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
“다짜고짜 칼부터 들이밀다니. 예의가 없군?”
“역시 레전드 클래스 인가?”
진린은 조직 최고의 전력이 무너졌는데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는 금은쌍두사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각성자의 대부분을 잃은 지금, 가급적 인명 피해는 피하고 싶었다.
진린은 타르칸이 일부러 금은쌍두사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다.
“이 정도로 강하다면 확실히 육체각성자는 아니겠군 그래. 뭐 그 정도면 나와 이야기할 자격은 충분하다.”
마치 방금 전의 소동은 그저 작은 시험에 불과했을 뿐이라는 듯한 말투.
일견 불리해 보이는 상황을 뒤집는 교묘한 화법이다.
타르칸의 강함은 분명히 대단한 것이지만, 진린 또한 삼합회의 수장. 그 나름대로 타르칸처럼 사선을 넘나들던 잔뼈굵은 인물이었다.
“그래. 거래를 하자고?”
뻔뻔한 진린의 말에 타르칸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 녀석들이 쓰레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이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진린이 정자에 앉아 타르칸에게 자리를 권했다.
한쪽에서는 금사와 은사가 치유사에게 치유를 받는 동안 한쪽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과가 준비되었다.
“스네이크를 나에게 넘겨라.”
타르칸이 불쑥 본론을 꺼내었다.
의외의 이름이었던지 진린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거래를 하자고 말하곤 사람을 원한다니. 사람은 내어주고 말고 할 물건 같은 것이 아니네만?”
인신매매를 일삼는 집단의 수장이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진린은 말을 잡아끌다 본심을 이야기했다.
“스네이크를 원한다라… 너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타르칸은 얼마 전 티비에선 본 한국영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살려는 드릴게.”
진린의 호화스러운 장원이 정적에 잠겼다.
이윽고 정적을 깨며 진린이 즐겁다는 듯 껄껄 웃었다.
“오 이런….”
일견 선량해보이지만 어딘가 소름끼치는 웃음.
“어차피 이 노구가 살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만.”
“진린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진린의 말에 그의 수하들이 화들짝 놀랐다.
“뭐 되었다. 없는 말도 아니고.”
타르칸 역시 진린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시키고 있는 그에게 느껴지는 진린의 몸 상태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으니까.
“스네이크를 나에게 넘기면 그에 걸맞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지.”
타르칸이 말했다.
그런 타르칸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던 진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시. 아직 애송이로군.”
진린이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이거 어쩌지…? 우리도 스네이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타르칸은 모든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 시킨 상태다.
진린의 동체의 움직임과 심장의 박동을 세심히 살피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는 이 거대한 범죄조직의 수장.
섣불리 확신해서는 안 된다.
“보아하니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그렇지 않을걸?”
“내 약속하지. 스네이크를 찾게 된다면 바로 너에게 알리겠다.”
“당신 같은 사람의 약속이 얼마나 가벼운지는 잘 알고 있지.”
진린의 타르칸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뭐지?”
“레전드 등급의 클래스가 필요한 일이지.”
진린이 그의 수하에게 한 서류를 건네받아 타르칸에게 건네었다.
서류에는 어떤 두 남녀의 이력과 위치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타르칸에게는 익숙한 자들이었다.
‘제이가.’
“내가 간절히 찾고 있는 자들이지. 그리고 아마도 스네이크가 접촉을 시도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들이기도 하고 말이지.”
행방불명 된 스네이크가 제 발로 디멘션소프트를 찾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때문에 진린은 갈 곳 잃은 스네이크가 하동연을 찾아갈 것이라 예상했다.
이 세계에서 레전드 클래스인 하동연의 무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것이었으니까.
“절대 거절 못할 제안을 하지.”
진린이 대부처럼 맛깔나게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어떤 조건이든 들어주지. 여자 쪽만 몸 성히 나에게 데려오기만 하면 돼. 어떤가? 공통의 목표를 위해 잠시 협력하는 것은?”
***
“흠….”
타르칸은 숙소로 돌아왔다.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스네이크가 행방불명….”
그는 그가 이세혁의 핏물에 잠겨있던 때를 떠올렸다.
사도로 추정되는 괴인의 침입.
그 사도와의 싸움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네이크 역시 그 사도가 쳐들어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는 진린이 건네준 자료를 다시 한 번 정독했다.
‘하동연.’
스네이크의 협력자이자 현재는 행방불명된 제이가 하동연.
삼합회는 그를, 정확히는 그와 함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쉬엔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하동연의 무력이 워낙 압도적인 탓에 추적 자체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고서에는 하동연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미국행 비행기였으며, 현재 미국에 활동 중인 삼합회 소속들이 하동연을 추적 중이라고 적혀있었다.
“너구리같은 영감탱이.”
삼합회는 스네이크의 신변을 넘겨줄 것과 함께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스네이크를 찾을 때까지 그를 철저히 써먹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기도 했다.
타르칸은 진린이 이미 스네이크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염두에 두었다.
“어차피 도와줄 생각은 없지만.”
그는 삼합회가 스네이크를 넘겨 줄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생각은 없다.
“반드시 스네이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의 제일 목표는 본래의 육체를 가진 상태로 그랑대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스네이크가 아닌 다른 사도들에게 알아 낼 수도 있는 일이다.
로그인하지 않고 그랑대륙으로 돌아가는 방법.
타르칸은 그 방법을 이세혁의 기억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만나보고 싶긴 하네.”
삼합회의 요구와는 별개로 타르칸은 제이가를 만나 볼 생각이다.
어찌 되었든, 그가 그랑대륙에 있을 때 연을 맺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으니까.
“진작 이럴걸.”
진린은 그에게 하동연을 찾는 일에 관한한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을 약속했다.
자신의 제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한도 무제한의 카드와 언제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고급 스포츠카를 그냥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가 가진 능력의 일부만을 보여주었는데도, 복잡해 보이던 문제들이 쉽게 풀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쉬운 길을 나두고 괜히 돌아갔던 기분이다.
“인터넷 검색이나 좀 하다가 슬슬 비행기를 알아보자.”
어차피 잘 필요도 없는 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인터넷 검색이나 할 생각을 하며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에는 의외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샤오린씨?”
샤오린이다.
“왜 여기에….”
샤오린은 말하기 민망한 듯 타르칸의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늘 특별한 임무가 있거든.”
“아….”
임무라니. 샤오린도 현장 임무 같은 게 있는 건가?
타르칸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근데 왜 제 방에….”
“그게… 저 그게….”
“…설마.”
타르칸은 순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략적으로 눈치챘다.
“하아…”
그 미친 영감탱이.
그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샤오린을 쳐다보았다.
천하의 샤오린이라도 진린의 명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이러실 필요 없어요. 진린한테는 제가 이야기 할게요.”
타르칸은 샤오린을 방으로 돌려보낸 뒤 진린에게 연락해 욕을 한바가지 쏟아 부었다.
‘아무리 이곳을 게임으로 여기기로 했다지만 아닌 건 아닌거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던 샤오린의 모습이 떠오른다.
타르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꺼져라 마귀야!’
타르칸은 잡념을 떨치고자 서둘러 포털앱을 열었다.
아무래도 샤오린과는 어색해질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면서.
“후우…”
포털사이트의 뉴스에는 디멘션온라인과 몬스터, 그리고 각성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 각국 정부. 디멘션온라인 금지 처분. 반대 시위 줄지어.
꽤나 흥미로운 기사 제목이다.
타르칸이 단조로운 표정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디멘션온라인의 플레이어 각성효과가 각종 테러단체에 이용될 것을 우려하여, 일반인들의 디멘션온라인 접속을 제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아직 각성하지 못한, 그로 각성은 했지만 레벨이 낮은 자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었고.
“그렇군.”
아직 이 세계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많지 않고 또한 매우 약하다.
결국 각성자는 강해지기 위해 필수적으로 디멘션온라인에 접속해야하는데, 정부의 이런 조치는 곧 각성자들의 목에 족쇄를 걸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곧 캡슐방들도 다 문을 닫겠는데?”
타르칸은 그 아래 기사로 시선을 옮겼다.
- 디멘션소프트의 정체는?
역시나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다.
하지만 제목에 비해 내용은 부실했다.
디멘션소프트의 본사와 알래스카에 있다고 알려진 디멘션온라인의 서버 관리소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내용을 길게 늘여놓았을 뿐이다.
‘디멘션 온라인, 사도들…’
이세혁 역시 사도들 중 한 명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역시 사도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다른 사도들을 찾아야해.”
사도들의 정체.
그의 베타 테스터 중 1인이었던 그의 어머니.
그랑대륙으로 온전히 돌아가는 방법.
그 모든 열쇠를 사도들이 쥐고 있다.
“공장에 쳐들어 왔던 그 남자. 후마르라고 했던가?”
분명히 그는 피테쿠스를 찾고 있었다.
어두운 호텔방 휴대폰의 빛에 비친 타르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지체 없이 오늘 받은 진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늦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정확히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뒤 진린의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에 욕을 한 사발 뿌려놓아서인지 비서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 지금 진린님은 주무시는 중입니다. 바쁜 용건이 아니시라면 내일 다시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아. 다른 게 아니라 뭐 하나 물어보려고.”
- 어떤?
“진린이 말한 그 전폭적인 지지라는 것. 사람도 포함되나?”
-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사람이 좀 필요한데, 지원해 줄 수 있나 싶어서.”
- 아마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만. 정확한 답변은 제가 진린님께 여쭈어 본 뒤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잠시 한숨을 내쉰 타르칸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가 미끼를 무는 지 한번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