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정만후씨.”
“네 말씀하십시오.”
타르칸을 쳐다보는 정만후의 얼굴에는 더 이상 타르칸의 실력을 의심하는 빛은 없었다.
시가지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확인 한 뒤, 타르칸이 천외천의 실력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정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호텔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혹시 은신 스킬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요. 굳이 말하자면 위장스킬이 있지만. 움직이면서 사용할 만한 스킬은 되지 못합니다.”
직업 희귀도로 인한 차별은 비단 스텟의 차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레어등급의 사냥꾼이 아닌 유니크등급의 그림자 추적자나 와일드헌터였더라면 꽤나 쓸만한 수준의 은신스킬을 가지고 있었을 터다.
“위장이라면…”
“저의 장비와 몸을 주변 환경과 비슷한 색으로 바꿔주는 스킬이죠. 일종의 카멜레온이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때에 따라서 적절하게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는 그리 유용해 보이지 않았다.
냄새와 소리를 가리지 못하는데다가 단순히 몸의 색깔이 변하는 정도라면 예민한 일반인에게조차 들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럼 정공법으로 갑시다.”
“정공법이요?”
“앞을 막는 놈을 다 후려 팬다. 패도 안 되면 죽인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죠.”
“농담이… 아니시군요.”
정만후는 식은땀을 흘리며 허허 하고 웃었다.
“위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가급적 전투를 피하세요. 심심하면 가끔 지원사격 정도만 해주시면 충분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장비 착용하세요. 시작할 모양입니다.”
정만후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착실하게 장비를 착용했다.
“시작한다니 그게 무슨…”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답을 알 수 있었다.
콰아앙!
그들이 묵고 있던 호텔방이 통째로 폭발했던 것이다.
돌과 먼지가 비산하고 불과 철탄이 호화로운 호텔방을 난자했다.
“시내에서 미사일을 쏘다니. 총리가 어지간히도 화가 났나 보네요. 괜찮아요?”
“네. 네… 네.”
정만후는 타르칸이 소환한 검은 가시의 방벽 덕분에 폭발의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폭발에 의해 그의 귀에서는 아직도 이명이 울렸고 넋은 완전히 나가 버렸다.
“갑시다.”
“네 알겠습니다.”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과는 달리 정만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수월하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글렀구나.
‘빌어먹을.’
***
“끄아악!”
“산개해. 저자에게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원거리에서 요격해!”
금빛 언월도가 중무장한 각성자 5명을 쓸어버렸을 때, 각성자들을 지휘하는 사령부는 거리를 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르칸의 무위를 보고 내린 결론이겠지만 그리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하, 하지만. 보고에 의하면 상대는 광역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고…”
“멍청한 자식! 지금 저 꼴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저게 어떻게 마법사야!”
일본 최고의 탱커들을 마치 수수깡처럼 베어버리는 모습은 그들에게 충격을 넘어 경악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꽤 높은 레벨을 달성한 근접 딜러가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저 공격력이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하지만 대장님도 영상을 보셨지 않습니까?”
손짓 한 번에 하늘에서 폭풍우처럼 쏟아져 내린 검은 창들.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관경이었다.
일본 각성자를 지위하는 청년의 얼굴에 짜증이 몰려왔다.
레벨이 높고 길드를 운영한 경험 덕분에 높은 위치에 올라선 그였지만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인내심은 부족했다.
“대가리가 있으면 스스로 생각을 해. 멍청한 새끼야! 당연히 조작이 있었겠지!!”
“조작이요?”
“그래. 저 녀석의 뒤에 숨어 있는 저 아저씨. 등에 매고 있는 것은 장식이 아니야. 분명 원거리 딜러다. 저 녀석이 무언가 스킬을 사용한 것이겠지.”
“아! 그렇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을 파악해 버리셨군요.”
“기본 소양일 뿐이다.”
부하의 감탄성에 가볍게 웃어 보인 남자가 다시 한 번 지시를 내렸다.
“탱커들이 최대한 시간을 버는 동안, 가능한 넓게 산개해! 다크엘프 궁수님들에게는 검은 갑옷을 입은 녀석이 아니라 뒤에 서 있는 중년 남자를 노리라고 전해. 절대로 광역 스킬을 캐스팅할 시간을 주지 마!!”
“넵!!!”
모든 일본의 각성자들이 동시에 힘차게 대답했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그들의 눈빛에 타르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놀고들 있네.”
일본 각성자의 리더는 완벽한 오판을 내리고 있었다.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한 플레이어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기에 생긴 오해였다.
차라리 그들이 타르칸을 고레벨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강한 몬스터를 사냥한다는 생각으로 대응 했었더라면 상황은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다크엘프가 저격합니다. 최대한 몸을 엄폐하세요.”
그의 말에 정만후가 다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타르칸은 일본 각성자들에게서 빼앗은 정수에너지를 모두 사용하여 검은 가시를 발동시켰다.
콰드드득.
“저, 저건!”
모든 각성자들이 기함하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허공을 수놓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검은 창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젠장할! 늦었다. 모두 도망쳐! 마법이 이미 발동되었다!!”
각성자들의 리더가 다급하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타르칸의 검은 가시들이 일대를 사납게 헤집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수많은 이들의 거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포악한 짐승처럼 날뛰는 검은 가시의 폭풍은 손쉽게 포위망을 완전히 해체시켰다.
“이틈에 갑시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조용히 대답하셔도 되요. 어차피 다 죽일게 아니라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자 갑시다.”
이번에는 위력을 조정했기 때문에 크게 다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플레이어들이야 목숨만 붙어있다면 물약이나 치유마법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니까 상관없어. 다크엘프는… 내가 알바 아니지.’
다크엘프와 인간의 비명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으며 타르칸과 정만후는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
쾅!
일본 총리대신 야마토가 그의 책상을 후려쳤다.
“대체 뭐하는 짓들이야!”
그의 사무실에 집결해 있는 이들은 잔뜩 주눅이 든 채 흔한 변명 한 마디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대체 뭐하는 새끼들이냐고!!!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나?!”
야마토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닿는 자들 마다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그의 화산 같은 기세는 한 여인이 등장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진정하세요. 므어 야마토.”
“오오. 여왕님.”
다크엘프의 여왕은 미리 기별도 없이 총리의 집무실에 마음대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는 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모두가 야마토 총리의 분노가 사그라진 것에 안도 할 뿐이다.
“몸은, 팔은 좀 괜찮으신가요?”
“네. 므어 야마토가 훌륭한 힐러들을 지원해 준 덕분입니다.”
다크엘프의 여왕이 다른 이들보다 한층 짙은 색의 팔을 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마치 소녀같은 그녀의 미소에 야마토 총리의 입가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정말 고마워요. 므어 야마토.”
“크흠. 별 말씀을. 당연한 일이지요.”
“저어 그런데 그 무례한 인간은… 어떻게 되었나요?”
여왕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묻자 야마토 총리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미 수하의 다크엘프를 통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사실상 질문을 빙자한 질책이었다.
“송구스럽게도 아직… 신원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살짝 찡그러지는 다크엘프 여왕의 아미에 야마토 총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그럴 수밖에요. 한국에서 온 그자는 너무 강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일본의 각성자들도 그자에 못지않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그 녀석의 목을 여왕께 바치겠습니다!”
“어머. 정말인가요?”
“믿으셔도 좋습니다.”
여왕의 초롱초롱한 눈빛 앞에 총리가 결연히 다짐했다.
“한국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할 생각입니다. 그 자가 저지른 것은 분명한 악질적인 테러.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패악한 행위. 그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정말 믿음직스럽네요.”
“반드시 해 보이겠습니다. 이 나라의 명예. 그리고 당신의 명예를 위하여.”
“어머.”
총리대신의 뜨거운 눈빛 앞에 다크엘프의 여왕은 마치 감동이라도 한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윽고 그녀는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저는 총리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총리의 의욕에 찬 눈빛을 뒤로 하고 여왕을 집무실을 나왔다.
그녀의 호위가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까? 여왕님?]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저 추한 생물의 역겨운 눈빛을 견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잘 참아 내셨습니다.]
[저 녀석의 어설픈 추파에 손발이 모두 녹아 없어지는 줄 알았다.]
[저 자가 잘 해 낼 수 있을까요?]
여왕이 냉소적으로 코웃음 쳤다.
[그럴 리가.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도 않는다. 그저 놈의 손발을 둔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족할 테지.]
[그 녀석. 대체 정체가 뭘까요? 그렇게 강한데다 심지어 저희의 언어를 알고 있다니.]
[너도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지 않느냐.]
여왕의 호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저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역시 사도 녀석들과 관련된 놈일 테죠.]
[관련된 것이 아니다.]
다크엘프 여왕이 단언하자 호위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씀은 혹시?]
[그래. 사도와 관련된 자가 아니라 바로 그 녀석이 사도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모든 다크엘프들은 순간 탄성을 터트렸다.
호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하긴 일개 인간 아니라 사도라면 그 강함이 이해됩니다.]
[명색이 9단계 게이트에서 소환되는 자들이니까 말이야.]
[역시 여왕님. 무한히 지혜로우십니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이지.]
다크엘프 여왕이 웃었다.
총리 앞에서 보여주던 미소와는 다르게 어딘가 표독스러워 보였다.
[일전의 복수일까요?]
[아마 그럴테지.]
그들이 소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 남자가 그들을 찾아왔다.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자신들의 계획에 동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지구의 인간을 모두 몰아내고 몬스터의 세상을 만들자는 계획.
‘하지만 우리들은 제안을 거절했지.’
고위 몬스터의 노예로 살 바엔 차라리 이 세상을 지배하며 인간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더 구미가 당겼던 것이다.
지구의 과학과 그들의 마법이 합쳐진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그 사도놈의 버릇을 고쳐주자.]
[하지만 그 녀석. 지나치게 강합니다.]
그녀의 호위무사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 역시 타르칸과 시가지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자였다.
‘싸웠다라. 그걸 싸웠다고 표현할 수나 있을까?’
그 당시 현장에 나갔던 4명은 그들 동족 중에서 최강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도축당하는 짐승처럼 무력하게 당해버렸다.
여왕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더 표독하게 말했다.
[멍청한 녀석! 이럴 때를 대비하여 검은 모래를 준비해 두지 않았더냐.]
[아! 그렇군요.]
[사도 놈들은 지금 인간에 가까운 육체를 가지고 있어. 반드시 검은 모래가 통할거야.]
[인간에게는 맹독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알겠느냐? 우리는 그저 검은 모래를 사용할 적절한 때를 기다리면 된다. 그 때가 되면 놈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실컷 구경하게 될 것이야.]
행복한 착각 속에 여왕과 그녀의 수하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
휘적휘적.
“왜 갑자기 귀가 간지럽지? 누가 내 이야기라도 하고 있나?”
“그럴 만도 하죠. 지금 타르칸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일을 조금 거하게 벌이긴 했죠?”
“조금?”
타르칸의 말에 정만후는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다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계획이라뇨?”
“조만간 한 사람이 찾아 올 겁니다. 아 사실 사람은 아닙니다만.”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정말 이 사람을 믿고 따라가도 괜찮은 건가.
슬며시 미소 짓고 있는 타르칸을 보는 정만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