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NPC 라불리었다-41화 (41/215)

빼앗긴 마을 (1)

“피 냄새다.”

에드가가 코를 킁킁 거리기 시작했다.

젠슨 역시 한발 늦게 비릿한 피 냄새를 느꼈다.

너무 멀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피 냄새는 아니다.

“확인해 보자.”

젠슨과 에드가가 빠르게 달려나갔다.

피 냄새를 쫓아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것은 엄청난 숫자의 코카투스의 시체들과 그 옆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20명가량의 사람들이었다.

“뭐야 이게.”

거인이 장난이라도 치고 간 듯 난폭하게 찢겨져 있는 코카투스의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젠슨과 에드가를 발견한 사람들이 그들에 다가왔다.

“저 혹시. 기사님들이십니까?”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제국 기사의 상징을 알아본 모양이다.

“제, 제발 도와주십시오!”

에드가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들을 도울 능력은 없는데?”

“아… 코카투스들은 저희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게. 꼭 검은 해골 같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서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사라졌습니다.”

“몬스터를 죽이고 사라졌다고?”

“네.”

에드가가 턱을 쓰다듬으며 주변 상황을 둘러봤다. 단신으로 코카투스들을 다 도륙하다니, 그 정도의 실력자가 흔할 리가 없었다.

“흐음… 검은 해골 갑옷이라….”

젠슨과 에드가는 순간 프롬 숲에서 만난 인간들을 떠올렸다.

“이계의 인간인가….”

젠슨의 중얼거림에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기사님 알고 계시군요!”

“알고 있다니 뭘?”

에드가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내가 피를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이계의 놈들이 마을을 빼앗았습니다!”

“뭐?!”

***

칼날산맥의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분지.

그곳에 작은 산골 마을이 있다.

칼날산맥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칼날둥지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도시보다 위험한 몬스터의 출몰이 잦은 칼날산맥이지만 산맥에서 자생하는 약초가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 때문에 생겨난 마을이다.

칼날둥지마을은 일년에 한 번 꼴로 행해지는 몬스터 게이트 토벌을 의지하며 때로는 사비로 용병을 고용하기도 하면서 벌써 몇 십년동안 위태로운 평화를 지켜나가는 곳이었다.

그 산골 마을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온 것은 몇 달 전이다.

“어이. 이거 수리해놔. 한 시간 뒤에 다시 나간다.”

까앙.

늘씬한 몸매의 근육질의 미인이 바닥에 도끼를 거칠게 내팽겨 쳤다.

도끼는 그녀의 발달한 근육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거대했다.

“…네.”

작은 소녀가 힘없이 대답하고는 낑낑대며 자신의 몸만한 도끼를 끌고 갔다.

“야! 이 새끼야!! 바닥에 끌리잖아! 흠집 생기면 니가 책임질꺼야?!”

거대한 도끼를 사용하는 여성 플레이어, 차이 쉬엔이 버럭 소리 질렀다.

쉬엔이 화를 내자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커다란 도끼를 들기 위해 낑낑대며 용을 썼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자신의 도끼를 들고 가는 메마른 소녀를 보며 쉬엔이 얼굴을 구겼다.

“너희 NPC 놈들은 화를 안내면 말을 안 듣지? 왜 내 성질을 버리게 만들어? 야! 수리한 뒤에 독초 먹인 천 감아놓는 거 잊지 마! 두 번 말하게 하면 죽는다.”

쉬엔의 살벌한 말에 소녀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쉬엔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누님. 사냥은 잘 하셨습니까?”

“아. 말도 마. 산맥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몬스터들이 우글우글거려.”

“그 말은….”

“뭐긴 뭐야. 이제 본격적으로 한 몫 잡을 때라는 거지.”

드넓은 칼날산맥은 갈수록 뜨고 있는 핫한 사냥터다.

막 튜토리얼을 완료하고 본토로 넘어온 플레이어를 위한 2, 3단계 게이트 몬스터는 물론 4단계와 가끔은 5단계 게이트의 몬스터도 발견되는 곳.

즉, 포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곳이다.

때문에 이미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칼날산맥에서 플레이하고 있다.

하지만 칼날산맥에도 단점이 있는데 퀘스트나 장비수리와 같은 NPC의 서포트를 받기 힘든 곳이라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광대한 산맥에 마을이라곤 칼날둥지 마을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쉬엔의 길드가 다른 대형 길드보다 먼저 이 마을을 발견한 것은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길드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로 몰릴 거야. 그전에 우리 삼합길드가 선점한다. 잡화점, 여관이며 전부다. 이번 일만 잘만하면 부길드장 까지도 노려볼 수 있어.”

쉬엔이 속해 있는 삼합길드는 세계 5위이자 중국 1위의 거대 길드다.

쉬엔의 눈빛이 야망으로 번들거렸다.

삼합길드가 중국의 마피아와 줄이 닿아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중국 1위 길드의 부길드장은 현실세계에서도 엄청난 권력을 누릴 수 있다.

아무리 인기가 있다지만 고작 게임에 마피아가 개입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쉬엔에게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게임에 소질이 있는 그녀에게는 이번이 그녀의 인생을 바꿀 기회였다.

“아시겠지만 다른 길드들도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러시아와 미국 정부가 디멘션온라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길드원의 말에 쉬엔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걱정 마. 우리에게는 충실한 노예들이 있잖아?”

“네 그렇긴 하죠.”

쉬엔을 따라 길드원 역시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난 잠시 로그아웃했다 다시 올게. 접속한 뒤에 바로 오크 사냥 갈 거니까 파티원 준비 해 놓고.”

“네 알겠습니다. 누님!”

길드원의 기운찬 대답을 들으며 쉬엔은 로그아웃했다.

그녀의 시야가 보랏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눈앞에 접속 캡슐의 뚜껑이 보인다.

“끙차.”

쉬엔이 힘겹게 접속 캡슐을 열고 땅으로 내려섰다.

쿵.쿵.

그녀가 걸을 때마다 방음이 되지 않는 구식 아파트의 바닥이 크게 울렸다.

아래 층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아래층에 사는 늙은이는 병적으로 예민한 사람이다.

하루에 몇 번 움직이지도 않는 그녀의 움직임에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쉬엔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가득 쌓아 놓았던 인스턴트 식품들이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다.

다시 주문을 할 때가 된 것이다.

전자레인지에 인스턴트 식품을 넣으며 쉬엔은 중얼거렸다.

“빨리 로그인 해야 하는데.”

그녀는 로그아웃 할 때 마다, 그러니까 디멘션온라인 속의 늘씬한 미녀가 아닌 현실의 자신을 마주 해야 할 때마다 거대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자극적인 인스턴트 면을 입안에 밀어 넣으며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빨리 로그인 해야 하는데.”

***

잠시 후 디멘션 온라인 속으로 돌아온 쉬엔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온 몸에 활기가 돈다.

그녀는 큰 소리로 호탕하게 외쳤다.

“어이! 무기 가져와!!”

쉬엔이 사납게 소리 지르자 볼품없이 메마른 소녀가 비틀거리며 그녀의 도끼를 들고 다가온다.

소녀의 손에서 거칠게 도끼를 낚아챈 쉬엔이 거대한 도끼를 살펴보았다.

날이 날카롭게 서 있다.

쉬엔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NPC도 숙련도가 있는 건가? 실력이 늘었잖아.”

“가, 감사합니다.”

쉬엔은 부들부들 떠는 소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문 밖으로 나갔다.

마을은 온통 공사 중이다.

쉬엔을 발견한 한 길드원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누님 오셨습니까? 식사는 잘 하셨어요?”

“그래. 대장간이랑 여관은 잘 만들어지고 있어?”

“에이 뭐. 굳이 잘 만들 필요 있나요. 구색만 갖추면 되죠. 어차피 좀 쓰다 버릴 건데.”

맞는 말이다.

디멘션온라인에서 플레이어는 어차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도록 디멘션소프트에서 애초에 컨셉을 그렇게 잡아 놓았다.

몬스터의 리젠이 몬스터 게이트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경험치를 1도 안주는 먼지 도깨비가 나오는 1단계 게이트가 2단계 게이트가 되기까지 몇 달이 걸린다.

시작의 마을에서나 사냥하던 바로 그 2단계 몬스터 말이다.

몬스터 게이트를 부수지 않고 유지 시키는 것도 힘들다.

게이트가 일정 범위 내에서 이동하는데다가 게이트를 부술 때 막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우리 길드도 게이트를 독점하려고 했었지만 통제가 되지 않았지. 다른 길드의 암살자 클래스의 몬스터 게이트 털이를 막을 방법이 없으니….’

결론적으로 안정적으로 비슷한 등급의 몬스터 공급이 이루어지는 일명 '사냥터'는 디멘션온라인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던전 마저도 입구의 위치가 수시로 바뀐다.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레벨업을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한다.

몬스터가 있는 곳을 향해.

“그래. 그래도 우리가 써 먹을 동안에는 무너지지 않게 해놔.”

하지만 괜찮다.

그랑대륙은 충분히 넓으니까.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랑대륙의 넓이는 중국과 인도를 합친 것 보다 크다고 한다.

게임에 구현된 맵 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크기다.

“네 알겠습니다.”

저 길드원은 현실에서 건축업에 종사한다.

이 칼날둥지마을에 필요한 건물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플레이어는 스스로 건물을 지을 수 없지만 그 문제는 NPC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

“야!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내가 말했잖아!!”

길드원이 목재를 들고 있는 NPC에게 사납게 소리 질렀다.

쉬엔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 길드원 덕분에 이 칼날둥지마을에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은 21세기의 지구의 건축양식을 닮아 있었다.

이곳을 찾는 플레이어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줄 것이다.

“아오!!! 답답한 NPC 새끼!! 인공지능이 후달리냐!”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는 길드원을 뒤로하고 쉬엔이 사냥터를 향해 걸어갔다.

실제로 그가 속한 삼합길드의 길드장이자 마피아 삼합회의 회장은 디멘션온라인을 MMORPG가 아니라 일종의 경영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NPC들을 어떻게 장악하고 굴리느냐가 이 게임의 핵심이라는 거지.’

앞으로 유저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되면 NPC의 나라와 마을 근처에는 몬스터의 씨가 마르게 될 것이다.

때문에 레벨이 오를수록 플레이어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가지 않았던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바로 고레벨의 몬스터가 있는 곳.

또한 그 누구도 살지 않는 곳.

삼합길드는 그 시점에 NPC 노예들을 이용하여 플레이어들이 모이는 곳에 마을을 건설 할 계획이다.

‘진정한 의미의 시장독점이 가능하다.’

삼합길드의 길드장이 한 말이다.

쉬엔은 전율했다.

그분만 따라 가면 자신의 인생은 보장된다.

쉬엔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 게임의 승리자는 레벨이 높은 자가 아니다. NPC를 장악하는 자다.’

마을의 입구에 도착한 장위엔이 입구 옆에 서있는 NPC에게 말했다.

“야. 퀘스트.”

“…네.”

“오크 사냥 퀘스트로.”

“알겠습니다.”

더 이상 NPC에게서 받아낼 보상은 없지만 퀘스트를 해결하면 추가 경험치를 받을 수 있다.

때문에 길드원들은 항상 퀘스트를 받고 사냥을 간다.

받는다기 보다는 짜낸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쉬엔은 퀘스트를 생성하기 위해 배경을 말하고 있는 NPC를 위 아래로 살폈다.

자꾸만 눈이 가는 미남이다.

생김새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디멘션온라인의 NPC이지만 어디에나 그렇듯 소수의 미인과 미남은 존재한다.

이 NPC를 마을의 입구에 새워둔 이유였다.

쉬엔이 NPC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뱀이 기어가는듯한 불쾌한 느낌에 NPC가 움찔거린다.

쉬엔이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자신 앞에서 무력하게 떨고 있는 미남 NPC를 보니 위험한 충동이 솟아오른다.

동시에 사용하지도 못할 성기를 만들어 놓은 디멘션소프트의 개발자에게 절로 욕이 나왔다.

'뭐,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쉬엔이 음흉하게 웃으며 NPC를 쳐다보았다.

“사냥 갔다와서 보자. 이쁜이.”

그녀의 뒤로 4명의 길드원이 줄지어 섰다.

이번에 사냥을 같이 나갈 파티원들이다.

“우선은 도망간 NPC 놈들을 잡아온다. 요즘에 마을에 일손이 딸리는 모양이야. 오크 사냥은 그 다음이다. 알겠냐?”

“네!”

시원한 대답에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