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PC 라불리었다-102화 (102/215)

또 다른 사도

“피테쿠스!!”

한 남자가 사납게 포효했다.

눈빛은 용광로처럼 타올랐고, 터질 것 같은 힘이 꿈틀대는 육체는 거대했다.

분노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에 뒷걸음을 치게 만들었다.

태생부터 포식자로 태어난 남자.

그의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피식자로 전락한다.

“죽, 죽여라!”

검은 슈트를 입은 삼합회의 조직원들이 사내를 향해 소총을 연사했지만 남자에게 타격을 주기는커녕 짜증만 돋울 뿐이었다.

옷이 찢어질 뿐 피부에 작은 생채기 하나 남지 않는 거한의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비켜라. 조무래기 자식들아!”

콰앙.

남자가 발로 지면을 구르자 충격이 파도처럼 조직원들을 덮쳤다.

그 탓에 균형을 잃은 조직원들은 사내의 모습이 일순간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윽고 사내의 모습이 다시 그들의 눈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수많은 조직원들의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진 뒤였다.

“히이이익.”

얼굴에 칼자국이 길게 난 삼합회의 조직원이 질겁하며 뒷걸음 쳤다.

본능적인 반응이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그이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저 사내는 뭔가가 다르다.

“아, 악마.”

온 몸을 인간의 피로 물들인 사내가 사납게 웃는다.

“너 보는 눈이 있군. 그래 피테쿠스는 어디 있지?”

“히. 히이이익!”

질겁한 조직원이 뒷걸음질 치며 도망갔다.

사내는 그 조직원을 쫒아가 찢어 죽이는 대신 가만히 정면을 응시했다.

이전과는 다른 강한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사내의 기대와는 달리 나타난 것은 피테쿠스가 아니었다.

“후마르님. 대체 어떻게….”

“스네이크!!!”

시설에 침입한 남자, 후마르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스네이크 역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 모양이다.

그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남아있다.

“스네이크! 피테쿠스에게. 그리고 하운드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하하… 이런. 이건 예상보다 너무 이르군요… 후마르님. 솔직하게 대답하면 살려주실 겁니까?”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스네이크의 모습에 후마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사도들에게 데려가지 않고 내 손으로 죽여주지. 너 같은 배신자에게는 과분한 처우일터.”

후마르가 가슴을 피며 위엄 있게 말했다.

마치 왕이 신하에게 은혜를 하사하는 것 같은 말이다.

실제로도 후마르의 제안은 자비로운 것이었다.

그가 다른 사도들에게 넘겨진다면 죽음을 간절히 갈구할 정도로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테니까.

마치 피테쿠스가 그랬듯.

스네이크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죄송하지만 후마르님. 제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서요.”

“착각이 심하군. 네놈이 선택할 것은 살 건지 죽을 건지가 아니다.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이곳에 온 이상. 너는 죽는다. 나에게 실토하고 죽을 것인지. 다른 사도들에게 정신이 붕괴될 동안 영원히 고문을 당할 것인지. 선택해라. 스네이크.”

“글쎄요….”

스네이크가 곤란하다는 듯 슬며시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여유가 있었다.

“물론 제 예상을 넘어서긴 했지만… 제가 이때까지 손만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서요.”

“웃기는군.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저 따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죠.”

스네이크의 교활한 미소에 후마르가 표정을 구겼다.

“언제나 그랬지만 양치기나 너나.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다… 말장난은 그만하지. 피테쿠스를 데려가겠다.”

스네이크가 그의 뒤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각성자로 이루어진 삼합회의 정예 조직원들이다.

당연히 모두가 후마르에게 모두 찢겨 죽게 되겠지만 상관없다.

스네이크가 원하는 것은 단지 조금의 시간이다.

“축하합니다. 후마르님. 덕분에 제 계획을 전면 수정하게 되었군요. 뭐 이런 게 현실의 재미라는 것이겠죠.”

“거기 서!!”

광폭한 기세로 달려드는 후마르를 각성한 조직원들이 막아섰다.

“뿌리 묶기.”

“얼어붙은 대지!”

후마르에게 날아드는 각종 CC기들.

“흥!”

후마르가 코웃음을 치며 그 앞을 막아선 조직원들을 후려쳤다.

인간이 마치 가벼운 베개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럼에도 스킬을 사용하는 각성자들을 쉽게 떨쳐낼 수는 없었다.

각종 생존기를 사용하여 비척비척 일어서는 삼합회 조직원들을 보며 후마르가 이를 갈았다.

“젠장. 스네이크으!!!”

***

한편, 핏물 속에 잠겨 있는 타르칸은 육안으로 확인은 할 수 없지만 그의 흉흉한 기세만큼은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였다.

‘사도 중 한명인건가?’

피테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더더욱 피해야 한다.

그가 알고 있는 사도는 오직 하나 스네이크 뿐.

그리고 그 사도는 이세혁의 인생을 완전히 망쳤다.

바로 그가 이세혁을 영겁의 시간동안 죽지 않는 육체에 봉인시킨 장본인인 것이다.

콰앙!

그 순간 땅이 울렸다.

마치 작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그는 어째서 사도가 다른 사도의 시설을 공격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갑작스런 침입자로 시설이 혼란에 빠진 바로 지금 도망쳐야 한다.

타르칸이 신속하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인지 근육이 어색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온몸에 활력이 넘쳤고 모든 관절이 신생아의 것처럼 부드럽다.

‘깔끔한 곳이었네.’

그는 처음으로 그가 누워있던, 그리고 이세혁의 핏물을 담던 시설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각종 실험 도구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을 거라는 상상과는 달리 방의 정중앙의 피 우물을 제외한다면 특징 없이 깨끗한 공간이었다.

‘키도 커졌어.’

전보다 시점이 높아진 느낌이다.

몸은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상하다.

시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이세혁의 기억 덕분에 이해할 수는 있지만, 타르칸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느껴지는 위화감 탓이었다.

‘뭔가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타르칸은 잠행을 발동한 상태로 천천히 핏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잠행의 효과 덕인지, 핏물을 뒤집어썼음에도 그 흔적까지 말끔히 숨겨지고 있었다.

방에는 두 명의 경비가 있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밖의 상황을 무전으로 듣고 있는 중이다.

‘일단 옷을 구해야겠다.’

언제까지 잠행 상태로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다행이 두 명의 경비 중 하나가 그와 키가 비슷해 보인다.

그는 천천히 경비의 뒤로 걸어갔다.

무전에 의하면 밖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하게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이 녀석들의 우두머리는 이미 피신했고, 정예요원들이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해 출발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빠각!

그렇게 경비원의 뒤로 다가간 타르칸이 경비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키 큰 경비원이 일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남은 경비원은 갑자기 동료가 쓰러짐과 동시에 나체의 괴인이 나타나자 화들짝 놀랐다.

그가 무전기에 대고 무언가 외치려는 순간 타르칸의 손이 움직였다.

“여… 커.커억”

목을 가격당한 경비원이 거친 숨을 토했다.

빠각!

타르칸이 그런 경비원의 뒤통수를 가격했고 경비원은 어김없이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후우….”

타르칸이 키 큰 경비원의 옷을 벗기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움직이니 이제 이 몸에도 어느정도 적응이 되고 있는 듯 했다.

크레이지 몽키를 생산하는 공장은 공장이라기에는 너무나 경비가 삼엄했다.

하지만 사도가 침입해 준 덕분에 타르칸은 그리 힘들지 않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피테쿠스의 핏물 속에서 이미 이 공장의 구조를 파악한 뒤인데다, 중요 거점은 이미 사도에 의해 부서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공장의 입구 앞은 때 아닌 소동으로 몰려든 구경꾼들과 출동한 무장한 공안들로 북적거렸다.

공안들은 실시간으로 들리는 총성과 비명소리에 쉽사리 공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타르칸은 밖의 구경꾼들의 모습과 이세혁의 기억을 대조시켰다.

“이 상태로 나가면 안 되겠는데?”

지금 그의 모습은 너무 눈에 띈다.

그는 무전기나 탄창, 단검 따위가 잔뜩 달려있는 전투조끼를 벗어 던졌다.

“흠….”

타르칸의 허리띠에 달려있던 작은 권총을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그마저도 버려버렸다.

총이란 것이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다.

이세혁의 기억을 토대로 비교해 보자면 그의 스킬 ‘검은 가시’는 총이 아니라 대포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각종 장구류를 벗어던지자 자연스럽진 않지만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 복장이 되었다.

검은 면바지에 검은색 셔츠.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짧은 머리.

머리를 지나치게 짧게 자른 고등학생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가볼까?”

잠행상태로 바리케이트를 넘은 그는 자연스럽게 군중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든 곳에서는 시선에서 숨기가 오히려 용이했다.

모든 사람들의 주의가 한 곳으로 쏠려있는데다, 인간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개인에게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웬만큼 특이한 일이 아니고서야 봐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스르르르

잠행 상태로 사람들 사이에 스며든 타르칸이 군중의 그늘 아래에서 잠행을 해제했다.

몇 번을 성공시킨 완벽한 타이밍이다.

“어?”

하지만 뭔가 반응이 다르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를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 저기 봐.”

자신을 가리키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을 본 타르칸이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계의 인간은 은신을 감지하는 능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어느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다.

‘옷이 너무 눈에 띄는 것인가. 아니면 이계의 인간이 그랑대륙의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너무 섣불리 잠행을 해제한 것일까.

그가 때늦은 후회를 할 때였다.

그를 둘러싼 이계의 인간들이 마치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것을 내뱉으며 웅성거렸다.

“흐와… 대박.”

“누구지? 연예인인가?”

“혼혈인 것 같은데… 진짜 잘 생겼다.”

“미쳤다. 미쳤어.”

“….”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새롭게 얻은 육체의 단점이었다.

***

“후우….”

타르칸은 지친 표정으로 인적이 드문 강변에 주저앉았다.

강물 위로 완벽한 외모의 청년이 비친다.

지치고 짜증난 표정이건만 그마저도 우수에 차 있는 것 같다.

“내가 봐도 더럽게 잘생겼네.”

마치 디멘션온라인에서 이계의 인간들이 그러했듯, 성체의 핏속에서 새롭게 얻은 육체는 미적으로 완벽했다. 심지어….

타르칸은 말없이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 민망한 듯 헛기침을 터뜨렸다.

재수 없는 말이지만 잘 생긴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특히 그처럼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지금 그는 이 세계에 갑자기 떨어진 존재.

너무 눈에 띄어선 곤란하다.

“돈과 신분이 필요해.”

이계 역시 그랑대륙과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돈이 중요하다.

이계는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이 가능하지만 반대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아 가야한다.”

이곳은 그의 세상이 아니다.

그는 반 강제적으로 그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내던져졌다.

말하자면 그는 많은 면에서 신생아와 같은 상태였다.

신생아가 어머니의 뱃속을 그리워하듯, 그는 그랑대륙을 그리워했다.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 이전의 문제였다.

그는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그랑대륙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회귀본능과도 같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타르칸은 자기 나름대로 이런 저런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많아. GM이라는 녀석들과 단판을 지어야하고 교단과 마탑의 정체도 밝혀내야 해. 그리고 베타테스터라는 존재들도 찾아야 하고… 쏜과 슐트가 하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그리고 또….”

신생아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그랑대륙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로그인.

“디멘션온라인이라는 것에 로그인 해야 해. 그러면 다시 그랑대륙으로 갈 수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