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반파된 도로.
뒤집어진 장갑차들.
갑자기 나타난 타르칸이 만들어 놓은 광경이었다.
부서진 장갑차에서 기어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 심한 부상을 입지 않아보였다.
모두가 각성자들이기 때문.
“크윽.”
검은 정장의 사내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적발에 타는 듯한 드레스를 입은 한 소녀.
타르칸 소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어디에서 봤더라?”
“소녀는 대협을 처음 뵙습니다만…”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음… 그런가?”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 소녀는 이만.”
“…라고 할 줄 알았냐? 변태 할아범?”
혈룡아가 움찔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찰처럼 일그러져 있는 타르칸의 얼굴.
“스네이크나 네 놈 둘 중 하나일 줄 알고 있었다. 오늘 뽑기 운이 좋았네.”
스네이크는 하동연이 진린은 타르칸이 죽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혈룡아는 자신도 모르게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 흉측한 꼴을 보니 원하는 건 손에 넣은 모양이군.”
“대형을 갖추어라!”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혈룡아가 수하들에게 명했다.
그녀가 익숙한 모습의 푸른색 언월도를 꺼내 들었다.
격렬하게 진동하는 그녀의 원월도.
“이미지 드래곤!”
- 크와와와!
파괴된 도로 위.
거대한 푸른 드래곤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런… 진심이야? 그 사이에 지능이 떨어지기라도 한 거야? 그건 내가 너한테 판 거잖아.”
얼굴 한 가득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타르칸을 무시하며 혈룡아가 외쳤다.
“청룡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 한다!”
이미지 드래곤은 일종의 부적이었던 모양.
타르칸은 피식 웃으며 푸른 드래곤의 형상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자연의 군대.”
그의 의지를 따라 흙먼지가 일었다.
미약한 미풍.
하지만 그것이 드래곤을 뒤덮자 푸른 드래곤의 모습은 허망하리만치 쉽게 사라졌다.
“청룡이 떠나버렸네?”
[‘만들어진 신의 형상 - 포식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드래곤’에 대한 데미지가 0.1% 상승합니다.]
“음?”
예상치 못한 메시지.
“이거… 이미지 드래곤에 적용이 되는 거였어? 그럼 다른 환영으로도?”
타르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어쩌면 도저히 활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스킬 ‘만들어진 신의 형상’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월도 블루 드래곤에 이미지 드래곤 스킬이 생긴 것도 그리고 그 스킬이 레전드 등급이었던 이유도 전부?’
언월도 블루 드래곤에 내장되어있던 스킬.
그것 역시 시크릿 등급 아이템들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앞길을 위해 그가 얻도록 시스템이 예정해놓은 아이템 말이다.
“그 언월도. 다시 받아 가야겠군.”
소녀의 손에 들린 푸른 언월도를 보며 타르칸이 눈을 반짝였다.
“모두들 이 몸을 지켜라!”
혈룡아의 날카로운 외침에 삼합회의 최고 실력자들이 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괜찮겠어? 진짜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여유로운 타르칸의 목소리.
반면 경호원들은 간신히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었다.
“묻잖아.”
쾅!
강하게 땅을 굴렀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도로가 마치 두부처럼 쉽사리 갈라졌다.
“정말 괜찮겠냐고. 난 잠시 저 늙은 놈과 둘이 이야기 하고 싶은데.”
“삼합회에 받은 은혜와 너희들의 가족들을 생각해라!”
혈룡아가 외쳤다.
협박도 이정도로 노골적이면 안쓰럽다.
“다시 한 번 말하지. 오늘 진린은 죽는다. 약속하지. 삼합회의 수뇌부들도 모두 죽인다. 일주일 뒤, 더 이상 보복을 할 세력은 이 세상에 없어진다.”
경비원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들 역시 혈룡아와 함께 타르칸이 발록과 싸우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 내가 수뇌부를 죽일 일주일 동안은 어떻게 하냐고? 그것도 걱정 마. 어차피 자기 목숨 살리느라 복수할 엄두도 못 낼 테니까. 어때? 이래도 목숨을 걸 테냐?”
경호원들은 눈앞의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방금 입으로 내뱉은 말이 절대 허풍이 아니라는 것 역시도.
“감사했습니다!”
자뭇 비장해 보이는 인사.
하지만 그 인사가 끝난 뒤에는 모두가 흩어져 도망가기 바빴다.
“들었어? 감사했댄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어! 난 새로운 세상의 황제가 될 몸이다!”
타르칸이 끌끌끌 웃었다.
조금씩 커져가는 그의 웃음소리는 나중에는 급기야 폭소가 되었다.
“푸하하하하.”
“닥쳐라! 이 괴물자식!”
괴물은 너고.
타르칸이 겨우 웃음을 멈추며 말을 이었다.
“아… 좋았어. 혹시나 죽음에 초연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었거든. 그 썩은 몸뚱이에 고문을 해봤자. 의미 없는 짓일 테고 말이야.”
만약 진린이 과거의 육체였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어서 죽이라며 오히려 그를 다그치고 있었겠지.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며 멋을 부리면서 말이야.
“그 꼴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신이 도왔어.”
“저리가! 저리가! 저리가! 이 괴물!”
“정말로 정말로 고마워. 네가 새로운 육체를 얻어서.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해줘서.”
“누가 좀! 제발 도와주세요!”
좌우로 흔들리는 눈동자.
두려움에 떨리는 새햐얀 볼.
혈룡아는 마치 진짜 어린 소녀라도 된 듯 애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타르칸은 다시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푸하하하하하. 미치겠군. 크크큭.”
누구보다 많은 무고한 이의 피를 흘리게 만들었을 인간.
그런 인간도 최후의 순간이 되자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너 알고 보니 아주 재밌는 녀석이었네.”
퍼억.
타르칸이 혈룡아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스팔트와 검은 갑주 사이에 끼인 혈룡아가 비명을 질렀다.
“끼야야아악!”
“넌 언월도로 목을 베어주기에는 너무 추악한 인간이야.”
조금씩 발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꾸드득.
비명과 비명 사이에 두개골이 으깨어지는 기괴한 소리가 섞여 든다.
“너를 죽이면 내 손에 묻은 피가 조금은 희석될까?”
아스팔트와 타르칸의 발 사이에서 짓이겨지는 진린.
이미 그녀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조금 더 가지고 놀걸 그랬나?”
작은 후회와 함께.
콰직.
“흠…”
발에 묻은 더러운 액체를 털어낸다.
“후우.”
의외로 후련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복수를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담담했다.
지나가다 편의점에서 음료를 하나 산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 지나갔을 뿐이다.
그런 느낌이었다.
“저쪽으로 많이 갔었지?”
타르칸이 경호원이 도망간 방향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를 발견한 진린의 경호원이 놀라 외쳤다.
“어째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지.”
이번에는 언월도를 사용해 주었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목과 심장을 노렸다.
한 번에 한 명씩 차분하게 진린의 경호원들을 모두 죽였다.
“삼합회의 수뇌부는 모두 죽인다. 그게 약속이었지? 진린의 직속경호원인 너희들이 수뇌부가 아니면 대체 누가 수뇌부겠어. 걱정 마 곧 다른 놈들도 다 죽여줄 테니.”
***
무너져 내리는 도시.
전복된 차량들.
그 아래에 쌓여있는 시체들.
“그대로 버려두고 싶지만. 쥐떼가 들끓게 되는 건 또 싫으니까.”
죽어서 까지 다른 이들에게 해악을 끼치게 할 수는 없지.
타르칸이 속으로 말하며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불태웠다.
“잘 타네. 쓰레기라서 그런가.”
그는 물끄러미 시체를 태우는 불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봤나 싶었더니.”
어딘가 칼날둥지마을의 불을 연상시켰다.
“후우…”
자기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할 한숨이 내뱉어진다.
위이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하동연에게서 온 메시지.
“여기 중국 아니었어? 휴대폰이 터지네?”
아마 슐트가 미리 손써둔 것이겠지.
메시지의 내용은 그의 생존을 확인했다는 것과 지금 그가 있는 곳으로 수송기가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그인하는 게 더 빠르긴 하지만 급하지 않으면 이동용 수정을 아끼는 것이 좋겠지.”
***
잠시 후.
수송기가 도착했다.
예상치 못했던 동행인과 함께.
“뭐야 이건 또.”
긴 장발의 미남.
특유의 미소는 여전했다.
“스네이크!”
반사적으로 검은 가시를 전개되는 검은 가시.
타르칸이 쇄도했다.
스네이크의 경호들이 대경했지만 타르칸을 막기에는 역부족.
그는 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처럼 경비원들의 포위를 쉽게 뚫어내었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네. 진린 영감에 이어 네놈까지 잡을 수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스네이크님은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닥쳐!”
“스네이크님! 어서 피신을!”
차앙!
그런 그를 막아선 것은 놀랍게도 하동연이었다.
“타르칸. 기다려!”
“제이가?”
“잠깐 기다려 타르칸. 지금은 때가 아니야.”
“네가 왜?”
예상치 못한 방해에 타르칸의 기세가 일단 수그러들었다.
“너 그러고 보니 저 녀석과…”
하동연과 스네이크가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스네이크 소유의 수송기인 듯 했다.
“사정이 있어.”
“사정?”
잠깐 숨을 고른 타르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뭔 개소리야. 너 미쳤어?”
“잠깐만. 잠깐만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줘.”
타르칸의 날카로운 눈빛이 스네이크를 향한다.
수하들에 의해 수송기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특유의 미소는 유지하고 있다.
“저 새끼를 눈앞에서 놓아준다고? 너 진짜 제이가 맞아?”
“후우…”
스네이크를 태운 수송기는 어느새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순전히 스네이크와 함께 있는 하동연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후우… 뭐 좋아. 나는 진린. 너는 스네이크.”
그것이 약속이었다.
“스네이크는 네 사냥감이었다. 얼마든지 양보해 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지?”
“타르칸. 난 스네이크와 손을 잡을 생각이다.”
“…진짜 미쳤어?”
“물론 일시적인 동맹일 뿐이야. 스네이크가 먼저 제안해 왔어.”
“너 그걸 진짜로 믿어?!”
타르칸이 내지른 외침에 대기가 진동했다.
꿀꺽.
스네이크의 경호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동연씨.”
조종사에게 이륙의 지시하며 스네이크가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시죠.”
특유의 웃음은 여전하다.
스네이크의 눈동자가 씩씩대는 타르칸을 향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스네이크를 태운채로 이륙하는 비행기.
타르칸은 매서운 눈빛으로 하동연을 쏘아보았다.
“너. 지금 상황에 대해 나를 이해시킬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따지고 보자면 타르칸은 스네이크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다.
적대하는 이유는 오직 스네이크가 사도였으며 타르칸 그가 이세혁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체의 복수를 해준다는 명복.
하지만 하동연은 다르다.
그의 연인의 원수. 복수를 다짐하던 바로 그 대상이 스네이크였다.
“뱀 새끼는 이미 도망갔으니까 말해봐.”
“후우…”
깊은 숨을 내쉬며 하동연이 어렵사리 한 단어 한 단어 내뱉기 시작했다.
“네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 되었을 때야. 그때 스네이크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 물론 미국 정부의 이름으로.”
스네이크는 하동연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바로 전 지구의 각성자를 하나의 단체로 묶는다는 계획.
“지금은 나라별로 각성자들이 따로 움직이고 있어. 다른 나라에는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고 겨우 생색만 내는 형편이지.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피해가 더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네 덕분에 커진 나의 이미지와 스네이크의 영향력이 더해지면 만들 수 있어. 전 세계 단일 헌터협회를.”
“후…”
깊은 한숨과 함께 타르칸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야. 제이가. 이 멍청한 새끼. 너 또 속냐?”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건 나도 알아!”
“제이가.”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젠장!”
하동연이 이를 갈며 씹어 내뱉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어. 지금의 비효율적인 각성자 운용을 조금만 손봐도.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어.”
“제이가. 너.”
“독인걸 알아도 마실 수밖에 없다고! 빌어먹을. 내 욕심 내 복수만 챙기기에는 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