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
시작의 마을은 초토화가 되어있었다.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집들이 부서져 있어 이제는 마을이라기보다는 폐자재 더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일 정도다.
역시 마을에도 이계의 인간, 플레이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타르칸을 발견한 마을의 NPC들이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마을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아도 타르칸이 피델을 부수고 그 검은 덩어리에게서 자신들을 자유롭게 만든 사람임을 알아봤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씩 역할을 맡고 있는 마을의 특성상, 마을의 주민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왠지 민망해지 타르칸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섬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트렌 아저씨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왔냐?”
“네.”
트렌은 지친 모습으로 광장의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그의 장대한 기골만큼이나 처량해 보인다.
몸을 제어하고 있을 때 억지로 입을 열어 도망치라고 외친 것이 몸에 큰 부담을 안긴 것이다.
“끌끌. 늙으면 죽어야지.”
타르칸은 말없이 트렌을 쳐다보았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우와!”
그때, 마을의 한쪽 귀퉁이에서 함성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돌아보니 한 청년이 감격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의 바깥에 서 있었다.
“이리와 수잔. 이제 우리는 자유라고!!”
청년이 자신의 뒤에 서있는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여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의 얼굴에 용기를 얻고 한 걸음을 내딛는다.
마을의 경계를 넘어갔지만 고통도, 몸이 굳어가는 공포도 없다.
그제야 여인의 얼굴이 아름답게 피어났다.
폐허 위에서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맞잡았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지 아니면 이 마을에서 처음 만난 사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삶은 계속되고 있었나보다.
이런 곳에서도.
타르칸이 복잡한 눈으로 두 남녀를 쳐다보았다.
트렌이 그런 타르칸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고맙다. 그 괴물 놈을 대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우리들을 살렸어.”
타르칸은 당황했다.
자신이 이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는 것이 맞는 일인지 알 수 없고.
또 누군가가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저,
“네….”
하고 대답했다.
트렌은 묻지 않았다.
타르칸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말 그랑대륙으로 돌아갈 수 있는것이지.
자신이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도 그랑대륙에 같이 갈 수는 없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갈 거냐?”
“네.”
“…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트렌이 무언가를 찾아 힘겹게 자신의 품을 뒤졌다.
“끄응….”
트렌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철판이었다.
트렌은 그것을 타르칸에게 건네었다.
독수리 모양의 철조각 중앙에 망치와 모루가 새겨져 있다.
“아스너 제국 최고의 장인들에게만 주어지는 증표다.”
제국에서 인정하는 기술자들에게 수여하는 증표에 대해서는 타르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증표를 받는 장인들이 워낙 소수이기 때문에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바로 이 몸의 것이지.”
트렌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실제로 저 증표를 받았다는 사실은 가문의 자랑으로 여길만한 일이다.
“타르칸 부탁이 있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이면 내 딸이 아이를 낳았을 거야. 그런데 내가 이런 곳에 끌려오는 바람에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버렸지 뭐냐.”
타르칸이 무심결에 철판을 뒤집어 보았다.
아스너 최고의 장인임을 나타내는 인장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아멜리아’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작은 글자 주위에만 덕지덕지 손때들이 묻어 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홀로 딸의 이름을 쓰다듬었을까?
“아멜리아. 예쁜 이름이지?”
타르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손자라면 아델. 손녀라면 멜리라고 이름 붙여줄 생각이었지.”
트렌이 간절한 눈으로 타르칸을 쳐다보며 말했다.
“수도의 하얀 모루 대장간으로 가서 아멜리아에게 아기의 이름을 알려다오. 이 증표를 보여주면 딸도 내가 보낸 사람이란 걸 믿을 거야.”
“네.”
[퀘스트 발생]
대장장이의 딸에게 아기의 이름을 알려주어라.
-완료 보상 : 없음.
“물론이죠.”
타르칸이 웃으며 장인의 증표를 품에 넣었다.
이제 정말 이 섬을 떠날 시간이다.
[전직을 완료하였습니다. 스타팅포인트를 선택해주세요.]
타르칸이 마지막으로 트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제 앞으로 뭐 하실 거예요?”
타르칸의 질문에 트렌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너털웃음을 지었다.
“글쎄. 이제 그 괴물 놈도 없고… 이계의 인간들도 더 찾아오지 않으니… 뭐 여기에 터를 내리고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마을 밖에 코코나열매도 많고 말이야. 거 예쁘장한 할멈이나 한 명 있으면 딱이겠구만. 허허허”
트렌의 대답에 타르칸도 피식 웃었다.
“그것도 좋네요. 그 잡화점 누나는 어때요? 미인이시던데.”
“몸만 빠른 줄 알았더니 여자 보는 눈도 빠르구만. 크하하하하.”
“하핫. 더 늦기 전에 서두르셔야 할 걸요?”
트렌과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가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기 때문이다.
“잘가라 타르칸.”
“네. 건강하세요.”
[전직을 완료하였습니다. 스타팅포인트를 선택해주세요.]
“프롬 숲에서 시작하겠다.”
[스타팅포인트로 아스너 제국의 프롬 숲을 선택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래.”
“후아. 이것도 일이네. 일.”
하얀 원숭이 가면을 쓴 남자가 기지개를 펴며 투덜거린다.
가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길게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심하군. GM이라는 작자가. 너랑 같은 GM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그의 옆에 서있던 글레머러스한 체형의 여자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그와는 달리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정장 차림이다.
얼굴에는 그의 가면과 같은 재질의 개의 머리를 닮은 가면을 쓰고 있다.
“한심하다니 말이 심하잖아….”
“언제나 안일한 피테쿠스 너의 모습이 나를 화나게 만든다.”
GM의 숫자는 총 12.
각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즉 12간지의 동물을 담당하고 있었다.
GM명 역시 담당하고 있는 12간지의 동물과 관련된 것으로 정해진다.
그는 9번째 동물인 원숭이로 GM피테쿠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름이 피테쿠스라니 무슨 벌칙도 아니고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럴듯한 이름을 줘놓고 왜 나만.’
“저기 하운드. 그 말투 어떻게 좀 안 돼?”
하운드는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들어갈 데는 들어가고 나올 데는 확실하게 나와 주는 몸매다.
때문에 피테쿠스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실제로 만난 적이 있거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저런 몸매를 가진 여자를 단 한번이라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면 그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언제나 디멘션 온라인 안에서만, 그것도 가면을 착용한 상태에서 만나는 그들이다.
“저기 하운드. 견원지간이라는 말이 있고. 우리가 하필이면 그 개랑 원숭이 포지션인건 알겠는데. 우리가 그 역할에 그렇게까지 심취할 필요는 없지 않아? 누가 보면 우리 싸운 줄 알겠어.”
“가소롭군. 너 따위가 감히 나와 싸울 정도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운드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피테쿠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GM이란 놈들은 하나 같이 사이코들만 있냐….’
그러는 본인도 그 GM들 중 한명이지만.
피테쿠스가 무료한 눈동자를 돌려 폐허가 된 마을을 쳐다보았다.
잔해만 남은 마을과 숲을 보랏빛 안개가 뒤덮고 있다.
한때 7번 시작의 마을이라 불리던 곳.
이제는 그 어떤 생물도 남아 있지 않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키 큰 늙은 대장장이 NPC가 반격할 때는 조금 놀랐지.’
NPC가 GM을 공격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임의 데이터를 수정하기 위해 데이터를 게임 상에서 죽여야 한다는게 말이냐 방구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하운드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하운드 이거 진짜 이상하지 않아?”
“귀찮군. 무엇이 말인가?”
“디멘션 온라인은 게임이잖아. 아무리 리얼해도 결국은 데이터로 구성되었다는 거지. 그런데 이런 방법으로 서버를 정리 한다는 게 말이 되냐? 데이터를 삭제 한다던가 초기화 한다던가… 아니면 그냥 이 7번 시작의 섬에 접속을 차단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운드는 말없이 물끄러미 이세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타깝군. 정말 모두 다 잊은 거냐? 너는.”
“뭐?”
잊다니 뭘?
그때 숲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호리호리한 체구에 검은색의 긴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가 웃으며 숲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GM스네이크.
그 이름에 걸맞게 뱀을 닮은 가면을 쓰고 있다.
“스네이크. 뭐 찾은 거라도 있어?”
“네. 숲에서 아주 재밌는 것을 발견했죠.”
스네이크가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었다.
유리병 안에는 검은색의 걸쭉한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그건… 그림자 호랑이의 사체인가?”
“역시 피테쿠스. 지혜로운 원숭이의 화신답습니다.”
“우리 웬만하면 GM명은 부르지 말자고… 그래. 그래서 그 그림자 호랑이의 사체가 뭐 어쨌는데?”
“그림자호랑이의 사채에서 몇 가지 종류의 약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독의 조합을 보았을 때 아주 노련하고 비열한 사냥꾼에게 당한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주 특이한 독이 한 종류 있더군요.”
“특이한 독?”
“네. 바로 현무의 독입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하운드가 움찔했다.
“현무?”
“네. 저도 믿기지는 않지만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하운드와 스네이크가 심각한 표정(보이진 않지만 아마도)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뭐. 현무가 어쨌는데?’
피테쿠스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지만.
그도 현무가 뭔지는 알지만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싶었다.
그저 사방신들도 게임 상에 구현이 되어 있었나보다 하고 생각할 뿐.
“믿을 수 없다. 현무의 독이 나타났다는 것은 설마 그들이 움직인다는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아둔한 전능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잔재. 혹은 신물이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테이크의 대답에 하운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이크가 피테쿠스와 하운드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 일은 제가 상부에 보고 하겠습니다. 7번섬의 관리자를 죽인 그 버그 플레이어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운드님과 피테쿠스님은 각자 그 버그 플레이어를 추적해 주십시오.”
“그래 알겠다.”
결연한 표정(보이진 않지만 아마도)의 하운드와는 달리 피테쿠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아. 귀찮아 질 것 같더라니….’
속으로 궁시렁 거리는 피테쿠스를 향해 스네이크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테쿠스님. 추적을 시작한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응? 음… 글쎄.”
스네이크의 물음에 피테쿠스가 잠시 고민하더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 버그 플레이어도 플레이어니까. 튜토리얼 끝냈으면 본토로 가지 않았을까? 스타팅 포인트 근처를 찾아보면 뭐가 나올 것 같은데?”
“스타팅 포인트들 중 어떤 곳부터 가보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그냥 내키는 대로 한번 찍어보지 뭐.”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수백이 넘는 스타팅 포인트 주변을 하나씩 일일이 수색하려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당연히 그 사이에 그 버그 플레이어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일 것이다.
계획이라고도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스네이크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피테쿠스님. 당신은 12명의 GM중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피테쿠스님은 감이라고 부르시겠지만 저는 그것이 철처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설사 그것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뭔 개소리야?’
피테쿠스는 황당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면 괜히 귀찮기만 할 뿐이니까.
“아아. 뭐 맡겨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