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PC 라불리었다-60화 (60/215)

사냥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타르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용병등급도 실버 등급이고… 정수까지 나오면 흐흐흐.”

그는 아직 바위비늘전갈에게서 얻은 전리품 상자를 확인해 보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가 경건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볼 생각인 것이다.

정수의 원형이 나오기만 한다면 생전에 하지 않던 기도도 충분히 할 의향이 있다.

“이제 정수를 먹일 아이템을 슬슬 구하면 되겠다. 크크”

그때 지도에 의지하여 마을로 향하던 그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스쳤다.

익숙한, 하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은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타르칸이 발을 멈추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가 타는 냄새인데?”

틀림없다.

오래된 나무가 탈 때 나는 특유의 냄새가 공기 중에 은은하게 섞여있다.

그리고 이 방향이라면 분명 마을이 있는 쪽.

타르칸이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이아!’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화재의 냄새가 강해진다.

먼 곳에 붉은 불길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인다.

지친 타르칸이 인벤토리에서 회복물약을 꺼내 마시며 다시 속도를 올리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때, 그는 사막 위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허공에서 나타난 듯.

그가 인지하는 순간 그 사람은 어느새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쟌?”

얼떨떨하게 반문하는 타르칸을 향해 쟌이 미소지었다.

평소와 같은 발랄한 미소였다.

“안녕. 타르칸?”

“쟌씨. 쟌씨가 어떻게 여길….”

쟌은 대답 없이 무언가를 타르칸을 향해 던졌다.

보잘 것 없이 땅에 철푸덕 떨어져 내린 그것은 펭귄의 모습으로 피투성이가 된 가이아였다.

“가이아!!!”

타르칸이 황급히 가이아를 일으켜 세웠다.

상처가 깊다.

그는 서둘러 회복물약 꺼내어 가이아의 몸에 뿌리기 시작했다.

난자된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쟌이 슬며시 웃었다.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지만… 더 재밌는 걸 발견해서 말이야.”

그녀는 붉은 액체가 든 작은 플라스크를 자랑이라도 하듯 흔들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가이아와 붉은 액체가 든 플라스크.

정황상 가이아의 피를 담아 놓은 것으로 보인다.

“쟌! 이게 무슨 짓이야!!”

“어머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이니까?”

쟌이 능청스럽게 윙크했다.

이전에 용병관리소에서 보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모습이다.

타르칸이 위협을 하기 위해 언월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쟌은 피하거나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타르칸의 언월도가 쟌을 베고 지나갔다.

아니, 베었다고 생각했다.

“환영마법?”

언월도가 지나갔음에도 흔적조차 남지 않는 쟌을 보며 그는 며칠 전 지하실에서 발견했던 비밀문을 떠올렸다.

당황하는 타르칸을 보며 쟌은 조소했다.

“어머 무서워라. 가영 언니가 그렇게 가르켰니? 언니가 보면 슬퍼하겠다 얘.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그 귀한 아가씨는 잘 부탁해?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맡기는 거니까. 알았지?”

마치 오랜 지인에게 건네는 말투 같았다.

쟌의 환영은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타르칸은 피투성이가 되어 떨어 있는 가이아를 안고 한동안 멍하니 드넓은 사막을 바라보았다.

“가엔? 쟌이 어떻게 어머니의 이름을….”

***

마을로 돌아왔을 때, 불길은 어느 정도 잡혀있었다.

그는 우선 방으로 돌아가 가이아를 살폈다.

회복물약의 효과 덕분인지 한결 안정된 모습이다.

가이아를 침대위에 눕힌 타르칸은 곧바로 화재현장으로 달려갔다.

화재가 발생한 곳은 두 곳, 바로 얼마 전 토벤이 발견한 지하실과 용병관리소였다.

타르칸을 발견한 듀라와 휴러드가 다가왔다.

“타르칸. 어디에 있었나? 괜찮아?”

“네. 의뢰를 해결하고 오는 길입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쟌… 그년이 후우….”

듀라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타르칸의 질문에는 옆에 서 있던 휴러드가 대신 대답했다.

“아무래도 쟌이 마탑의 마녀이었던 모양이다.

“마탑의 마녀요?”

“그래… 토벤의 지하실에서 발견된 그 끔찍한 일도 아마 쟌이 벌인 일이었겠지.”

마탑은 배일에 싸인 단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마탑은 공포의 대상이다.

종종 세상에 숨어든 마녀들이 잔혹한 인체실험을 벌이곤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마녀를 잡으면 곧바로 불에 태워 죽인다.

하지만 마탑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고 있다.

마탑의 근거지를 알지 못하는데다 마탑에 속한 마녀들의 마법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순수한 파괴력만 따진다면 마탑은 하나의 국가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탑을 없애기에는 마탑이 판매하는 지도와 각종 아이템들이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너무나 유용하다.

인체실험을 하는 마탑의 마녀가 없다면 아이러니 하게도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때문에 마녀들은 일반인들에게는 인간의 탈을 쓴 몬스터, 나라의 입장에서는 필요악으로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 저녁 어느 여자 모험가가 쟌을 찾아왔다. 그 순간 그년이 갑자기 본색을 드러냈지.”

온 몸이 불에 그슬린 듀라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렇게 가까이에 마녀가 숨어 있었는데도 눈치 채지 못했다니! 젠장!”

“여자 모험가요?”

“그래.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꽤 훌륭한 단도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험가와 잠시 이야기는 나누는가 싶더니 갑자기 쟌이 양손에서 불을 뿜어대기 시작하더군.”

듀라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듀라가 말하는 여자 모험가는 아마도 변신한 가이아일 것이다.

쟌을 의심하던 가이아가 그녀에게 접근하다 변이 생긴 모양이다.

휴러드가 듀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녀가 작정하고 속이는 걸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어? 자. 이제 불도 다 잡혔으니 일단 좀 쉬도록 해. 내가 깨끗한 방으로 내어 줄 테니 말야.”

“후우 고맙네… 휴러드… 아참. 타르칸. 의뢰를 해결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었지. 무슨 의뢰였지?”

“남쪽 사막의 바위비늘전갈을 사냥하고 왔습니다.”

타르칸이 등에 매어두었던 사자머리를 닮은 전갈의 꼬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듀라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확실히 바위비늘전갈의 꼬리야. 하지만 그런 의뢰가 있었던가? 미안하지만 의뢰서를 볼 수 있을까?”

그는 품속에서 쟌에게 받은 낡은 의뢰서를 꺼내어 듀라에게 건네었다.

의뢰서를 살펴보던 듀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시죠?”

“하 쟌… 이 찢어 죽일… 타르칸… 이건 용병연합에서 발행한 의뢰서가 아니야. 여기 인장을 봐.”

듀라가 다른 의뢰서를 꺼내어 타르칸의 것과 비교하여 보여주었다.

확실히 바위비늘전갈을 사냥하라는 의뢰서에 찍힌 인장과 미묘하게 다른 생김새다.

“이건….”

“그래. 위조다. 간악한 마녀가 별 짓을 다하고 갔군. 젠장.”

“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보상이나 용병등급은요?”

듀라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위조된 의뢰서에 보상을 줄 수는 없어 타르칸.”

“뭐라구요?”

“미안하다.”

“하아… 이런.”

그 전갈 몬스터를 잡기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다니.

아 모두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니다.

아직 그에게는 열지 않은 전리품 상자가 남아 있으니.

“네.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지금 듀라에게 따져봐야 될 일도 아니다.

포기해야 할 부분은 빠르게 포기하는 편이 더 좋다.

“저 그리고 타르칸.”

휴러드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 중에 네가 마녀와 한패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타르칸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억울함을 호소해 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이 마을에는 더 이상 머물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는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가니 가이아는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타르칸… 미안해. 조심하려고 했는데….”

“몸은 좀 괜찮아?”

“응….”

“쟌은… 쟌이 마녀였어?”

“맞아.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그 자식이 너의 피를 가져가는 것 같던데?”

가이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마녀는 나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어.”

“너의 정체? 아… 그 서버의 인격이라는?”

“확실해. 마녀들은 이미 디멘션온라인의 시스템과 서버에 대해 알고 있어.”

가이아의 정체와 디멘션온라인에 대해 아는 단체.

그리고 쟌이라는 마녀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마탑은 교단만큼이나 의심스러운 단체다.

‘마탑과 마녀라…’

그는 순간 마탑의 마녀들과 몇 번이고 다시 부딪치게 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

“여깁니다! 시연씨!!”

제이가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많은 사람이 있는 광장이었지만 그런 그를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제이가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고, 그런 차림의 플레이어는 매우 흔했으니까.

제이가를 알아본 쉬엔, 아니 시연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그들이 게임 속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다.

제이가 하동연의 도움으로 한국 국적을 획득한 그녀는 새롭게 생성된 주민번호로 새 아이디를 만들었다.

캐릭터 아이디는 시엘라.

순전히 제이가의 취향에 맞춘 아이디다.

그녀는 아이디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타입이었으니까.

(이전 캐릭터인 야만전사의 아이디는 황금멧돼지였다.)

“시연씨는 커스터마이징을 거의 안하셨군요.”

제이가가 막 전직을 마친 시연의 캐릭터를 보고 감탄했다.

머리 스타일과 색 정도를 제외하면 현실의 시연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황금멧돼지 만들 때는 커스터마이징 하는 데만 5시간이 넘게 걸렸으니까…’

그렇게 공들여 만든 얼굴과 몸매가 지금은 그녀의 현실이 되었다.

때문에 시연은 그녀의 원판에서 삼합길드원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만 아바타를 수정했다.

“어떻게 된 것이 시연씨는 현실이 더 아름답습니다. 하하하.”

제이가 하동연이 바보처럼 헤헤거렸다.

시연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제이가의 팔을 잡아 끌었다.

“게임이란 거 너무 어렵네요. 시작의 마을에서 아주 혼났어요.”

시연이 짐짓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요즘 태어나 처음으로 애교란 것을 배우고 있다.

몸무게가 3자리수를 넘어가던 과거에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너무 자연스럽다.

제이가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제가 시연씨. 아니 시엘라님을 지키겠습니다!!”

“어머. 고마워요. 제이가.”

“하하하하”

요즘 제이가는 행복하다.

개인방송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것은 물론 얼마 전에는 국방부 산하의 국가단체에서 영입제의도 받고 있다.

부와 명예.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착하고(순전히 그의 생각에) 예쁜 여인과 인연이 닿다니.

‘크으 내 인생. 파이팅.’

제이가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사막의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시작의 섬에서 그 녀석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뀌었지.’

“그럼 가볼까요? 최고의 폭렙업 루트로 모시겠습니다. 파하하.”

제이가가 웃으며 시엘라를 바라보았을 때다.

‘음?’

제이가는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운 시엘라의 모습 뒤로 스쳐 지나가는 한 소년을 쳐다보았다.

먼지가 낀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은 지금 막 나브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 뒷모습 어디선가 본적이…’

갑자기 묘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쳐다보는 제이가를 향해 시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닙니다.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착각했나 봅니다….”

“아하. 네… 아무래도 제이가님은 인기인이니까요. 제이가님의 팬 중에 한명 아니었을까요?”

“하핫.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래. 시작의 섬 히든 NPC인 그 녀석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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