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PC 라불리었다-151화 (151/215)

151

예상했어야 했다.

정작 붉은 게이트를 사용하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붉은 게이트에 대해 떠드는 것이 개소리일 가능성을 예상했어야 했다는 소리다.

한걸음을 내딛자마자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얇은 천이 가리고 있는 방안에 들어서듯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후마르가 말했던 지옥 같은 냉기도 없었다.

“에잇!”

타르칸이 날카롭게 조형한 정수에너지를 몸 주위에 둘렀다.

그리곤 그 정수에너지를 정수사출의 묘리를 사용해 전신으로 뿜어내자 거대하고 두터운 방한복이 걸레짝처럼 찢어졌다.

“으하. 이제 좀 살겠네.”

그는 인벤토리에 담아왔던 기름과 라이터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겠다는 미친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려고 했다니.

‘바보들과 너무 오래 있었던 건가.’

그는 서둘러 ‘살아있는 뼈’를 해제했다.

자신의 몸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시야가 조금 낮아지고 갑옷에 딱 맞던 방한복이 조금 헐거워 진 것으로 조금은 추측하고 있었다.

“크크큭. 됐다. 됐어!”

육안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타르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나는 살았어! 삭제되지 않았다고!!”

타르칸은 거울에 자신의 밋밋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실실 웃었다.

“처음보다는 코가 좀 높아진 것 같기도 하고?”

워낙 이전 육체의 미모가 뛰어나서 그렇지 사실 타르칸의 원래 모습도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은 로그인 하는 순간 완전히 새로운 육체가 된다.

양쪽 세계의 모습이 적절하게 모인 지금의 모습은 그가 소기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반증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두 세계의 모습의 중간 정도의 모습인가?”

중얼거리는 타르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유쾌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상태창도 살펴보고 시험 삼아 스킬들도 사용해 보았다.

“없어졌어?”

아이템과 능력의 변화는 없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플라스틱 팩에 담겨있던 검은 모래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째서….”

검은 모래는 몬스터가 아닌 플레이어와의 전투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 검은 모래가 사라졌다는 것은 꽤나 큰 손실이었다.

“이건 나중에 따로 확인해 봐야겠어.”

타르칸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일종의 각성자가 된 거네.”

한쪽 세계의 육체가 다른 세계의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을 각성이라고 정의한다면 타르칸은 이 세계의 첫 번째 각성자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사용했을 피처럼 붉은 게이트는 보이지 않았다.

이쪽에서 게이트를 이용하여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모양이다.

“좋아.”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천리통을 꺼내었다.

천리통은 시작의 섬에서 그랑대륙으로 연락은 가능하지만 시작의 섬에서 현실로의 연락은 불가능하다.

시작의 섬이 시간과 공간의 틈새에 존재하는 곳이라는 후마르의 설명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아니 아니지 그랑대륙과 현실이라니. 이렇게 말하면 꼭 그랑대륙이 현실이 아닌 것 같잖아. 음… 두 세계를 지칭할 적당한 단어가 있을까?’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게임과 현실이라는 단어는 타르칸은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의 고민 끝에 두 세계를 그랑과 지구라고 부르기고 결정했다.

어쨌거나.

타르칸은 천리통을 꺼내어 지금 그랑에 접속해 있을 하동연에게 천리통을 걸었다.

역시나 금방 응답이 왔다.

“응. 응. 그래 잘 왔어. 뭐 별거 없더라? 응? 아… 일단 시작의 섬인 것 같긴 한데….”

타르칸이 주변의 살벌한 풍경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섬은 맞는 것 같긴 한데 어째 분위기가 이전과는 딴판이었다.

“여기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거 같아. 지구에서 더 이상 신규 캐릭터 생성이 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 응. 그렇지. 로그아웃은 시작의 섬을 나간 뒤에 시도해 볼 생각이야.”

잠시 하동연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봐.

타르칸은 목까지 올라오는 말을 눌렀다.

“아.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난 일단은 제국에서 탈영병 신세인데? 뭐 슐트씨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야 거짓은 아니긴 하겠지만….”

지구에 함께 있을 때 슐트는 그를 아스너제국으로 초대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슐트는 제국에서 꽤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 로그인에 성공하게 되면 꼭 한 번 들러주세요. 아멕스도 기뻐할 거예요.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졌다고나 할까….’

아멕스와 슐트는 성공적으로 총기류의 개발에 성공했고, 총은 마나의 세례가 사라진 세상의 군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멀지 않아 작위를 받을 것도 거의 확실하다고 하고… 정말 그 정도라면 탈영병 하나 신분세탁 해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긴 할 테지.’

과거에는 쿤타의 수행원이라는 신성불가침 방패가 있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카드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탈영병이라는 꼬리표는 떼버리는 것이 활동하기에 편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뭐 일단 알았어. 그래그래. 여기서 나가는 대로 연락할게.”

마치 휴대폰 통화를 끊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비석을 찾아보자.”

전직을 끝낸 뒤, 스타팅 포인트를 선택할 수 있는 비석.

비석은 말하자면 시스템으로 허용된 단방향 워프게이트 같은 것이다.

이미 사용해 본 경험도 있는, 이 섬에서 탈출하는 방법의 가장 유력한 후보다.

하지만 그는 막 전직한 플레이어가 아니다.

이동용 비석의 사용에 레벨5라는 제한이 걸려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경우라면 두 번째 방법.’

바로 이동용 수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시작의 섬은 로그인한 플레이어들이 처음 도착하는 곳.

아무리 피델의 버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사망자는 발생할 것이다.

‘사망자가 있다는 건 플레이어가 부활하는 포인트도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모든 부활 포인트는 워프게이트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레벨 10이하로는 캐쉬아이템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제약 역시 그런 타르칸의 추측에 힘을 더 했다.

‘비석이나 부활포인트나 둘 다 마을 근처에 있을 거야. 우선 시작의 마을을 찾자.’

그가 현재 있는 섬은 과거 전직 시험을 치룬 섬과는 다른 곳이었다.

이세혁의 기억을 통해 10개가 넘는 시작의 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타르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을 채 청력과 마나를 감지하는 감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7번 시작의 섬보다 훨씬 규모가 큰 곳이야. 형태도 다르고.’

시작의 섬에는 더 이상 인간도, 몬스터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직 식물과 곤충들, 작은 동물들의 기척만이 느껴졌다.

조금씩 감각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던 그는 순간 다른 것들과는 매우 이질적인 소리를 포착했다.

‘빗소리? 아니 폭풍우인가?’

섬의 외각, 먼 곳에서 거센 물줄기의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네. 폭풍우라면 저렇게 한쪽에서만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

마치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작은 스피커로 파도소리를 틀어 놓은 것만 같다.

타르칸이 지체 없이 파도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 시각, 타르칸이 지구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세계의 한 구석.

스네이크 역시 수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후우우.”

정말 그였다니.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의 뒷목 언저리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마치 그의 잘못을 책망하기라도 하듯 뇌를 헤집는 격통에 스네이크는 작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모습이었을 줄이야. 어째서.”

어째서라는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

인정해야 한다.

애초에 그는 상궤의 너머에 존재하는 자.

오히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일 가능성 역시도 염두에 두었어야 옳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그의 실수다.

때문에 스네이크는 뒷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묵묵히 감내했다.

하긴, 그의 실수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겠지만.

‘반드시 만나야만 해.’

그가 오래 기다려왔던 해방자.

현무의 독을 발견했다는 둥, 버그 플레이어로 보이는 자를 발견했다는 둥.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며 피테쿠스와 하운드를 속여 왔던 것은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먼저 그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놓쳐버렸다.

그에게는 이미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 기회는 버그 플레이어로 보이는 자가 발견되었을 때다.

그때만 해도 그는 단지 기사급으로 강한 NPC가 플레이어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강한 NPC라면 보어가 피델에게 심어놓은 진흙, 관리자의 디버프 쯤은 간단히 해제할 수 있었을 테니까.

시작의 섬 NPC 선별 과정에서 무언가 실수가 있었다.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동연이 어떤 기묘한 NPC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다.

그때도 그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동연에게 NPC와 플레이어가 동일인 일 것이라고 잘난 듯 충고를 하면서도 타르칸이 ‘그 존재’ 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설마 그런 나약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니. 사실은 지금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인데…’

당시 들었던 생각을 말하자면 ‘시작의 섬에 섞여왔던 그 NPC는 생각보다 영리한 녀석으로 보인다. 어쩌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딱 이 정도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스네이크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저 좋은 연막이라 생각했던 자가 사실은 진짜였다니.’

그가 놓친 세 번째 기회는 더욱더 뼈아프다.

자신의 손아귀에 잡혀 왔던 그를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직접 가슴에 검은 모래의 용해액을 주입시키기까지 했음에도.

다시 한 번 부르륵 그의 뒷목이 경련했다.

스네이크는 테이블에 앉은 채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기에는 그의 눈동자가 너무도 차갑게 내려앉아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미 그는 자신을 알고 있고, 거기다 명백하게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건 상관없어. 아니 나를 적으로 생각한다는 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좋을지도 몰라.’

얼굴을 감싸고 고민하던 스네이크가 탁자를 탁 쳤다.

언제까지나 그가 로그아웃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

‘알파 그 녀석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냄새를 맡았을 거야.’

녀석은 눈치가 빠르다.

정확한 사정까지는 절대 알지 못하겠지만 무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음은 진작 눈치 챘을 터다.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 타르칸이 있다는 사실 역시도.

‘하지만 알파는 지나치게 신중해. 알파라면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가능한 접촉을 피할 것이 분명해.’

반드시 그 전에 타르칸과 만나야만 한다.

***

쿠콰가가가각.

거센 파도의 소리.

바다는 마치 미친 거인처럼 표효하고 있다.

잘 못 들은 것이 아니다. 역시 폭풍우가 온 것이 맞았다.

자신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이 된 타르칸은 사나운 비와 바람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분명 엄청난 기세의 비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해변의 모래는 보송보송하게 말라있다.

대체…

“빌어먹을.”

타르칸이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쿠와아아악.

저 멀리 파도가 세상을 찢어 버릴 듯 몰아친다.

하지만 그 표효 소리가 무색하게 파도는 섬에 닿지 못하고 공허하게 흩어지고 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거냐고. 이 미친 세계는?”

그의 시선이 닿은 곳, 잔잔한 바다 너머로 하늘이 갈라져 있다.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하늘은 마치 유리처럼 깨져있다.

하늘에 균열을 만든 것은 어느 이름 모를 거대한 괴수의 잔해였다.

시간이 꽤나 지난 것 같은데 아직 부패가 그리 진행되지 않은 것을 봐선 몬스터의 사체가 분명했다.

형편없이 부서진 하늘.

그 하늘을 뚫고 늘어져 있는 몬스터의 사체.

그리고 그 균열 너머로 보이는 폭풍우 치는 바다.

타르칸은 그 앞에서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하.”

이 곳은 시간과 공간의 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개 같네 진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