대신 우로보로스의 정수를 얻을 수 있었다.
“가이아. 네가 먹을래?”
“응? 진짜?”
잠시 망설이던 가이아,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네가 전부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난 원하는 정수가 따로 있어.”
“블루드래곤을 비롯한 그 9등급게이트의 몬스터 말이지?”
“사신수는 없지만 사신수를 대신할 만한 놈들은 있으니까.”
가이아가 힐끔 타르칸을 훔쳐보았다.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그가 이해했을까?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갑자기 뭔 소리래.”
가이아의 확인 결과.
이 세계에는 사신수가 구현되어 있지 않았다.
골렘 계획 이후의 계획이었던 신수 제작은 무산되었던 것.
‘검은 무의 정수는 현무의 정수가 아니야.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의 정수의 원형이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굳이 혼란을 더 할 필요는 없겠지.
가이아는 자신의 생각을 마음속에 묻었다.
“8등급 몬스터의 정수는 때깔부터가 다르구만!”
타르칸이 밝은 주황색의 구슬을 집어 들었다.
우로보로스의 정수.
놈의 강한 생명력과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역시 우로보로스의 정수를 흡수할 생각은 없다.
이런 애매한 정수는 역시 무기 종결자의 심장에 먹이는 것이 제격.
[우로보로스의 정수를 종결자의 심장에 흡수시킵니다.]
[정수에서 능력을 추출하였습니다.]
[능력 ‘생명의 불’을 등록 시키시겠습니까?]
“그래.”
[종결자의 심장에 능력 ‘생명의 불’이 등록되었습니다.]
[종결자의 심장] (시크릿)
- 공격력 : 레벨 x 0.64
- 등록된 능력 : (4/10)
(바리스크) 대지속성 데미지 30
(바위비늘전갈) 낮은 확률로 방어구 부식
(글루트 슬라임) 악식
(우로보로스) 생명의 불, 화염속성 데미지 50
- 내구도 자가 수리
= 모든 것을 무로 귀결 시키는 자의 심장.
생명의 불은 체력수치가 낮아질수록 공격력과 방어력이 높아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로보로스의 특징을 그대로 빼다 박은 능력.
“오호. 좋은데?”
우로보로스의 정수는 생명의 불 효과 이외에 화염속성 데미지를 무려 50이나 높여주었다.
현재 그의 레벨은 267.
종결자의 심장의 공격력은 170이 되었다.
거기에 바리스크의 정수와 우로보로스의 정수의 능력까지 더해진 최종 공격력은 무려 250.
“슐트씨 레전드 등급 무기의 공격력이 200 초반대였지 아마?”
종결자의 심장은 이름 그대로 종결급 아이템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바로 올트리아로 갈 거야?”
“음…”
마음 같아서야 그러고 싶지만 문제가 있다.
바로 올트리아에는 부활 포인트가 전혀 없다는 것.
때문에 이동용 수정 또한 사용할 수 없다.
“전에 사용했던 배는 지금 다시 사용할 수는 없고.”
시작의 섬에서 타고 왔던 요트는 에드고의 약한 지반에 깔려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차피 지구에 한 번 다녀와야겠네.”
이번에는 주인 잃은 요트를 찾을 필요도 없이 그냥 하동연에게 적당한 요트를 사달라고 하면 될 것이다.
“올 때 먹을 것 좀 인벤토리에 담아와. 거 뭐냐 라면이나 인스턴트 음식들.”
타르칸의 로그인과 로그아웃에 이미 익숙해진 가이아가 태평한 소리를 했다.
“음식은 전리품상자에서 나온 게 아니면 인벤토리에 못 넣는 거 몰라?”
“에이~ 선수끼리 왜 이래? 퀘스트 보상으로 만들어서 들고 오면 되잖아. 너 어차피 요트도 그렇게 가져올 것 아니었어? 그리고 그거 내 아공간을 이용하는 거잖아. 나도 조금은 지분이 있는 것 아니야?”
“쯥, 영악하긴. 알았다 알았어.”
***
[로그아웃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이동용 수정도 거의 다 써가네.”
다시 로그인을 할 때마다 변하는 위치 때문에 그는 어느새 상당한 수의 이동용 수정을 사용한 상태.
“꼭 필요한 곳에 쓰긴 했지만… 그 필요한 상황이 너무 많단 말이지.”
부족한 양은 하동연에게 받으면 될 테지만.
하동연이라고 얼마나 여유분을 가지고 있을지 미지수다.
“이제는 캐쉬샵도 없잖아.”
사실 더 쉬운 방법이 있긴 하다.
바로 디멘션소프트.
사도들에게 직접 받는 방법.
그들은 GM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아둔한 전능자의 권능을 사용하여 캐쉬 아이템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크윽.”
타르칸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사도들에 대해 생각하자 다시 두통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발록의 정신계 마법에 당한 뒤, 종종 이런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체 뭐야.”
힐러에게 부탁하여 검사도 받았지만 발록의 마법은 이미 깨끗이 사라진 뒤.
하지만 때때로 이세혁이 스네이크에게 납치당하던 장면이 강박적으로 떠오르곤 했다.
스네이크에게 복수하지 않은 것을 이세혁의 기억이 원망이라도 하는 것일까?
“후우.”
헌터부에 요청한 헬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타르칸은 눈을 감고 이세혁의 기억을 가다듬었다.
이세혁의 20살 이전의 기억은 그에게 없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이세혁은 자신을 평범한 인간이라 믿고 있었어.’
스스로 사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다른 녀석들과는 달랐다.
‘사도들은 인간의 모습이 될 때 처음부터 성인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
20살 이전의 기억은 잃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는 것이다.
어째서 이세혁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기억이 온전했다면 필시 다른 인간들과 자신과의 차이점을 눈치 챘을 터인데.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세혁의 기억을 조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자는 사도 중에 한 명 뿐이다.
더러운 고기 하지르. 김무열.
정신계 마법의 전문가인 그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크흑.”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밀려든다.
“그래. 그날.”
이세혁이 처음 스네이크의 얼굴을 본 날.
그늘은 이세혁이 알레스카에서 한국으로 휴가를 나왔던 날이다.
분명 디멘션소프트 본사를 들러 인사를 한 뒤 돌아가는 길에 스네이크에게 납치당했었다.
“그날 이세혁이 만났던 것은…”
- 아마 TF팀 팀장이 곧 연락을 할 것 같아. 하하 이것 아쉽구만. TF팀으로 가면 한동안 같이 일하지 못 하겠어.
본사의 게임 디렉터.
- 이세혁의 마지막은 어땠지? 평안을 얻었나?
- 하지만… 이세혁의 기억에 당신은 없는데?
- 짧은 만남이었거든.
“그랬었군.”
타르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무열. 그 자식이 스네이크와 한패였구나.”
***
“뭐? 그 배가 그렇게 비싼 거였다고요?”
주인 잃은 요트 중에 가장 좋아 보이는 걸 고르긴 했지만.
“원래 요트 자체가 상당히 비싸요. 그리고 말씀하신 모델은 그 중에서도 최고급이라.”
“아 왠지 호화롭더라니.”
사치를 부릴 생각은 없다.
그저 튼튼하고 빠르기만 하면 충분.
“그 모델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그냥 크기만 비슷하면 됩니다.”
“네. 최대한 빨리 수배해 놓을게요.”
“정말 고마워요. 슐트씨.”
슐트는 업무가 상당히 밀려있음에도 언제나 그의 요청을 가장 우선적으로 처리해 주었다.
“고맙긴요. 타르칸님이 없었더라면 이미 전세계는 발록에게 초토화가 되어가고 텐데요. 이것밖에 못 도와드리는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타르칸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주제를 바꾸었다.
면전에서 칭찬을 받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이가가 말한 그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헌터부를 세계적인 기관으로 만드는 작업 말씀이시죠? 네 물론입니다. 서로 빨리 연합을 꾸리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입니다. 눈으로 직접 발록을 사냥하는 모습을 봤으니까요. 거기에 하동연씨도 있고. 사실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한국과 연합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인 상황입니다.”
슐트가 곁눈질로 슬쩍 타르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얽힌 각국의 정치인들은 스네이크 그 녀석이 잘 구워삶고 있으니 사실상 방해물도 없는 상황이에요.”
“권모술수로는 따라올 자가 없을 테죠.”
당연하게도 슐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 역시 일시적으로 스네이크와 손을 잡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리라.
“저도 하동연씨의 의견에 동의한 것이긴 하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네요.”
“이해합니다. 저도 그러니까요.”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타르칸이 짐짓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아. 저 잠시 식료품을 좀 사러 다녀올게요.”
“식료품이요?”
“오랜 항해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