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여왕님을 지켜라!”
다크엘프의 비명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던 시가지는 난장판이 되었다.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나온 일반인들이 도망간 자리를 각성자들과 다크엘프들이 메꾸었다.
“이 미친 자식.”
“건방진 조선의 종자를 잡아 죽여라!”
각성자들이 일본어로 떠들어 대었기 때문에 타르칸은 그들이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조센징 운운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지구에 대한 정보는 모두 이세혁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때문에 이 세계에 속한 인간이 아님에도 타르칸은 매우 기분이 나빠졌다. 매우.
“다크엘프 30마리에 각성자 40명 정도인가. 어찌된 게 인간이 더 많네.”
그의 등 뒤로 검은 가시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타르칸은 검은 가시에 다크엘프의 여왕에게서 얻은 정수에너지를 아낌없이 불어넣었다.
콰드드득
“오늘은 맛보기니까 다크엘프는 팔이나 다리 하나쯤 잘라내고 인간은 전투불능 정도로 봐주도록 하지.”
마음 같아서는 다크엘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건방진 새끼!”
각성자들이 이를 갈며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각기 다른 클래스의 다른 스킬들이었지만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CC기. 군중제어스킬이라는 점이었다.
‘일본 각성자들도 기본은 되어 있네.’
그의 말대로 CC기의 적극적인 활용은 다수의 플레이어가 소수의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것에 최적의 선택이었다.
디멘션온라인은 아이템으로 맞출 수 있는 상태이상 저항에 한계가 있다.
기절이 되었든, 중독이 되었든, 동상이 되었든.
모든 종류의 CC기를 난사하다 보면 어느 것 하나 두 개는 걸려들기 마련인 것이다.
타르칸 역시 밀려드는 군중제어기에 속절없이 걸려들고 있었다.
“됐다.”
“별거 아니구만!”
그의 발은 땅에 얼어붙었고 땅속에서 솟아난 뿌리들은 그의 다리를 묶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사슬은 그의 전신을 옥죄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불과 바람의 장벽까지.
사도라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그들의 스킬 조합은 훌륭했다.
이 정도의 준비성 앞에서는 타르칸 역시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시크릿 등급의 장비 [완수한 자의 발걸음]을 얻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아, 아니!”
“어째서 벌써!?”
[완수한 자의 발걸음](시크릿)
- 방어력 : 0.3 * 체력
- 패시브 스킬 ‘멈출 수 없는 멸망의 인도자’ 적용.
○ 완수한 자의 골격 세트
- 2세트 효과 : 모든 능력치 - 99%
- 4세트 효과 : 착용자 영구 행동불능
- 6세트 효과 : 착용자 사망
육중한 부츠 형태의 [완수한 자의 발걸음]은 신발치고는 방어력이 높긴 했지만 방어력 이외에 속성저항력이나 마법저항력은 전혀 붙어있지 않았다.
투구인 ‘완수한 자의 두개골’과 비교한다면 초라한 능력치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집을 만큼 장착된 패시브 스킬이 사기적이었다.
어쩌면 투구의 패시브 스킬 ‘사명’ 이상으로.
- 멈출 수 없는 멸망의 인도자 (패시브)
적용된 모든 행동제어 스킬의 유지시간 감소.
착용자에게 시도된 행동제어 스킬에 면역 부여 (1시간)
“참으로 심플한 효과.”
CC기의 유지시간이 대폭 감소하고 해당 CC기에 한 시간 동안 면역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착용자에게 시도된 스킬에도 면역이 부여된다는 것이었다.
즉, CC기를 상태이상 저항력으로 버텨낸 경우에도 어김없이 면역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순간 그의 해골을 닮은 투구가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철컥.
타르칸이 금빛 언월도를 지면을 향해 겨누었다.
그것이 신호였다.
파바바박!
그것은 마치 쏟아지는 우박이었다. 아니 차라리 지면을 휩쓰는 검은 쓰나미였다.
수를 셀 수 없는 수많은 검은 가시들은 온 거리를 뒤덮었고, 지면을 처참하게 유린했다.
[정수추출의 패시브 효과 발동.]
[악식 효과 발동]
[방어구 부식 발동.]
[칭호 - 내면의 열정 효과 발동.]
무기에 붙은 ‘악식 효과’와 칭호 ‘내면의 열정’ 그리고 정수추출까지 있었기에 그는 전투 시작 전보다 오히려 더 생생해졌다.
반면 검은 가시의 파도에 휩쓸린 일본의 각성자들과 다크엘프들은 더 없이 무력했다.
비명을 지르며 이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심지어 공격이 지속될수록 검은 가시의 숫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끄아아아악!!”
수를 셀 수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검은 가시들은 용케도 그들의 급소만은 피해가고 있었다.
타르칸 나름대로 세심한 컨트롤을 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데미지 증폭의 효과가 이렇게나 뛰어나다니.’
검은 가시의 폭격이 그치고 난 뒤, 나타난 시가지의 모습은 자신조차도 경악할 정도였다.
마치 폭탄이 떨어진 듯, 아니 시가지의 중심에 화산이라도 폭발한 듯 모든 건물과 길이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이었다.
‘이 정도 까지 하려고 한건 아니었는데… 힘 조절에 실패했네.’
[완수한 자의 손아귀](시크릿)
- 방어력 : 1
- 데미지 증폭 50%
- 패시브 스킬 ‘높은 길의 인도’ 적용.
패시브 스킬 [높은 길의 인도]은 사용하는 무기의 숙련도를 빠르게 올려주는 단순한 스킬이었다.
일종의 보정 시스템 같은 것으로 사실상 타르칸에게는 큰 소용이 없었다.
방어력 역시 1로 고정되어 있어 가정용 면장갑보다 못한 수치였다.
하지만 [완수한 자의 손아귀]에는 데미지 증폭이라는, 다른 아이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흉악한 수치가 존재했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그 데미지 증폭을 받은 결과였다.
‘역시 이 세트 아이템들. 하나같이 성능이 미쳤어.’
본래였다면 2세트 착용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99%가 되었어야 하지만 타르칸은 살아있는 뼈 덕분에 그런 패널티에서도 자유로운 상태.
“질 거라는 생각은 안했지만 이렇게 쉽게 이길 줄은 몰랐는데.”
고작 아이템 두 개를 바꾸었을 뿐인데 그 효과는 엄청났다.
‘남은 완수한 자 세트는 세 개. 상체 하체 그리고 어깨다. 그것들은 또 얼마나 사기일지.’
스스로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타르칸은 너스레를 떨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정만후씨? 미나토씨도 옆에 있죠? 네. 이쪽으로 앰뷸런스랑 힐러들 좀 보내 주세요. 네. 네. 아뇨. 죽은 사람은 없는데 이대로 방치하면 곧 다들 죽을 것 같아서요. 네. 부탁드릴게요.”
그는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는 각성자들과 다크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훔쳐보는 일반인들이 보였다.
“에휴. 지금 당장 죽일 건 아니니까.”
우리 장관님한테 한 소리 듣는 거 아닌가 몰라.
타르칸이 각성자들에게 스킬 ‘피어나는 생명’을 걸어주며 중얼거렸다.
***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미나토가 사나운 기세로 책상을 내려쳤다.
타르칸이 시가지에서 벌인 일은 당연하게도 큰 이슈가 되었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전쟁을 하면, 감당 하시겠어요?”
타르칸이 도발적으로 말을 던졌다.
순간 미나토의 말문이 막혔다.
이미 타르칸이 가진 힘을 확인한 그였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전쟁? 전쟁이라고? 이 사람과?’
몬스터플러드로 인한 피해도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상태로 다른 나라와 전쟁이라니 가능할 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이 남자 한 명 때문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거기다 한국에는 제이가 그 녀석도 있지.’
분한 표정을 짓는 미나토를 향해 타르칸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죽은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저쪽이구요.”
“콘의 여왕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요?”
“음…”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타르칸 쪽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뭔가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여왕의 팔을 날려버린 것이었으니까.
“뭐 그런 셈이죠?”
“후우…”
미나토가 긴 한숨과 함께 물속에 잠기는 비닐봉지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당신 덕분에 저는 끝났어요. 잘리는 건 기본에 경찰 조사까지 받을지도 모른다구요.”
일본의 경찰에 대해서는 타르칸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아마 미나토가 경찰에 넘겨지면 어떤 구실을 대어서라도 모든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울 것이다.
‘그래도 그게 더러운 애완동물 취급 받는 것 보다는 나은 것 아닌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타르칸은 미나토를 격려해 주었다.
“제가 처리 할 테니 걱정 마세요. 제가 벌인 일을 다른 사람이 책임지게 만들지는 않을 거니까요.”
“무슨 해결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데 무슨 해결 방법이 있겠어요. 각성자가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각성자가 다쳤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이게 이번 일의 가감 없는 사실입니다.”
미나토가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다크엘프들은 다른 몬스터들과는 다르다니까요!”
“그렇게 당당하다면 어째서 다크엘프가 활동하는 사실을 다른 나라에 꽁꽁 숨겨 왔던 겁니까?”
미나토의 입이 다시 한 번 꾹 다물어졌다.
“좀 전에 보니 일본의 일반 시민들은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크엘프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그런데도 해외에서 알지 못한다? 이건 시민들의 동조 하에 고의적으로 정보를 은폐시킨 것 아닙니까?”
“은폐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려질 일이기에 굳이 나서서 알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오늘 저의 행동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국제 사회의 평가로 넘기겠습니다. 일본의 평가가 아니라요.”
“하아…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미나토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르칸님이 하신 말씀.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미나토씨. 생각해 보세요. 일시적으로 다크엘프는 유용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자면…”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 지른 미나토는 쉽사리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며 주저하던 그는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토로했다.
“총리님께서 다크엘프의 여왕과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미나토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던 타르칸은 몇 번이고 그의 말을 곱씹어 본 뒤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네?”
***
“막장이네요. 개막장.”
정만후의 평가는 신랄했다.
타르칸 역시 그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참. 멜로드라마 하나 뚝딱 나오겠는데요? 제목은 이 시국에 몬스터를 사랑하게 되었다. 캬.”
“현혹 마법은 아닌 모양입니다.”
미나토의 말에 의하면 일본총리의 곁에는 항상 일본 최고의 플레이어 팀이 동행하며 경호를 한다고 했다.
그 중에는 랭커 마법사와 힐러 역시 포함되기 때문에 다크엘프가 정신계 마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설사 레벨이 낮아 해제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법의 존재는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왕의 연기에 껌뻑 속아 넘어가고 있다 이겁니까?”
“연기도 연기지만… 그 있지 않습니까.”
“외모 말이군요.”
“그렇죠.”
썩어도 엘프라고 했던가.
다크엘프의 일원들은 모두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현 일본총리는 아직 꽤 젊은 나이이고 아내와도 일찍 사별했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대상이 인간일 경우에 한하여서 말이다.
“다크엘프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국익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네요.”
“사랑이죠 사랑.”
“자신을 돼지고기라고 부르는 주인님을 향한 사랑! 이야~ 취향 하나 만큼은 확실하네요!”
“후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만후의 물음에 타르칸은 자신의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떻게 하겠느냐고?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아버리긴 했지만 예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크엘프들의 영향력을 더 알아낸 뒤, 제거합니다.”
다크엘프들은 이곳 일본에서 핵 시설에 손을 대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일본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방해가 심할 것 같은데요?”
“그렇겠죠.”
타르칸이 호텔 창밖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이미 왔어요.”
호텔 주위로 느껴지는 무수한 기운을 느끼며 타르칸이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시가지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각성자의 수준이 조금 더 높다는 것과 다수의 다크엘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자리를 피하죠.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