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PC 라불리었다-191화 (191/215)

191

희고 근엄한 신전, 그곳에 신도들의 피와 살로 그려진 길이 열렸다.

“끄악.”

“이 악마!”

GM의 버프에 광폭 효과라도 걸려있는 것일까?

검은 기사 뒤로 늘어져있는 시체의 산을 보고도 신도들은 용맹하게 돌진했다.

베어낸 신관의 숫자가 두 자리를 넘어섰을 때부터 타르칸은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타르칸씨. 찾았습니다.”

“네 그렇네요.”

애초에 숨을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교주 GM목자는 신전의 중앙의 빛이 모이는 곳에 앉아있었다.

봉두난발에 상의도 걸치지 않은 상태다.

이곳이 신전이 아니라 시장바닥이었다면 거지라고 오인 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색.

GM이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양의 가면을 쓰고 있다.

“돌아왔군.”

여전히 음침하고 낮은 목소리.

“그래 어땠나. 저쪽 세상은?”

잠깐 멈추어 머릿속으로 양쪽 세상을 비교해 본다.

“많은 것이 달랐지만 알고 보니 별반 다를 게 없더군.”

그 모순되는 말에 GM목자가 낄낄 웃었다.

“그랬군. 그래서 이제 나를 죽일 텐가?”

“각오하고 있던 것 아닌가?”

이번 레이드를 실행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성국은 너무 약하다.

전면전이 벌어졌더라도 희생자는 나왔을지언정 성국이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핵을 이용해 공멸하려고 했나?”

“날 뭐로 보는 거냐. 난 의미 없는 학살을 즐기는 사이코가 아니야.”

“처음에는 네놈이 통일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나?”

“그런 꿈을 꾸기도 했었지. 하지만 이제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진실을 알게 되었거든.”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의자.

GM목자가 그 위에 축 늘어졌다.

“이유가 궁금한가?”

“아니.”

타르칸의 단호한 대답에 GM목자가 낄낄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오 이런. 좀 봐줘. 내 꼴을 보라고. 이렇게 초라한 늙은이 옆에 이제 아무도 남아있지 않잖나.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다른 이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 밖에는 없는 내가 이제 더 뭘 할 수 있겠나.”

앙상한 가지 같은 팔과 힘없이 축 늘어진 백발.

과거에 비해 체격도 많이 줄었다.

“… 다른 사도들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거냐.”

“아니지 아니야. 배신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무대 위의 광대가 다른 광대에게 배신당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알파에게 들었다. 양쪽 세계의 사도들이 만나는 자리가 없어졌다고.”

“알파! 그 녀석은 항상 나를 무시했었지. 자기 잘난 맛에 빠져 사는 그 나르시시스트 녀석! 하지만 그 녀석 역시 장기판의 말에 불과 했군 푸흐흐흐.”

GM목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깍.

머리에서 가면이 흘러내렸다.

뼈만 남은 초라한 노인이 멍한 눈동자로 신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같잖은 연기는 그만두고 이만 끝내자.”

GM목자는 방금 전 까지도 자신의 수하에게 버프를 넣으며 죽음으로 밀어 넣던 장본인이다.

지금처럼 모든 것에 초탈한 듯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수작질에 지나지 않는다.

타르칸은 금빛 언월도를 뽑아들고 한 걸음씩 GM목자에게 다가갔다.

GM목자의 뿌연 눈빛이 그런 타르칸을 향했다.

“스네이크는? 죽었나?”

“아직은. 하지만 안심해라. 그 녀석 역시 곧 죽일 테니까.”

“그렇군.”

타르칸이 언월도 종결자의 심장을 치켜들었다.

이제 저 날이 떨어져 내리면 GM목자는 목이 잘려 죽는다.

그럼에도 GM목자는 마치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꺼내었다.

“혹시 보어도 만났었나?”

“그래.”

“그의 본체가 하지르라는 사실도 알고 있나.”

“그래.”

“호오.”

늙은 교주가 작게 감탄했다.

“저쪽 세상에서는 꽤나 사도들과 함께 뒹굴었나 보군.”

“유언은 그게 끝이냐?”

“가는 길에 하나 알려주지.”

GM목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 아무리 사도라 해도, 아니 사도들의 본체라고 해도. 절대로 성체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놈이 성체를 흡수하고 사라지고 난 뒤, 찾아낸 결론이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성체는 피테쿠스가 아니다. 피테쿠스의 기억이 각인 되었을 뿐.”

그 말을 끝으로 GM 목자는 주름진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이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음을 파악한 타르칸이 말없이 언월도를 내리그었다.

“…”

스걱.

[레벨이 올랐습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을 처치했습니다. 칭호 ‘불굴의 투사’ 효과로 디멘션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시스템이 당신에게 크게 감탄합니다!!]

[칭호. ‘시스템의 주목을 받는 자’의 효과가 강화 됩니다.]

[칭호. ‘시스템의 인도를 받는 자’를 획득 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히든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칭호 ‘마녀의 아들’. 칭호 ‘불굴의 투사’. 칭호 ‘시스템의 인도를 받는 자’가 삭제됩니다.]

[칭호. ‘멸망의 인도자’를 획득 하였습니다.]

***

교주가 죽고, 성국이 완전히 안정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성국을 비롯한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교주가 신의 대리인이자 경전이 신의 말씀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교주가 죽은 여파는 아마도 향후 몇 년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폐기물은 모두 처리했어.”

“고생하셨어요.”

신전의 지하에서 그들은 엄청난 양의 핵폭탄을 발견했다.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나라 몇 개 정도가 아니라 온 그랑대륙을 방사능으로 덮을 수 있는 양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개발 도중 연구가 중단되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핵폐기물들을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호렌평야로 이동시켜 깊게 묻었다.

“성체는 모두 옮겼고요.”

“그래.”

반면 남아 있는 성체의 양은 보잘 것 없었다.

이미 5살을 넘겼지만 미처 마나의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주기에도 모자란 양.

쟌은 성체를 마탑으로 가져가 연구용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긴 회의 끝에 마녀들의 독자적인 연구가 아닌 성국의 남은 신관들과 각 국가에서 파견된 연구자들이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연구의 목적은 성체와 비슷한 물질을 만들어내어 몬스터 핵만으로 리빙웨폰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어차피 언제 그랑으로 돌아 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성국의 사람들은 교주의 사망이 플레이어들의 침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밀히 따져 틀린 말은 아니지만 플레이어와 그랑대륙 사람들의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게 되면 곤란하다.

아직은 그랑대륙에서 레벨업을 해야만 지구의 몬스터들을 막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짐을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 네가.”

“제가 계획했던 일이니까요. 제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죠.”

교주의 살해는 악마에 빙의된 타르칸과 그에게 매수된 일부 플레이어들의 만행으로 결론지어졌다.

그리고 교주를 살해한 뒤 도망가는 악마를 죽인 것은 슐트가 지휘한 비롯한 레이드 팀인 것으로 되었다.

이걸로 슐트의 영향력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커졌다.

그가 플레이어와 NPC 사이에 가교 역할을 잘 담당해 줄 것이다.

“탈영병 딱지를 떼나 싶었더니. 곧바로 처형당한 악마가 되었네요.”

자조적인 타르칸의 말에 특유의 웃음을 흘리던 쿤타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이제부터 어디로 가려고?”

“일단은 지구로 돌아가야죠. 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겼어요.”

“그 다음에는?”

“올트리아로 갈 예정입니다. 만날 사람이 있어요.”

“올트리아!”

올트리아라는 말에 쿤타의 눈이 반짝 거렸지만 이내 픽하고 웃었다.

“같이 가자고 말은 못하겠군.”

“험한 여정이 될 테니까요.”

“그래. 그렇군.”

쿤타와 에드가와 인사를 나눈 뒤, 타르칸은 바로 로그아웃 했다.

***

“기분이 좀 어때?”

익숙한 천장.

이미 망한 북한의 버려진 산장이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슐트와 하동연이 그를 마중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한가한가 보네?”

타르칸은 하동연이 건네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며 괜한 말을 던졌다.

“장난쳐? 죽을 것 같거든?”

각성자인데도 불구하고 다크서클이 생길 정도라면 분명 과장은 아닐 것이다.

아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겠지.

“그래서. 자세히 말해봐,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흠…”

심각한 표정의 하동연 대신 슐트가 대답했다.

“이틀 전, 중국의 천진시에 지진과 함께 화산이 발생했어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 사람도 살지 않는 도시라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천진시라면 분명 과거 이세혁이 잡혀 있던 곳, 그리고 지금은…

“발록.”

“네. 발록이 터를 잡은 곳이죠.”

8단계 게이트의 몬스터 발록이 활동을 시작했다.

***

헬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동안 하동연은 타르칸에게 인공위성 영상을 보여주었다.

작은 건물 정도의 키.

터질 것 같이 발달된 근육에 악마의 날개.

머리에는 거대한 검은 뿔이 달려있다.

타르칸이 알고 있는 삽화 속 발록과 완전히 판박이다.

“맞네. 발록”

발록은 무엇을 하는지 그저 가만히 선 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몬스터 사전에 따르면 유례가 없던 화산이나 지진 발생으로부터 일주일 뒤가 발록이 활동을 시작할 때다.

“후우… 8단계 게이트의 몬스터라…”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었지만 지금은 일러도 너무 이르다.

“근데 지진의 규모가 작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북경에서 느낄 수 있는 정도이긴 했지만. 확실히 유례가 없는 규모는 아니었죠.”

“흠… 다크엘프처럼 발록 역시 그랑과는 조금 다르다는 건가.”

어쨌건 사진으로만 봐도 발록이 곧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는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

“후우.”

하동연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야 해.”

“사태의 심각성은 모두 실감하고 있지만 자국 내에 처리하지 못한 몬스터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7단계만 되어도 국가적인 위기 상황인데 8단계 게이트의 몬스터라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야.”

게이트의 등급이 한 단계만 높아져도 완전히 격이 다른 몬스터가 소환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 다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핵무기의 사용을 고려하고 있어.”

천진은 과거 중국의 수도였던 북경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때문에 이제껏 핵무기의 사용을 꺼려왔던 것이다.

“핵을 쏜다면 발록을 죽일 수 있는 거야?”

타르칸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명중만 시킬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걸 호락호락하게 맞아주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중국의 공격은 헛발질로 끝나게 되겠지. 이 이후에 막대한 방사능 폭풍이 불어 닥치는 건 물론이고.”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휴. 생각을 좀 해보자.”

타르칸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흠… 지구, 발록… 플레이어. 그랑대륙, 강한 적…’

그때, 그의 머릿속에 번뜩이며 지나가는 한 가지 아이디어.

“엇! 방법이 있다!”

타르칸의 외침에 슐트와 하동연이 대번에 반색했다.

“뭐 정말이야?”

“대체 그게 뭐죠?”

“하아… 근데 이게 말이야.”

타르칸이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실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도 상당한 반발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이거 참 좋은데. 말을 할 수도 없고…”

“으아! 답답하게 하지 말고 그냥 좀 말해!”

“그래요 타르칸씨! 들어나 봅시다.”

“하아… 이것 참.”

타르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시나 타르칸의 예상대로,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두 사람 역시 타르칸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쓰읍… 그거 될 거 같기도 한데…”

“좀… 뭐랄까… 하아… 애매하네요.”

“그러니까 말 했잖아요.”

그만큼이나 타르칸이 생각해낸 방법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쓰읍… 결국 죽어도 일주일 만에 부활하는 건 맞는데 말이야.”

“그 이외에는 레벨 다운이나 아이템 소실 같은 패널티도 없고 말이죠.”

그렇다.

타르칸이 생각해낸 방법이란 바로 플레이어들을 통한 폭발적인 레벨업이었다.

그는 플레이어를 사냥해도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몸.

한국의 각성자들만 모두 죽여도 엄청나게 빠르게 레벨업 할 것이다.

“이건 아무리 장관이라도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틀림없이 타르칸씨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나타날 것 이구요.”

“일단 좀 회의를 해봐야겠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말이야. 타르칸 네가 오기만 했는데 뭔가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러게요. 정말입니다. 하하”

확실히 처음보다 슐트와 하동연의 표정이 한층 밝아져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무리한 방법이었어. 다른 길은 없는지 계속 생각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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