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
타르칸은 후마르를 향해 걸어갔다.
검은 사슬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어떤 발자국 소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스네이크는 아니다.
타르칸이 슬그머니 벽으로 붙으며 잠행을 발동했다.
‘두 사람. 걸음이 빠르다. 아마도 다급한 상황. 하지만 동시에 보폭을 좁혀서 걷고 있다. 가급적 소리를 내고 싶지 않은 건가? 어째서?’
스으으응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방의 한쪽 벽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 온 것은 복면을 쓰고 있는 두 명의 남자였다.
방의 모습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검은 사슬에 묶여있는 후마르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는 듯 했다.
타르칸은 두 명의 남자들 중 머리가 긴 백인의 머리카락 끝이 물에 살짝 젖어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풍기는 바닷물 특유의 냄새.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지만 감각을 개방한 상태의 타르칸은 놀라울 정도로 후각이 예민했다.
타르칸은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의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침입자…’
좋은 소식이다.
바다를 통해서 침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곳을 통해 도망치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였으니까.
타르칸은 숨을 죽인 채 두 명의 침입자를 조심스레 관찰했다.
“아마도 인체실험을 하는 곳인 모양입니다.”
당연하게도 두 명의 침입자는 슐트와 하동연이었다.
슐트는 후마르의 모습을 보고 인체실험 대상이라고 생각했고, 때문에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기관이 이런 짓까지 할 줄이야.”
의외로 하동연은 그저 덤덤했다.
미국의 비밀기관이라는 것을 오직 영화와 드라마로 접해왔기 때문일까? 상상 이상의 것들을 더 많이 보아왔던 지라 오히려 하동연은 태연할 수 있었다.
비밀기관이니 인체실험 정도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버린 탓이었다.
“MGTS와 검은 모래는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군요. 퍼져서 찾아볼까요?”
“아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아직 예상 지점을 다 확인하지 못했으니 계획대로 진행합시다.”
하동연을 만류하는 슐트의 눈에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기괴할 정도로 거대한 주사기가 들어왔다.
주사기에 결합된 유리병 속에는 아주 소량이지만 여전히 검은 모래가 남아있었다.
“동연씨. 이것 보세요.”
“검은 모래….”
“이걸로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글쎄요. 그리 좋은 일에 사용한 것 같지는 않네요.”
하동연이 검은 모래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슐트가 빠르게 경고했다.
“동연씨. 조심하세요. 쏜이 보안시스템을 교란시키고 있긴 하지만 파악되지 않은 카메라가 있을 수…… !!”
슐트가 말을 하다 말고 움찔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누군가가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났던 것이다.
잠행으로 숨어있던 타르칸이었다.
그는 진린이 주었던 자료에 첨부되어 있던 하동연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동연? 슐트?”
하동연과 슐트는 즉시 무기를 꺼내며 경계자세를 취했다.
하동연은 상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유쾌하면서도 선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반면 슐트는,
‘슐트는 왜 캐릭터를 그렇게 만들었데…’
무성한 수염에 근육질의 거구인 디멘션온라인속 아바타와는 다르게 슐트는 복면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이 가는 남자였다.
“누구냐!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네가 방금 말했잖아 멍청아.’
타르칸은 그가 그들의 본래 얼굴을 처음 봤듯, 그들 역시 타르칸의 지금 얼굴을 처음 본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자신이 그들이 알고 있는 NPC 타르칸이라고 말해봤자 믿을 것 같지도 않고 그것을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도 없다.
콰드드득.
대신 그는 살아있는 뼈를 꺼내어 발동시켰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해골기사의 모습이 된 타르칸을 본 두 남자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타르칸님!”
“나브가의 용소환사!”
타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와서 다시 플레이어 행세를 할 생각은 없다.
만약 자신을 레전드 등급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로 위장할 생각이었다면 슐트를 아는 척 해서는 안 되었다.
슐트는 철저히 타르칸을 NPC로 알고 있고, 타르칸 역시 슐트 앞에서 살아있는 뼈를 발동 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르칸은 다른 사람을, 그리고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짓거리에 질려버렸다.
그는 상대가 확실한 자신의 적이 아닌 이상, 반사적으로 거짓말부터 하는 버릇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습관을 바뀌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 내가 그랑 대륙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하지?
- 쏜을 죽였는데 슐트가 보복하지 않을까?
- 하동연이 제이가를 이용하고 버린 것에 화내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에서 일렁거리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타르칸은 내리 눌렀다.
‘나약하게 눈치 보며 살 정도로 나는 약하지 않다.’
타르칸이 건방진 생각을 하며 두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동연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슐트가 한발 빨랐다.
“죄송하지만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타르칸이 정신을 잃은 채 묶여있는 후마르와 그 반대편에 있는 뜯겨진 검은 사슬을 향해 턱짓했다.
“지금 상황에선 말씀드릴 것이 별로 없군요. 저도 방금 정신을 차린지라….”
슐트가 커다란 주사기를 타르칸에게 내밀었다.
정확히는 병에 소량만 남아 있는 검은 모래를.
“나브가의 검은 모래. 사기적인 디버프를 주는 물건이죠.”
“이것이 어떻게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아십니까?”
마치 취조라도 하는 말투다.
하지만 슐트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그랑대륙에서 슐트와 만난 적이 없었다면 불쾌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슐트는 그랑대륙에서보다 진중함은 떨어지고 좀 더 말이 많았지만 성격만은 그대로인 모양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방금 정신을 차려서요. 저도 이 세계에 검은 모래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을 이방으로 가져온 것은 스네이크라는 남자였습니다. 아마 그가 알고 있겠죠.”
“스네이크!”
하동연이 탄식하듯 스네이크의 이름을 내뱉었다.
“캡틴, 아니 그자가 여기에 있습니까?”
“스네이크를 알고 계시군요… 네 여기에 있습니다. 연구니 실험이니 운운하는 걸 봐선 검은 모래와 강한 연관이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타르칸은 하동연이 스네이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웠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저는 저기 묶여있는 덩치와 여기를 탈출할 생각입니다만… 두 분은?”
“저희는 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잠입의 목표는 총 세 가지.
- MGTS의 파괴.
- 검은 모래 생산 방법 확인과 샘플 확보.
- MGTS와 검은 모래의 개발이 어째서 급속도로 완성되었는지 확인.
그중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단연 MGTS의 파괴였다.
지금은 임무의 절반 정도만 완수한 상태다.
타르칸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네?”
“방해는 되지 않을 겁니다.”
시설을 침입한 둘은 당연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후마르를 끌고 미로 같은 시설을 배회하는 것 보다는 이들을 따라 가는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목적이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고 말이지.’
그가 스네이크의 이름을 말했을 때 그는 두 남자에게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하동연 쪽은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분노와 갈등, 경외가 뒤섞인 복잡한 느낌이었다.
어쨌건 그들은 스네이크가 있는 이 시설을 몰래 ‘잠입’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 시설을 관리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스네이크에게 한방 먹일 기회다.’
타르칸에게는 이세혁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스네이크에게 붙잡혀 팔다리가 잘린 채 피를 생산하는 기계로 전락했을 때의 기억 역시도.
이세혁의 기억의 마지막은 아무도 없는 어둠속에서 죽지도 못한 채 피를 쏟아내던 그가 결국 완전히 미쳐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타르칸이 스네이크에게 복수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스네이크는 내가 죽인다.’
그것이 그가 성체에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리라.
하동연과 슐트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칸의 전력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그리고 기밀이 누설될 염려도 없다.
이미 시설에 잡혀있는 사람에게 무슨 기밀이 새롭게 누설된단 말인가.
‘나중에 쏜에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임수를 완수하고 살고 봐야지.’
슐트가 타르칸에게 예비용으로 준비한 복면을 건네었다.
“바로 움직이죠. 가까운 곳에 MGTS이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큰 방이 있습니다.”
“그러죠.”
타르칸이 후마르에 다가가 그를 묶고 있는 검은 사슬을 끌어당겼다.
어린아이 주먹 굵기의 사슬이 너무나 쉽게 끊어졌다.
그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축 늘어진 후마르를 어깨위에 걸쳐 올렸다.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후마르가 워낙 거구이다보니 하반신 전체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쿵.
타르칸이 후마르를 바닥에 집어던지듯 내팽개쳤다.
“안되겠네요. 이건(?) 돌아오는 길에 회수하도록 하죠.”
“그 사람은 누구죠?”
뭐라고 해야할까?
타르칸은 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전리품이요.”
***
시연은 일어나 슬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그 남자가 왔다.
쏜은 이 시설을 비정기적으로 방문한다.
때로는 디멘션온라인에 접속하는 것 같았고 때로는 또 다른 시설에 가는 것 같았다.
시연이 가만히 다리를 꼬았다.
이제는 저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시간이다.
시연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옷을 점검했다.
가슴이 깊게 파인 하얀 원피스.
한국에서 미국으로 도망갈 준비를 할 때 혹시라도 상황이 좋아져 해변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준비한 것이었다.
당연히 한국을 떠난 뒤 단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옷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무모하고 성급했다.
그때 목숨을 건 도피를 준비하면서도 이런 옷을 챙길 정도로 철이 없었다.
‘그래도 결국 이렇게 입게 되었잖아? 그럼 됐지 뭐.’
시연이 가만히 몸을 틀며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시연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쏜은 지하시설에 준비된 주방의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었다.
시연은 조심스럽게 쏜에게 다가가 지난 며칠간 준비했었던 영어로 더듬더듬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쏜.”
“오. 미스 시연. 오랜만입니다.”
쏜이 시연을 향해 언제나처럼 예의 있는 미소를 지었다.
시연의 옷을 확인한 그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지만 굳이 티는 내지 않았다.
“뭐하고 계세요?”
시연이 쏜에게 바짝 다가가 상체를 숙였다.
쏜의 오른쪽 어깨위로 고개를 내민 탓에 그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시연의 가슴이 그대로 보이는 위치였다.
귓가에서 강하게 풍기는 시연의 달콤한 채취.
쏜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 이건 기밀사항이라.”
시연은 기밀사항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누가 봐도 그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만한, 그런 미소였다.
그때,
“여어.”
언제나처럼 퀭한 얼굴의 타레사가 벌컥 문을 열었다.
오른손을 대충 들어 인사한 타레사가 비척비척 주방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는 냉장고를 열어 뒤적뒤적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과일이나 빵 같은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주방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하지만 타레사는 아랑곳 하지 않으며 냉장고를 뒤지는 것에 열중했다.
“이 사과는 너무 오래된 거 아닌가? 먹고 죽지는 않겠지?”
말라비틀어진 사과 두 개.
“곰팡이 피었네… 뭐 때어내고 먹으면 괜찮겠지.”
빵에 곰팡이가 핀 것이 아니라 곰팡이에 빵이 핀 것 같은 빵 조각 하나.
“오… 바나나. 바나나는 역시 새까맣게 변색 된 게 최고지.”
정체불명의 시꺼멓고 길쭉한 물체 하나.
“읏차.”
일용할 양식을 챙긴 타레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다시 오른손을 척 들어 보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비척비척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급하게 끼니를 때우고 바로 디멘션온라인에 접속할 모양이다.
요즘 과도할 정도로 디멘션온라인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는,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캡슐은 접속 중 수면상태 유지, 접속자에게 포도당 주사 기능이 내장된 신형 접속캡슐이었지만 운동부족으로 인한 체력저하는 막을 길이 없다.
포도당만으로는 필요한 다른 영양소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물론 지금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음식들은 영양소가 아니라 오히려 질병을 얻을 것 같은 비주얼이었지만…
방을 향하는 타레사의 눈이 슬쩍 시연을 향한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퀭한 눈동자.
하지만 그녀의 중얼거림을 시연은 놓치지 않았다.
“bitch.”
시연이 발끈하며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타레사는 이미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 상태다.
“하하하….”
쏜이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틀어 그의 몸을 빼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인간’에게는 한없이 매너 있는 그에게 이런 상황은 곤욕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못 밖아 두지 않으면 더 곤란해질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미스 시연… 아니 미스 쉬엔. 이렇게 말하면 좀 더 이해가 빠르실려나요?”
다시 한 번 지하비밀시설의 주방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떻게….”
시연이 떨리는 눈동자로 입을 여는 순간.
콰아아앙!
거대한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시설의 한쪽 벽면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