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행 (4)
“게임?”
쿤타의 눈이 반짝였다.
무언가를 다급히 물어보려는 찰나, 타르칸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자. 자. 그런 잡담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은 하늘나루, 그리고 제국의 수도에 갈 준비부터 하시죠. 쿤타 선생님.”
쿤타와 슐트의 대화는 타르칸 역시 흥미로웠지만 지금은 안 된다.
혹시라도 쿤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된다면 더 이상 협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쿤타는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타르칸을 잠시 쏘아본 뒤,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좋아. 이번 여행은 꽤나 재밌을 것 같네. 잠시 네 녀석의 장난에 놀아나 주지.”
짐을 싸기 위해 위층으로 향하던 쿤타가 잠시 멈추어 서서 타르칸을 돌아보았다.
“너, 내가 말한 곳에는 가봤어? 마나의 세례를 주는 신전 말이야.”
그러고 보니 분명 쿤타가 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이 세계는 조작되어 있다.
그리고 마나의 세례를 주는 곳에 가면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아니요. 아직.”
“간절함이 없군.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한 건 그냥 말뿐이었나.”
쿤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쿤타는 가슴께에 커다란 주황색 별이 그려진 로브를 입고 나타났다.
등에는 꽤 큰 배낭을 하나 맨 상태다.
그는 세 사람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자 받아라.”
짙은 회색의 로브였다.
로브는 불편할 정도로 넓은 품을 가지고 있어 실용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머리는 덮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큰 후드의 뒤에는 큰 별이 새겨져 있었다.
“뭐죠 이건?”
타레사가 온 몸을 덮는 로브에 질색하며 말했다.
“교단의 교인. 그 중에서도 신관을 보필하는 큰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수여되는 로브다. 영광인줄 알아.”
물론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이런 사이비 신관을 보필한다는 것에 감사할 사람은 없었다.
“불편해 보이는데 굳이 입어야 하나요?”
“수도로 간다며? 아직 수도에는 플레이어들을 달갑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거기다 타르칸 저 녀석은 공식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고말야.”
쿤타가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타레사의 로브를 슬쩍 쳐다보았다.
“길어서 불편하면 잘라도 돼.”
“어? 그래도 돼요?”
쿤타가 이번에는 슐트를 쳐다보았다.
“그쪽은 오히려 조금 짧네. 수도에 도착 할 때까진 불편해도 참아. 교단의 눈은 어디에든 달려있으니.”
“그러지. 그럼 바로 갈까?”
슐트가 인벤토리에서 수정을 꺼내었다.
“그건?”
“순간이동 수정이다. 공간과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게 해주지.”
“나도 알아. 교단에서도 사용하거든. 그런데 어쩌지? 나는 사용 못하는데… 신관 중에서도 체질이 맞는 일부만 사용이 가능하거든. 나는 순간이동이 가능한 장소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해.”
세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뒤 동시에 소리쳤다.
“뭐?”
“신관의 체질이라니? 그때 당신이 말한 권능의 종류를 말하는 건가요?”
신관에 대한 지식이 있지만 신관에게 체질이라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본 타르칸.
“어째서 교단이 캐쉬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거지?”
쿤타가 순간이동 수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는 슐트.
“그럼 수도까지 걸어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수도에서 하늘나루까지도? 그럼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거야. 아니 시간은 둘째 치고, 그저 걷기만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 하잖아! 그냥 신관님은 걸어오고 우리는 수정으로 이동하면 안 되나요? 아 그럼 중간에 신관님과 길이 엇갈릴 수 있으려나. 수도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게 더 지루할지도… 하지만.”
간만에 수다가 터져버린 타레사까지.
세 사람 모두 쿤타의 말에 놀랐다.
놀람의 포인트는 조금씩 달랐지만…
그리고 쿤타는.
“한 사람씩 말해… 하… 짜증나네.”
화를 내었다.
***
쿤타는 신관의 로브를, 다른 세 사람은 신관 수행자의 로브를 입었다.
순간이동 수정을 사용하자는 타레사의 주장은 쿤타가 몸소 자신이 부활 포인트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눈앞에서 보여 주면서 일단락되었다.
수도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도로는 정비되어 있었고, 나타나는 몬스터라곤 고작 1단계의 먼지도깨비나 2단계의 동물형 몬스터 정도였다.
그마저도 인근의 주민들이 일사분란하게 뛰쳐나와 순식간에 처리하고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갔다.
“흐아… 어떻게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냐?”
하염없이 걷기만 하는 것이 지루했던 것인지 타레사가 크게 하품을 했다.
“아스너의 초대 황제가 고안해 놓은 몬스터 게이트 관리 시스템이 탁월하다는 증거다.”
“네에. 물론 그러시겠죠~”
타레사가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형 클래스를 가지고 있지만 활달한 성격인 그녀에게 이런 평안한 여행은 쥐약과도 같다.
멋진 풍경을 즐기는 힐링게임을 원했다면 애초에 디멘션 온라인을 플레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수도에는 언제 도착하는 거야! 사람들은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NPC들이 플레이어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지금 그들이 받고 있는 시선은 평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거쳐 가는 마을마다 사람들, 특히 농부들과 가정주부들이 경탄과 존경심 어린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때때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감자나 고구마 따위를 건네기도 했던 것이다.
쿤타가 준 신관을 섬기는 교인임을 나타내는 로브의 위력이었다.
“교단의 눈은 어디에든지 있다고 하더니… 이러면 오히려 더 눈에 띄는 것 아닌가요?”
후드를 푹 눌러쓴 타르칸이 중얼거렸다.
그의 뒤를 눈이 똘망똘망한 꼬마들이 졸졸졸 따라오고 있다.
“야 임마. ‘작은 비밀로 큰 비밀을 막는다.’라는 말 몰라?”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이죠?”
쿤타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었다.
“누구도 감히 신관의 시종이 이계의 인간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이 로브를 입고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스스로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쿤타가 자신의 펜던트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일사천리였던 것이다.
병사들은 그런 쿤타에게 경의를 표하기에 바빴다.
상상이상으로 교단이 제국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고 깊었다.
“애초에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왜 숨겨야 하는 거죠?”
쿤타가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듯 타르칸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 그동안 샤르크에 짱 박혀 있었다고 그랬지? 거기는 그럴 수 있지. 드물기는 하지만 이방인들끼리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을테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있다마다. 아스너제국의 전역에서 플레이어가 사람을 죽였다는 제보가 끊이질 않고 있어. 이계 놈들. 자신들이 스스로 만드는 길드란 것을 제외한다면 단체도 규칙도 법도 없는 놈들이잖아? 거기다 소문으로는 죽지도 않는다면서? 인간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할 수밖에. 쓰레기 새끼들.”
쿤타가 불편한 표정이 되어 따라오고 있는 타레사와 슐트를 돌아보았다.
“앗! 혹시 들었어? 미안해. 들으라고 한 말이야.”
“아니. 신관님 전에부터 대체 말을 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타르칸이 발끈하는 타레사를 진정시켰다.
시덥잖은 말싸움을 해서 도움이 될 것이 없다.
지금 쿤타는 일부러 감정을 건드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타레사와는 달리 슐트는 차분했다.
슐트가 말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 갈수록 NPC들의 반응이 차가워지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지. 그런 이유였나? 뭐 애초에 플레이어들이 몬스터가 없는 대도시에 갈 일도 잘 없지만.”
슐트의 심심한 반응에 쿤타는 김이 새 버린 눈치다.
“그래. 그래서 대도시나 수도로 갈수록 이계의 인간을 보기는 더 힘들어.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고. 아마 샤르크도 수도에서는 이계의 인간을 보기 힘들 거야.”
확실히 쿤타는 성격은 고약하지만 세상 소식에 밝고 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다.
“자. 그럼 너희 세상 이야기 좀 해봐.”
“무슨 소리지?”
“이계라는 곳 말이야. 대체 어떤 곳이지 궁금하거든.”
“흠….”
“왜?”
쿤타는 후드 사이로 자신을 지긋이 쳐다보는 슐트의 눈빛에 얼굴을 구겼다.
“아니, 플레이어의 세상을 궁금해 하는 NPC는 처음 만나봐서 말이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높은 수준의 AI를 구현해 놓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자세히 좀 말해봐.”
“말 해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지. 어차피 지금 달리 할 일도 없으니. 그렇지 타레사?”
“야. 너는 자기가 이야기 할 것처럼 해놓곤 나한테 떠 넘기냐?”
타레사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대화의 주제가 생긴 것이 내심 기쁜 기색이었다.
“좋아. 어쩔 수 없지. 귀 열고 잘 들으세요. 성격 드러운 신관 아저씨. 하 뭐 부터 말해 줘야 하나….”
타레사가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르칸이 샤르크의 사막에서 들었던 황당한 이야기들이다.
의외로 쿤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간히 질문도 던져가며 중구난방인 타레사의 설명을 경청했다.
타레사가 하늘을 나는 강철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쿤타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세계에는 무려 하늘을 나는 배가 있다는 말이죠! 사실 배처럼 생기진 않았지만요”
“대단하군. 양력을 이용하여 떠오르는 건가?”
“양력? 그게 뭐에요? 뭐 어쨌든 이걸 저희는 비행기라고 부르는데 강철이 진짜 마법처럼 슝 하고 하늘을 난다는 거죠. 헤헤. 신기하죠?”
“비행기. 그 물체를 비행기라고 부르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긴 건지 그려줄 수 있나?”
타레사가 비행기의 외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때 잠잠히 듣고 있던 쿤타가 갑자기 그의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가방에서 손때가 가득 묻은 책 하나를 꺼내었다.
사실 책이라기보다는 종이들을 억지로 묶은 서류더미에 더 가까웠다.
쿤타가 바닥에 서류더미를 내려놓고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네가 말하는 비행기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쿤타가 타레사와 슐트에게 책을 보여주었다.
그가 온통 알 수 없는 도형과 문자들로 채워진 한 쪽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어?”
타레사가 탄성을 질렀다.
“맞아요! 저도 영화에서나 본 구식 모델이긴 하지만 분명히 비행기가 맞아요!”
쿤타가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나….”
타레사가 쿤타가 소중히 쥐고 있는 서류뭉치를 훔쳐보며 물었다.
“이거 어디서 구한거에요? 다른 플레이어가 그려 준건가요?”
“아니. 이건 내가 필사한 것이다.”
대답하는 쿤타의 표정이 묘하다.
광기 같은 희열이 보이는가 하면 한편으론 더 없이 슬퍼보인다.
“고대의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말이지….”
쿤타의 시선이 타르칸을 향한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냐?”
타르칸은 고개를 저었다.
쿤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쿤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타르칸은 다신 한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니까 쿤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이계인들은, 이름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자들이 아니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의 과거에서 온 자들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