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PC 라불리었다-177화 (177/215)

177

‘피델.’

동굴을 따라 조금 걸어 들어가니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불룩 튀어나온 배와 쩔그럭거리는 검과 방패.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의 피델들이 동굴을 지키고 있었다.

좋은 징조였다.

‘뭐가 있는 건 확실하군.’

시작의 섬에 배치되어 있던 피델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피델의 주위로 은은한 서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홀로 멀리 떨어져 있는 피델의 등 뒤로 몰래 다가갔다.

파각-

타르칸의 짧은 손짓에 피델은 너무나 손쉽게 허물어져 내렸다.

‘다른 것들보다 방어력이 조금 더 높다. 아마도 양치기의 버프겠지.’

하지만 지속시간이 길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버프가 유지되는 만큼 버프의 효과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피델이 몇 기가 있더라도 상관없어.’

물론 타르칸의 기준에 강하지 않다는 것이지 일반적인 피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어력과 반응속도가 올라가 있었다.

공격행위 때문에 잠행이 풀린 그는 다시 잠행이 발동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당장 눈앞의 피델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보물창고를 터는데 굳이 요란을 떨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군.’

그는 동굴 끝에 보이는 거대한 철문이 아닌, 그 길목에 있는 한쪽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낙서 같기도 하고 자연적으로 생긴 흠집 같기도 한 도형들이 한 쪽 벽면 한 가득 새겨져 있었다.

수많은 피델이 지키고 있는 거대한 문이 아니라 이곳이 진짜 출입구였다.

그는 벽에 새겨진 도형을 알파가 말해준 순서대로 두드렸다.

그르릉.

그러자 낮은 울림과 함께 동굴의 벽이 열리며 입구가 나타났다.

그리 작은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피델들은 미리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 것인지 갑자기 열린 벽에 일체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비밀 공간 안으로 한 발 들어가자 벽은 다시 스르륵 닫혔다.

타르칸은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함정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하자.’

비밀 공간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는 우선 그의 좌측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햐. 이게 뭐야.”

타르칸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농구장 정도의 크기의 방안은 온갖 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자식. 어울리지 않게 꽤나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네.”

방 안의 유물들은 세공된 보석이나 금으로 만든 장신구 정도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품들이었다.

고대유적에서 발견했을 지구의 예술작품부터 시작하여 그랑대륙의 역사 속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연대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예술과 역사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면 즐거운 비명을 질렀겠지만 아쉽게도 타르칸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는 현금화하기 용이해 보이는 금 장신구 몇 개만을 챙긴 뒤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래 이거지.”

방을 옮기자마자 예술품을 보던 때와 다르게 타르칸의 눈이 반짝거렸다.

종류와 숫자, 품질을 일일이 확인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무구들이 방 한 가득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캬!”

실용성이 없고 화려하기만 한 장식용 무구들은 모두 반대편 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진열되어 있는 것은 모두다 실전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타르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역사속의 위대한 장인들이 최고의 재료를 사용하여 정성을 다해 벼려낸 결과물들이 이곳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대박. 대박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모두 인벤토리에 쓸어 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바닥과 천장에 새겨져 있는 미세한 선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희미하지만 심상치 않은 마나가 깃들어 있어. 예술품들이 보관되어 있던 곳에는 없었는데.’

알파가 창고를 지키는 보호 마법까지는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타르칸은 서두르지 않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보물을 보관한 곳이니까 요란한 공격형 함정일 가능성은 낮아. 그렇다면 경보알람마법이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종류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시간을 들여 찬찬히 방의 구조와 진열된 무구들을 살펴보았다.

덕분에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마법진과 진열된 장비들이 연결되어 있어. 설마 파괴 시킬 리는 없을 테고… 그렇군. 공간이동인가?’

그러고 보면 마법진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과 이동용 수정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이 서로 매우 흡사했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입장하면 내부의 아이템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공간이동 하는 거군. 알람마법이 울리는 건 덤이고 말이야.’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아이템이나 마법진을 건드리는 순간, 마법이 발동할 것이다.

‘완전히 이동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야. 하지만 그래도 모두 다 챙겨가는 것은 불가능 하겠지.’

마법진이 발동하고 아이템이 전송되기까지의 시간.

그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아이템을 챙겨야 한다.

일일이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눈과 감, 그리고 마나의 파동만으로 챙겨야 할 아이템의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후. 좋아. 한 번 해보자.”

***

얼굴에 쥐 모양의 가면을 쓴 남자가 빠르게 달려 나갔다.

남자는 기이할 정도로 왜소한 체구를 가졌지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첩했다.

하얀 쥐 가면 아래에서 남자는 투덜거렸다.

“또 별일 아니겠지만. 젠장할.”

교단의 고위 사제. 성국의 수호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는 제대로 대접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특별히 눈밖에 들일도 없었건만 어째서인지 교주는 항상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대행자로 부름을 받은 뒤로 줄 곳 이 외딴 곳에서 창고나 지켜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사실 그것은 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행자’라는 성스러운 임무를 맡은 11명 중 쥐를 담당하는 대행자들은 언제나 취급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나가는 호랑이들 보다야 나은 상황이라지만… 젠장.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평생 오지에 박혀 있어야 하다니. 이건 평신관보다 못하잖아!!”

그는 지금 그가 담당하는 교주의 창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창고의 경보가 울렸기 때문이다. 사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파도가 거세거나 작은 벌레 같은 것이 기어들어온 날에는 어김없이 창고의 마법진이 발동했다.

그곳에 설치된 것은 그만큼이나 예민하고 강력한 마법진이었다.

“에휴. 또 벌레나 잡아야 하는 내 신세가 전설이다.”

피델이라는 이름의 멍청한 깡통들은 오늘도 그가 오고 가고 있음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흰 쥐 가면을 쓴 남자는 단조로운 손놀림으로 비밀 통로를 열었다.

창고에 숨어든 벌레를 처리한 뒤 그가 다시 성국에 연락을 넣으면 빠르면 하루 안에 다시 창고 안으로 교주의 보물들이 이동할 것이다.

“에휴.”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던 남자의 눈이 부릅떠진 것은 그때였다.

비밀의 방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한 눈에 봐도 엄청난 숫자의 장비들이 두 개의 방 앞에 쌓여 있었다.

“이, 이게 대체.”

“흠… 네가 알파의 대행자냐? 원본과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한데?”

남자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한 남자가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기이한 형상의 검은 창들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GM목자 그 자식. 후마르만큼 알파도 싫어했나 보네.”

“너.”

남자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퍼억.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검은 창을 마지막으로 남자의 기억은 끊어졌다.

***

타르칸은 로그아웃을 하기 전, 검은 모래가 담긴 플라스틱 팩을 땅속에 묻었다.

다음에 로그인 하는 즉시 검은 모래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같은 이유로 북한에 있는 버려진 장원에도 검은 모래를 숨겨두었다.

“안녕하십니까? 타르칸님!”

이제는 거의 그의 전용이 되어버린 헬기에서 내린 그는 우렁찬 경례를 받으며 헌터협회 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건물 로비에서 새로운 보안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고 있던 슐트가 인사를 건네었다.

“다녀오셨어요? 음. 타르칸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의 말대로 타르칸은 어딘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로그인만하며 기분이 다운되었던 다른 날들과는 사뭇 다르다.

“뭐. 그럼 셈이죠. 조금 있다 슐트씨에게도 보여드릴게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하하하. 좋은 일이 있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아! 슐트씨. 저 일본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일본이요?”

슐트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한국만큼 헌터 시스템이 빠르게 정비되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때문인지 전 세계에서 한국의 헌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중 일본은 지원대상 순위의 하위권에 속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피해 정도가 크지 않고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네.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요. 혹시 일본 쪽에서 협조 요청 들어온 것 없을까요? 협력을 위해 간다는 쪽이 명분이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슐트와 하동연은 호국수렵부를 새롭게 정비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일로 슐트의 시간을 뺏는 것이 내심 미안했다.

“뭘요. 타르칸님의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마음을 잘 알고 있는데요. 타르칸님은 인류의 비밀병기잖아요.”

“하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슐트의 말에 타르칸은 어색하게 웃으며 하동연을 만나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약간의 낯간지러움을 느끼면서.

‘비밀병기? 세상을 위한다고? 내가?’

과거 김헌수 장관이 사용하던 사무실 앞으로 도착했다.

역시나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시 인사나 할 생각으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때마침 거친 말들이 들려왔다.

“이 따위로 할 거면 당장 집어치워!”

“…죄송… 크윽. 합니다…”

“대답은 짧게!”

“네. 죄송합니다.”

사무실에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하동연과 그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김헌수 장관?”

아. 이제 더 이상 장관이 아니지.

김헌수가 고개를 들었다.

꼬장꼬장했던 얼굴이 며칠 사이 더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어? 타르칸. 빨리 왔네. 안 그래도 부르면 튀어 나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응. 그나저나 어째서 저 사람이 여기에?”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던 사람이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었다 치더라도 적어도 무기징역을 받아 옥에서 삶을 마감했어야 하는 사람 아닌가.

“그게 말이야. 대통령의 지시였어. 감옥에서 썩히기에는 아깝다나?”

하동연이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대통령은 김헌수 장관이 꾸민 일들을 공론화 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대신 김헌수를 장관직에서 좌천 시킨 뒤 하동연을 보좌하게 했다는 것이다.

“자기를 암살하려고 했던 사람을 용서해 줬다고?”

“그래. 이제는 장관이 아니라 서기관이야.”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결정이었다.

인간적인 감정을 떠나서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뭐니 뭐니 해도 김헌수의 업무능력 만큼은 탁월했으니까.

“어쭈 똑바로 안 서지? 내가 말했지. 앞으로 나한테 대접 받을 생각하지 마라. 인간 취급해주는 것만 해도 많이 양보한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나이대접 받고 싶으면 양로원이라도 가라고. 아 그렇군… 당신은 여기를 나가면 감옥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거였지?”

“크흑!”

하동연은 본래 사람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호의로 다가간다.

하지만 반대로 한번 싫어진 사람에게는 더없이 모질기도 했다.

“대답은?”

“후우……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짧게!”

“…네.”

김헌수 서기관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타르칸은 하동연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았다.

‘와. 제이가 사람 잘 잡네.’

김헌수 서기관은 이미 한 번 하극상을 저지른 인물이다.

어쩌면 대통령처럼 유한 방법보다는 하동연처럼 강하게 휘어잡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한동안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슐트 역시 피아식별은 확실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서 시달릴게 될 김헌수 서기관이 살짝 불쌍해질 정도였다.

타르칸은 하동연에게 인사를 건넨 뒤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제이가와 슐트씨는 그들의 목표를 향해 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때마침 그에게 슐트에게서 적당한 협력요청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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