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행 (2)
타르칸이 자신의 목에 걸린 ‘살아있는 뼈’를 가만히 말아 쥐었다.
갑옷을 입고 본격적으로 스킬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이들을 죽이고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지.’
하지만 그는 작은 검은 목걸이 ‘살아있는 뼈’를 다시 놓아버렸다.
‘여기서 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돼. 내 비밀만 누출될 뿐이다.’
제이가처럼 단순한 사람이 아닌 이상, 갑옷의 모습을 보이면 그가 바로 검은 땅 탐사에 동행했던 용소환사 타르칸이라는 사실을 들키게 될 것이다.
그의 행적과 능력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타르칸은 가만히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항복의 표시다.
“아. 이것 참. 두 분은 도저히 못 당하겠네요. 틈이 보이질 않아요.”
슐트가 가만히 말했다.
“포기가 빠른 녀석이군.”
“판단이 빠른 거라고 말해주세요.”
“뭐… 좋다. 이 정도면 충분히 쓸 만하군.”
쏜이 자신의 방패와 검은 인벤토리에 넣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우선 당신이 지켜야할 규칙에 대해 말해주겠습니다.”
“규칙?”
“타르칸씨도 우리들이 주기적으로 로그아웃. 그러니까 우리들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겠죠?”
“네. 알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올 때와 갈 때 당신들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는 것도요.”
덕분에 과거 칼날산맥에서 재미를 본적이 있었다.
타르칸의 살벌한 대답에도 플레이어들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타르칸씨는 우리가 로그아웃한 동안에는 그 자리를 지키도록 하세요. 만약 우리가 로그인 했을 때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도망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쏜이 경고했다.
“만약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요?”
“예를 들면?”
“뭐 몬스터나 다른 플레이어가 공격을 한다 던가….”
“걱정 마세요. 우리는 부활 포인트에서 로그아웃합니다. 그리고 부활 포인트는 비전투 구역이에요. 몬스터가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플레이어간에 전투도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부활 포인트만 찾아 다닐 수는 없잖아요.”
“맞아! 무엇보다 우리 목적지가 하늘나루이기도 하고 말이지.”
옆에서 타레사가 끼어들었다.
타르칸의 표정에 의하함이 떠오르자 그녀가 말을 보태었다.
“하늘나루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구역 안에는 부활 포인트가 없어. 간이 부활 포인트의 설치도 불가능 하지. 게다가 플레이어의 목적 없는 방문도 금지되어 있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늘나루 지역이 다음 확장팩과 관련이 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플레이어가 못 들어간다고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요?”
슐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방법을 찾아 봐야겠지. NPC로 분장하는 것은 이마의 계정코드 때문에 힘들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요즘에는 NPC들의 접근도 막고 있다고 하더군.”
타르칸에게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슐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하늘 나루에 들어가는 것에 성공한 플레이어들이 몇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두 신관이 준 퀘스트였지. 그러니 우리는 우선 하늘 나루에 볼 일이 있는 NPC 신관을 찾아야한다.”
“신관이 필요하다고?”
타르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를 기억 속에서 더듬고 있는 것이다.
‘그 녀석이라면…’
“그리고 또 하나.”
쏜이 타르칸의 상념을 깨며 말했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꺼내 타르칸에게 건네었다.
“항상 이것을 착용하도록 하세요.”
“이건….”
갈색의 가죽띠 중앙에 엄지손톱만한 푸른 구슬이 달려 있는 모양새다.
가죽의 한쪽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반대쪽에는 구멍 크기에 맞는 훅이 달려있다.
한눈에 봐도 어딘가 착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고, 인간이 사용하기엔 굴욕적인 생김새였다.
당연하다.
이건 애완동물이 길을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한 물건이었으니까.
“나보고 개목걸이를 차라구요?”
“도구를 한 가지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건 편견입니다. NPC님. 이 물건으로 실시간으로 위치가 파악되고, 목걸이가 벗겨졌을 때 즉시 알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 딱 알맞다고 할 수 있죠.”
“쏜! 이건 너무 하잖아요!”
타레사가 발끈했다.
하지만 쏜은 오히려 그런 타레사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예의가 바른 쏜이지만 그에게 있어 NPC는 그 ‘사람’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타레사. 고작 NPC일 뿐입니다. 아무리 디멘션 온라인이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점은 변함없어요. 너무 감정이입하지 마세요.”
“하지만 쏜이 직접 캐릭터가 인간화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캐릭터의 인간화죠. 캐릭터화 된 인간 ‘각성자’가 인간인 것처럼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능력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저 캐릭터에 불과 합니다. 아바타, AI, 폴리곤 덩어리, NPC 인거죠.”
타르칸이 쏜의 손에서 가죽목걸이를 낚아채었다.
쏜의 개소리를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그만하세요. 어차피 내가 풀면 그만 아닌가요?”
타르칸도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도 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었다.
‘언젠가 내 손으로 죽여주마.’
타르칸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렇게 자신만만하지만 쏜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고대신이라는 허상에 속고 있는 자다.
‘이용 하는 건 나야.’
그는 언제까지 플레이어들과 동행할지는 정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함께 하는 동안에는 마음껏 이용해 먹을 생각이다.
“하늘나루에 가는 것에 신관이 필요하다면 제가 한 명 알고 있어요.”
타르칸은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교단의 신관을 떠올렸다.
슈림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신관을 알고 있다고? 이 세계에선 굉장히 높은 사람 아니야?”
“정확히는 신관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지만요. 지금은 어떤지 확인해 봐야 해요.”
“흐음….”
“아마 지금도 아스너제국의 클라프영지에 있을 거에요. 그리고 또 하나. 하늘나루로 가기 전에 들려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있어요.”
그는 아직도 인벤토리 안에 잠들어 있는 트렌의 장인의 증표를 떠올렸다.
“아스너제국의 변방 클라프 영지. 그리고 제국의 수도에 가야해요.”
‘많이 늦어버렸지만… 약속은 지켜야지.’
트렌의 딸에게 손자 혹은 손녀의 이름을 전해달라는 퀘스트.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퀘스트는 취소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다.
‘트렌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그는 적어도 트렌의 딸에게 트렌이 남긴 장인의 증표만이라도 전달해 줄 생각이다.
슐트가 가볍게 말했다.
“뭐 어려울 것 없지. 아스너 제국 수도와 클라프 둘 모두 부활 포인트가 있으니까.”
슐트가 타르칸에게 작은 수정을 건네었다.
캐쉬 아이템인 순간이동 수정이다.
그는 작은 수정을 하늘에 비춰보았다.
캐쉬 아이템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 이 녀석들은 이게 있었지.’
“그럼 먼저 클라프 영지로 가도록 하죠.”
***
스네이크가 중국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호렌평야에서 하운드를 죽인 이후로 스네이크는 절대로 디멘션 온라인에 접속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아도 그저 아직은 때가 아니다 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 지금쯤 양치기가 저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겁니다. 당신들과 저의 사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디멘션 온라인에 접속해서는 안 됩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곧 다시 중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보니 아직 일이 마무리 되지 않은 모양이다.
호렌평야에서 하운드를 죽이고 난 뒤, 스네이크는 변했다.
이전처럼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 같이 굴던,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마치 연인이 질려 귀찮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스네이크에게 하동연과 시연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어쨌든 하동연과 시연, 둘의 일은 변하지 않았다.
디멘션 온라인 안에서 강해지는 것.
지금 당장은 그것뿐이다.
“동연씨.”
하동연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식사만은 제대로 하자는 철칙을 가지고 있다.
방금 전까지 나브가에서 몬스터를 학살하던 그가 지금은 주방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 이유다.
“동연씨 저거 봐요.”
방 정리를 하던 시연이 그를 불렀다.
“네. 시연씨.”
하동연이 주방수건에 젖은 손을 닦으며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건실한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그 실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둘은 이상적인 한 쌍으로 보인다.
“저 뉴스… 그거 맞죠?”
시연은 거실에 비치된 대형 TV를 가리켰다.
‘전 세계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형 동물들.’이라는 제목의 해외토픽이 방송되고 있다.
발이 달린 거대 뱀, 이마에 뿔이 달린 멧돼지, 발 대신 칼 같은 날이 달린 새 등.
기괴하지만 익숙한 모습들이다.
“몬스터….”
디멘션 온라인의 몬스터들이 확실하다.
“스네이크가 말한 그때가 가까워지고 있네요.
각성자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각성자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각종 사이트와 영상공유 플랫폼에 하루가 멀다 하고 업로드 되고 있다.
대부분은 단순히 합성영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영상의 양이 많아질수록 점차 영상의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중에 일부 눈치가 빠른 자들은 영상의 각성자들이 사용하는 힘이 디멘션 온라인의 스킬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 챘다.
디멘션 온라인의 동시접속자수는 연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고, 튜토리얼이 이루어지는 시작의 섬은 이미 모두 포화상태가 된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드디어 몬스터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대부분 2단계 게이트네요.”
“하지만 우리들은 디멘션 온라인의 NPC 처럼 마나를 느끼는 힘이 없습니다.”
인간은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
캐릭터의 능력을 각성한 자라 할지라도.
때문에 주민 스스로가 저단계 게이트를 닫는다는 그랑대륙의 방식은 사용할 수 없다.
몬스터의 위치와 몬스터게이트의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스네이크의 말로는 앞으로 감지계열 직업이 각광 받게 될 거라더군요. 감지계열을 중심으로 소규모 팀으로 움직이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 동연씨. 저는 그 사람이 싫어요.”
하동연이 가만히 시연의 어깨를 감쌌다.
젊은 남녀가 오랜 시간 함께 하면 애뜻한 마음이 싹트기 마련이다.
어느새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사이가 되어 있었다.
시연의 어깨에 닿은 동연의 손길이 따듯하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사랑에 시연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녀에게는 각성자가 생기는 것, 몬스터가 나타나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녀는 스네이크라는 남자가 어렵게 찾은 이 행복을 모두 한순간에 깨부술 것이 두려웠다.
하동연이라는 남자를 잃을 것이 두렵다.
그가 그녀가 아닌 것의 외모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시연씨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하동연이 그녀를 따듯한 눈동자로 쳐다본다.
그의 눈동자 위에 한 여인이 비친다.
과거 그녀의 캐릭터였던, 지금은 그녀의 모습이 된 여인.
대부분의 게임캐릭터가 그러하듯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완벽한 외모의 게임캐릭터가 비친 하동연의 눈동자가 사랑스러운 반달을 그린다.
그 사실이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동연씨… 동연씨는 제가 왜 좋은가요?”
“네? 허허… 갑자기 물으시면..”
하동연이 답지 않게 부끄러워했다.
그가 몸을 비비 꼬며 말했다.
“그거야 시연씨는 예쁘시고, 아름다우시고 귀엽기도 하고… 쑥스럽습니다!!”
“네에….”
시연의 표정이 잠시 침울해졌지만 곧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이제 밥 먹어요! 빨리 더 강해져야죠.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전에.”
“네! 시연씨!! 세상을 위해!”
“세상을 위해!”
유치한 구호를 하며 두 남녀가 마주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