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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꺼낸 천리통을 들고 계속해서 어디론가 연락을 시도하고 있는 슐트, 모래사장 위 정신을 잃은 후마르와 학살을 끝내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하동연의 모습이 보인다.
“젠장!”
슐트가 천리통을 백사장위에 내던졌다.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그의 얼굴에 가득하다.
‘레벨이 올랐다….’
탈출하는 동안 타르칸은 레벨이 올랐다.
그는 이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시설을 빠져나오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인 모양이네.’
타르칸은 플레이어를 죽여도 경험치를 얻는다.
어쩌면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각성하지 못한 이계의 인간을 죽여도 경험치를 얻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건가….’
이곳에서 죽은 이계의 인간은 일주일 만에 부활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첫 번째 살인이라고 부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타르칸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좋은 거지 뭐.’
그는 답이 안 나오는 문제 대신 지금 선택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쓸모없는 마음의 가책 때문에 몸이 굼떠지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리라.
타르칸은 단지 그렇게 결론지었다.
‘선택할 수 있는 공통 스킬은.’
모든 플레이어는 40 레벨을 주기로 계열공통스킬을 선택해 배울 수 있다.
정수약탈자는 드루이드계열에 속한 직업.
드루이드 계열의 80레벨 공통 스킬은 광폭화, 두꺼운 가죽, 재생 이렇게 3가지가 있었다.
‘광폭화. 일정 시간동안 자신 혹은 자신의 소환수를 광폭화 상태로 만든다. 광폭화 상태에서는 모든 상태이상 효과에 면역이 되고 공격력이 상승한다.’
광폭화는 보통 소환드루이드나 변신드루이드가 선택하는 선택지였다.
스킬이 지속되는 동안은 멈출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광폭화 시간이 끝나면 오히려 모든 능력치가 감소하는 디버프가 생긴다.’
광폭화는 상대를 완전히 발라버려야 하는 순간, 혹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강적을 상대할 때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는 스킬이었다.
‘일단 보류. 그리고 다음은 두꺼운 가죽.’
패시브 스킬인 두꺼운 가죽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스킬이었다.
방어력 상승, 모든 속성저항력 상승이 스킬 능력의 전부였다.
‘내가 가진 첫 번째 가죽과 비슷하네. 가죽이라는 단어가 붙은 스킬은 모두 이런가?’
단순한 스킬이었지만 범용성이 뛰어나다.
첫 번째 가죽의 성능은 이미 검증되었다.
거기에 두꺼운 가죽과 방어구의 방어력까지 더해진다면 전투시 안정감이 극도로 높아질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방어력과 속성 저항력은 다른 방법으로도 높일 수 있어.’
그는 만약 그랑대륙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아이템 파밍을 시작할 생각이다.
후마르와의 전투에서 아이템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실히 실감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재생. 치유계열 스킬이군.’
재생은 마나를 사용해서 대상의 상처를 치료하는 스킬이었다.
드루이드의 치유스킬은 사제의 힐과는 달리 대상이 가진 회복능력을 극대화 시키는 스킬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상처가 즉각 치유되지 않고 시간이 걸리는 대신 사제의 힐보다 마나의 소모량이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재생 스킬이 마나를 이용한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지금 그가 가진 스킬 중 마나를 사용하는 것은 오직 마나의 본질 하나 뿐.
그마저도 정수게이지가 부족할 때 제한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경험상 전투가 시작된 뒤 정수에너지가 부족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점점 더 회복물약의 효율도 떨어져 가고 있어. 레벨이 오를수록 더 심해지겠지. 치유 스킬은 정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
타르칸은 고심했다.
직업 공통스킬의 딜레마는 3가지 스킬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생각 끝에 광폭화를 습득하기로 결정했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하는 순간에는 광폭화와 같은 승부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광폭화’를 습득하였습니다.]
스킬이 생성되었다.
다시 한 번 꼼꼼히 스킬 설명을 읽는 그에게 슐트가 말을 걸었다.
“일단 자리를 이동하죠. 언제 추적자가 나타날지 모를 일입니다.”
쏜과 타레사를 구하러가는 것을 도와줄 것이냐는 질문이다.
타르칸은 하동연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동연은 삼합회에게 쫒기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삼합회의 공장을 부수었던 후마르 역시 마찬가지.
후마르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는 삼합회에 그를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다.
타르칸의 부름에 하동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스네이크의 세뇌가 풀려가며 그의 안에서 믿음과 현실간의 부조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용당한 것이라고? 그럼 스네이크가 했던 말들은?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거지?’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며 타르칸이 조용히 혀를 찼다.
하동연과 처음 만났던 순간이 불현듯 떠오른다.
‘멍청하긴 하지만 유쾌한 녀석이었는데 어쩌다….’
슐트가 하동연을 불렀다.
“동연씨.”
멍한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시연씨가 위험합니다. 구하러 가야죠.”
그제야 생기 잃은 눈동자에 힘이 돌기 시작한다.
“네. 그래야죠.”
“혹시 칼날 독수리로 이동 가능하겠습니까?”
“거리가 너무 멀어요. 칼날이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회복물약을 사용해도?”
“회복물약을 먹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날이의 체력이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제약이 걸려있어요. 하루에 이동 가능한 거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동연이 일행을 살폈다.
슐트, 타르칸 그리고 후마르.
시선이 후마르에 닿았을 때 하동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동 가능한 것은 저를 포함해 최대 두 명이 한계이구요.”
슐트가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다고 다시 공항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미 기관은 그들이 사용가능한 위조 신분을 모두 파악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공항으로 간다는 건 기관에서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하죠?”
‘흠….’
타르칸은 이들의 대화를 통해 대략 어떤 상황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상황은 급한데 거리는 멀다는 것 아냐. 갈 방법도 없고.’
그는 이들을 도울 방법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 블랙마켓을 모두 차지한 삼합회.
그런 삼합회가 전용기 하나 없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는 힐끔 하동연을 쳐다보았다.
‘문제는 저 녀석인데….’
삼합회는 하동연과 시연을 찾고 있다.
타르칸은 어째서 삼합회가 그들을 찾는 것인지 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이유인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삼합회의 서포트를 받고 있는 몸.
심지어 하동연과 시연을 잡아 주는 것이 서포트의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타르칸은 그런 삼합회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흠….’
타르칸은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삼합회의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은 하동연에게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
‘내 일이 아닌 걸로 고민하지 말자.’
그는 모래사장위에 썩은 고목처럼 쓰러져 있는 후마르를 쳐다보았다.
후마르에게 정보를 캐내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더 시급한 문제다.
‘아 그러고 보니.’
타르칸은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처음 후마르가 나타났을 때, 분명 그는 하늘에서 마치 운석처럼 떨어졌다.
‘그런 방법이면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문제 없지.’
타르칸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후마르에게 다가가 그를 똑바로 눕혔다.
그리곤 세차게 후마르의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철썩! 철썩! 철썩!
“어이. 그만 자고 일어나봐.”
손에 힘을 얼마나 준건지 타르칸의 손이 양 뺨을 왕복할 때마다 후마르의 그 거대한 몸이 들썩들썩 움직일 정도였다.
철썩! 철썩! 철썩!
“물어볼게 있어서 그래. 일어나봐. 어이. 어이! 아저씨 여기서 자면 얼어 죽어요. 어이~”
“저, 저기… 타르칸씨.”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조금 더 시간을….”
보다 못한 슐트와 하동연이 타르칸을 만류하려 했지만 타르칸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하던 행동을 이어갔다.
“아 잠시 놔 보세요. 아 독한새끼네 이거?”
철썩! 철썩! 철썩!
“이래도 안 일어나? 이래도?”
***
벌써 몇 시간 째, 스네이크는 영상속의 타르칸을 보고 또 다시 돌려보았다.
어두운 작은 방 안에서 모니터만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바깥을 동경하며 작은 창에서 머리를 때지 못하는 죄수 같았다.
“부족해.”
이 짧은 영상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다.
후마르의 초라한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보다 그를 더 화나게 만드는 것은, 후마르와 함께 시설로 잡혀 온 미지의 남자였다.
어째서 그에게는 검은 모래가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걸까.
검은 모래.
그것은 아둔한 전능자의 수많은 유산들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품의 육체를 구성하던 물질이다.
“시스템이 부여하는 모든 힘에게 적용될 터인데….”
그렇다면 저 자의 힘의 근원이 시스템이 아니라 몬스터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처음 시설에 도착했을 때는 분명 검은 모래의 디버프 효과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거지?”
당장 생각나는 것은 그의 가슴에 직접 검은 모래의 용해액을 주입시킨 일이다.
하지만 대체 그것이 어떤 변수가 되었다는 말인가?
아둔한 전능자의 기술을 흉내 내기에도 벅찬 그로써는 알기 힘든 일이다.
스네이크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그는 처음 남자가 발견된 곳이 MGTS이 발견한 몬스터게이트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몬스터게이트 차단에 투입되는 병사는 조끼와 헬멧에 소형 카메라를 부착하게 되어있지.’
스네이크의 손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찾던 영상을 발견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거구의 괴인, 그리고 그의 손짓 한 번에 형편없이 나뒹구는 병사들.
“조금 더 앞으로….”
스네이크가 키보드를 조작해 영상을 앞으로 당겼다.
원하는 장면에 다다르자 그는 빠르게 정지버튼을 눌렀다.
“저 여자는?”
과거 그가 삼합회에 있을 때 본적이 있다.
연예인이라고 그랬던가?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여자 옆에 앉아있는 동글동글한 인상의 남자 역시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저들은 분명 삼합회 소속이었을텐데?’
어째서 저들이 저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인가?
저 남자도 삼합회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남자가 하동연에게 보인 친근한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저 정도로 강한 각성자를 그가 삼합회에 속해 있을 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진린이 그에게 공개한 정보 이상으로 삼합회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진린 보다도 더.
‘삼합회 소속은 아니다. 그렇다면? 삼합회에 고용된 외부인. 혹은 그저 단순히 저들의 지인.’
삼합회에 고용 되었지만 하동연에게 붙은 배신자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가능성은 낮겠지만 단지 샤오린과 하동연, 둘 모두와 친분이 있는 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스네이크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뭐 어찌 되었든 다시 한 번 차도살인의 기회를 얻었군요.”
모니터의 희미한 빛에 비치는 스네이크의 미소가 섬뜩한 음영을 그려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