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점검 (1)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메시지가 들려왔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결국 그림자호랑이가 쓰러진 것이다.
“생각보다 빠르네.”
[퀘스트를 완료 하였습니다.]
[‘꺼지지 않는 횃불’을 획득 하였습니다.]
[당신이 감당하지 못할 강함을 가진 적을 사냥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시스템이 당신에게 크게 감탄합니다.]
‘그래그래. 이쯤에서 감탄 한번 해주셔야지.’
[칭호. ‘불굴의 투사’를 획득하였습니다.]
[가이이가 시스템의 결정에 강하게 항의 합니다.]
호랑이를 함정에 빠트리고 중독 시킨 다음 도망친 게 전부인데 불굴의 투사라니.
‘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뭔가 양심이 좀….’
타르칸도 양심이란 게 있는 사람이었다.
[불굴의 투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에 수여되는 칭호.
- 상태이상 ‘공포’ 면역.
-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적 처치 시 디멘션 코인 획득.
‘오케이 동의! 강하게 동의!!’
타르칸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
안타깝게도 그림자호랑이는 전리품 상자를 주지 않았다.
‘쳇. 시원하게 무기하나 뱉어내지. 그랬으면 아낌없이 주는 호랑이라고 불러줬을 텐데.’
그림자 호랑이가 들었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생각을 하며 타르칸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을 쳐다보았다.
반투명한 유백색의 이 구슬은 바로 그림자 호랑이의 정수.
맹독에 흐물흐물 녹아버린 그림자 호랑이의 사체에 정수추출을 사용하여 얻은 것이다.
뿔멧돼지나 다른 몬스터들의 사체에서는 한 번도 정수를 얻지 못했던 것을 보면 정수의 원형을 얻는 것에는 타르칸이 알지 못하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대상이 어느 기준이상으로 강해야 한다던가. 뭐 단순히 성공 확률이 극악한 건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림자 호랑이의 정수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타르칸은 그림자 호랑이의 정수를 흡수할 생각이 없다.
정수를 흡수 하는 것은 5번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한번 흡수한 정수의 해제는 불가능하다.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고작 그림자호랑이 정도에 사용하는 것은 너무 아깝다.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림자호랑이의 정수는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스킬을 얻게 될지 모르니 인벤토리에 잘 모셔두기로 했다.
‘근데 만약에 그림자호랑이의 정수를 흡수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몸이 물처럼 흐물흐물해 지는 건가?’
타르칸이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숲길을 걸었다.
시작의 마을에 돌아가는 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림자호랑이에게도 도망가느라 그만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마나가 모두 소진되자 곤충의 시야 스킬이 해제되며 다시 어두운 숲의 모습이 나타났다.
곤충의 시야 스킬은 언월도-땅강아지에 내장된 토벽스킬과는 다르게 쿨타임은 없지만 마나를 소비했다.
타르칸이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달이 없는 이곳의 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타르칸은 마나가 차오르길 기다리며 검은 실루엣의 덩어리가 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숲 벌레들도 이 어두움이 두려워 몸을 웅크리고 있는 듯, 숲은 한없이 조용했다.
깊은 밤과 조용한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함은 어딘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구석이 있었다.
순간 타르칸은 자신이 기묘한 세상에 홀로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런 것 같은 기분이 아니라 나는 실제로 이상한 세상에 떨어졌어.’
타르칸이 피식 웃었다.
이 시작의 섬이라는 곳에 온 뒤로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그리고 이제 이 정기점검이라는 것이 끝나면 그는 다시 그랑대륙으로 돌아간다.
‘그랑대륙. 아스너 제국.’
그립지 않은 이름이다.
그곳을 떠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은 그에게 적절하지 않은 말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르칸은 설사 몇 년, 몇 십 년을 떠나더라도 그곳이 그립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에게는 고향이 없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떠돌이 신세라는 점에서는 이계의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계의 인간도 되지 못한다.
평소의 그라면 그만 울적해져버리고 말았겠지만 현무의 정수를 흡수한 뒤로는 뭔가가 달라졌다.
대책 없는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이다.
“일단은 강해지자. 누구보다도 더. 더 이상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은 그게 가능하니까.”
타르칸도 모욕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어서, 마녀의 아들이라는 이름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굴욕의 날들.
힘이 없어 당하기만 했던 무력한 시간들은 이미 과거다.
더 이상 과거의 상처를 핥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선 이 시스템이라는 것과 이계의 인간들에 대해서 더 알아야겠지.”
그는 정기점검을 보려고 했던 이유를 되새겼다.
이미 수많은 이계의 인간들이 그랑대륙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플레이어들에 의해 그랑대륙은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계의 인간을 이해하는 자만이 그 변화를 읽고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마나가 회복된 것이 느껴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타르칸이 전쟁개미의 투구를 매만지며 조용히 읊조렸다.
“철저히 이용해 주지.”
이계의 인간들도. 그랑대륙의 인간들도.
***
얼마 지나지 않아 타르칸은 시작의 마을로부터 새어나오는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저가 모두 빠져나간 시작의 마을은 더없이 음울했다.
마을의 길 중간마다 타오르는 횃불들만이 이곳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사람들. 그러니까 NPC들이 보이지 않는다.
타르칸은 텅 비어있는 트렌의 대장간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뜨거운 열기를 뿜던 화로가 차갑게 식어있다.
트렌의 대장간뿐만 아니라 거리의 모든 상점의 문이 열려있다.
플레이어가 없는 이상 상점의 물건을 도둑맞을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 NPC로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언제 쉬는 거지?’
시작의 섬에 온 이래로 처음 찾아온 밤이다.
‘나처럼 회복포션으로 버텼던 건가? 아니면.’
타르칸이 어쩌면 지금 모두들 잠이 든 것이 아닐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 때였다.
“까아악!”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은 광장 쪽이었다.
타르칸은 지체하지 않고 광장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사람들은 모두 광장에 모여 있었다.
큰 모닥불 아래에 시작의 마을 NPC가 일렬로 서있었다.
타르칸은 속도를 줄이고 스킬 [잠행]을 활성화 했다.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건물의 그림자 밑으로 숨어 광장을 주시했다.
마치 군대의 재식을 연상하듯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앞을 무언가가 걷고 있다.
피델이다.
플레이어가 처음 만나게 되는 NPC인 피델이 예의 그 어색하게 찌그러진 검과 방패를 절그럭 거리고 있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마을사람들의 앞을 거닐던 피델이 어느 여인의 앞에 멈추어 섰다.
“잡화점3 NPC 카를레.”
기억하고 있던 피델의 음성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건조한 목소리.
카틀레라고 불린 여자의 몸이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얼굴이 곧바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업무 수행능력 양호. 근무시간 준수 우수. 플레이어와의 교류 양호. 불만 접수 현황 없음. 총합 평가 B.”
이어지는 피델의 말에 카를레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의 떨림이 잦아들며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돈다.
이번에는 아무 문제없이 통과한 것이다.
“마을 안내 NPC. 타브.”
이번에는 마을 입구 부근에서 어슬렁거리곤 하던 꼬마아이다.
이런곳에 왠 아이가 있는가 싶었더니 역시 NPC였던 모양이다.
“업무 수행능력 우수. 근무시간 준수 매우불량. 플레이어와의 교류 양호. 불만 접수 현황 없음. 총합 평가 C. 벌점 30점 부여.”
벌점이 부여된다는 말에 타브라고 불린 아이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휩싸였다.
타브는 공포에 몸을 떨며 울상이 되었지만 울음은 터트리지 않았다.
건물의 귀퉁이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르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가이아가 NPC의 관리자가 NPC를 관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합니다.]
가이아의 대답에 타르칸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누가 봐도 피델은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다.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멋대로 점수매기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다.
저런 짓은 과거 존재했었다는 노예에게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저 녀석이 뭔데 다른 사람들을 평가한다는 거야?’
피델은 같은 말만 반복하는 정상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한 놈이다.
그런 놈이 대체 누구를 평가하며, 또 사람들은 저놈이 뭐가 무서워도 저렇게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새 반 정도의 NPC들이 평가를 마쳤다.
A와 B를 받은 NPC들은 통과. C와 D를 받은 NPC들은 벌점이 부여되고 있었다.
“물약상점 NPC. 패트.”
패트는 NPC는 심심할 때마다 마을을 돌아다녔던 타르칸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업무 수행능력 양호. 근무시간 준수 매우불량. 플레이어와의 교류 불량. 불만 접수 현황 6건. 총합 평가 F. 교체대상 NPC.”
패트라고 불린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퀭하게 내려앉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자… 잠깐만. 거기에는 사정이.”
페트가 다급하게 말했지만 피델은 무표정한 얼굴로 찌그러진 자신의 검을 들고 망설임 없이 내리그었다.
“교체대상 NPC.”
“커어억.”
페트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숨어서 보던 타르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사람을… 죽였어?’
그랑대륙의 인간은 일주일이면 다시 살아나는 플레이어들과는 다르다.
몬스터가 범람하는 세상.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한 사람의 도움이라도 절실하다.
때문에 아스너 제국에서 죽음은 흔하지만 살인은 결코 흔하지 않다.
범죄자라 할지라도 오지로 추방을 할 뿐 어지간해서는 사형을 당하지는 않는다.
사형을 선고 받으려면 반역자 혹은 마녀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때문에 눈앞에서 피델이 페트를 죽이는 모습을 본 타르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두운 건물 그림자 밑에서 멍하게 광장을 쳐다보던 타르칸은 가이아의 알림말을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이아가 깜짝 놀랍니다.]
[가이아가 강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처음에 타르칸은 가이아 역시도 살인에 충격을 받은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알림음에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가이아가 그림자를 노려봅니다.]
‘그림자?’
그제야 타르칸은 칼에 찔려 쓰러졌던 페트라는 이름의 남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페트가 서 있던 자리의 빈 공간만이 그가 존재 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일렬로 서있는 NPC들 중간중간에 빈 자리들이 있다.
처음에 들었던 비명소리는 저 빈자리 중 하나의 것인 모양이다.
피델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장간1 NPC. 트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