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무의 정수
투명한 바다.
하얀 거품을 문 파도가 끊임없이 섬의 바위를 쓸어내린다.
시작의 섬 북쪽 끝.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위에 거대한 비석이 서 있다.
시작의 마을에 있는 전직 퀘스트를 시작하는 비석과 꼭 닮아있다.
그 아래에서 타르칸이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찾았다!”
타르칸이 후련한 표정으로 비석에 손을 올렸다.
[축하합니다! 시작의 섬의 4개의 비석을 모두 찾으셨습니다.]
[퀘스트 ‘작은 섬의 탐험가’를 완료하였습니다.]
[‘작은 망원경’을 획득 하였습니다.]
타르칸은 인벤토리를 열어 방금 얻은 ‘작은 망원경’을 꺼내어 눈에 대어 보았다.
“오 멀리 있는 걸 크게 볼 수 있는 물건이라니. 신박하잖아.”
그는 지금 다른 플레이어들과 제이가에게서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이 시작의 섬에서 얻을 수 있는 퀘스트들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9시간 이후에 정기점검이 시작됩니다. 서버가 종료되기 전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종료해 주십시오.]
사실 시작의 섬에서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시작의 섬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저 정기점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서다.
‘트렌 아저씨 말에 의하면 정기점검 때는 갑자기 밤이 된다지? 플레이어들도 다 사라지고 말이야.’
트렌은 정기점검을 3번이나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타르칸은 그랑대륙에 있을 때 갑자기 밤이 되거나 하는 일은 겪어 본적이 없다.
즉, 이 정기점검이라는 것은 시작의 섬에만 발생하는 특이한 현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가이아가 당신의 멍청함을 극찬합니다!]
타르칸은 가이아의 반응을 무시하며 퀘스트 창을 열었다.
‘이 퀘스트라는거 생각보다 쏠쏠하단 말이지….’
그가 수행중인 퀘스트들은 모두 시스템에 의해 자동으로 생성된 것들이다.
일정 행동을 하거나 특정한 지역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퀘스트가 생성되는 것이다.
시작의 마을은 튜토리얼 지역인 만큼 대부분의 퀘스트들이 단발성에 낮은 난이도 이면서도 꽤나 유용한 아이템들을 보상으로 주었다.
타르칸은 행동에 따라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이 시스템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는 퀘스트 창에 남아 있는 유일한 퀘스트를 확인했다.
[시작의 섬 지배자]
- 완료조건 : 시작의 섬에 서식하는 모든 종류의 몬스터 1회 이상 처치.
- 완료보상 : 꺼지지 않는 횃불.
타르칸이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꺼지지 않는 횃불이라니.
‘아직 사냥한 적이 없는 몬스터는 한 종류 밖에 없어. 하지만 그놈은 좀 위험한데….’
정황상 플레이어들이 지랄맞은 호랑이, 지호라 부르는 몬스터는 그림자 호랑이가 확실했다.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5등급 게이트의 몬스터이자 1:1이라면 미노타우로스를 가지고 놀 정도의 괴물.
타르칸이 고심했다.
그는 굳이 필요없는 위험을 감수하는 인간이 아니다.
전직을 해서 스텟이 전체적으로 늘기는 햇지만 객관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그는 아직 5등급 게이트에 비빌 정도는 못 된다.
‘미노타우로스 잡을 때처럼 버프나 디버프를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말이지….’
그는 전직 퀘스트 때 모아둔 포인트를 사용해서 미노타우로스들을 잡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어? 잠깐?’
그 순간 타르칸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작은 기억의 조각.
“포인트?”
-타르칸.
-응?
-타르칸. 지금부터 엄마가 하는 말 꼭 잘 들어야해.
-옛날 이야기 해줄 거야?
-아니 이건 옛날이야기가 아니야.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될 즈음이면 너는 이상한 섬에 가게 될 거야.
-이상한 섬?
-그래. 절대로 무서워 할 필요 없어. 그 섬에 도착하면 한 가지만 기억하렴. 바로.
“그래!”
타르칸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이아가 드디어 미친것이냐며 반색합니다.]
“포인트!!!”
***
[6시간 이후에 정기점검이 시작됩니다. 서버가 종료되기 전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종료해 주십시오.]
타르칸은 쉴 틈 없이 달렸다.
시작의 마을을 지나고, 전투의 방과 인터페이스의 방까지 지나가자 조금씩 해변이 나타났다.
미노타우로스를 피해 튜토리얼을 시작했을 때, 처음 도착한 바로 그곳이다.
-타르칸. 그 섬에 도착하게 되면 무엇보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있단다.
‘분명히 엄마는 이곳에 대해 알고 있었어. 그리고….’
타르칸은 시작 지점을 지나치고 넘실거리는 파도 바로 앞까지 도착해서야 비로소 멈추어 섰다.
주의 깊게 해안가를 따라 걷던 그는 바닷가의 바위가 절묘하게 시작지점을 가리는 곳에서 슬며시 바다에 몸을 담갔다.
-그 섬에 도착하게 되면 무엇보다 먼저 작은 섬을 찾거라. 그 위치는.
‘저 건너편.’
타르칸이 검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그는 이계의 인간과 똑같은 표식이 이마에 새겨져 있던, 그래서 마녀라는 이름으로 화형당해 죽었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너무 어릴 때라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타르칸이 넘실거리는 파도에 몸을 던졌다.
타르칸은 파도를 넘어가며 예전에는 애써 외면해 왔던 것들에 의문의 던졌다.
그의 어머니가 어째서 마녀라는 이름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어머니의 이마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고, 가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곤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화형을 당해야 한다면 제국의 온 마을이 화형당한 시체의 재로 가득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어떤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시작의 마을에서 만난 대장장이 트렌을 떠올렸다.
교단. 분명 교단이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를 한 시간쯤 헤엄쳤을까?
“… 진짜 있는 거 맞지?”
[5시간 이후에 정기점검이 시작됩니다. 서버가 종료되기 전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종료해 주십시오.]
아스너 체술을 사용하고 있지만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인벤토리에 가득한 체력물약이 아니었다면 진작 탈진했을지도 모른다.
타르칸이 작은 바위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시간 정도가 더 지나갔을 때였다.
[2시간 이후에 정기점검이 시작됩니다. 서버가 종료되기 전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종료해 주십시오.]
“후아… 죽겠네.”
포션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정신적 피로감이 온몸을 내리 누르는 것 같다.
그는 매끄러운 검은 바위를 낑낑대며 기어 올라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바위는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보기엔 그 모양과 재질이 이상했다.
둥근 타원형에 어떠한 합금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검은 섬 중앙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익숙한 모습이다.
전직 퀘스트를 수행했던 비석과 꼭 닮아 있다.
‘이건.’
무심결에 타르칸이 비석에 손을 올리자, 시스템 알림이 그의 귓가에 울렸다.
[축하합니다! ‘시작의 마을의 숨겨진 비석’을 발견하셨습니다.]
[비밀 상점을 발견하습니다.]
[발견 보상으로 5000디멘션코인을 수령하였습니다.]
가이아의 말대로 디멘션코인은 비밀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기가 비밀상점…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면 꼭 사야할 물건이 있단다.
-꼭 사야할 물건?
-응 그건 말이지.
“상점창.”
타르칸이 비석에 손을 올린 채 조용히 말하였다.
그의 눈앞에 격자 모양의 빛의 창이 나타났다.
마치 인벤토리를 연상시키는 모양이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거대하다.
하지만 그 거대함이 무색하게 상점창에는 단 한 가지 아이템만이 있었다.
[검은 무의 정수] (5000DC)
“까만 무?”
검은색 구 형태인 아이템의 이름을 읽은 타르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까만 무의 정수라니.
‘흑마늘 진액 같은 건가. 엄마는 왜 이런 걸.’
심각하게 고민하는 타르칸에게 가이아의 상태 메시지가 들려왔다.
[가이아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쉽니다.]
[가이아가 까만 무가 아니라 검은 무(武)라고 읽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가이아가 이 물건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혼란스러워 합니다.]
‘좋은 건가 보네.’
뭔가 아까워 하는듯한 가이아의 반응에 그는 지체 없이 구매를 눌렀다.
가격은 비밀상점 최초 발견보상으로 받은 액수와 동일한 5000 디멘션코인.
[검은 무의 정수를 획득하였습니다.]
타르칸은 자신의 손에 나타난 검은 구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체….’
노골적일 정도다.
이 아이템은 한 눈에 봐도 그가 얻은 직업 ‘정수약탈자’를 위한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이곳에 올 것과 그가 정수약탈자라는 직업을 얻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단지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
‘이계의 인간들이 훈련받는 튜토리얼이라는 곳에 말이지.’
타르칸은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털어내었다.
정보를 더 이상 모을 수 없을 때에는 과감히 움직일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가 검은 구슬을 들어올렸다.
[가이아가 경고합니다.]
[가이아가 흡수와 융합은 다른 것임을 확인합니다.]
어딘가 다급함이 묻어 있는 가이아의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확실히 정수약탈자는 정수의 원형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정수의 원형과 융합한다.
흡수가 아니라 융합하는 덕분에 대상이 가진 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반대급부가 있는 법.
정수의 융합으로 인한 문제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안 쓸 수도 없는 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가 그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타르칸은 어머니의 흑마늘진액, 아니 검은 무의 정수에 정신을 집중하고는 말했다.
“정수융합”
검은구슬이 손에서 녹아내렸다.
동시에 타르칸은 온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마치 뜨거운 전류가 파도처럼 온 몸의 혈관을 태우며 흐르는 것 같다.
“끄아아아악.”
쿠르르릉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흔들린다.
착각이 아니다.
검은 섬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단단한 검은 암석이 마치 얼음처럼 바다에 녹아든다.
“으아아아아!”
***
철썩-
귀를 간질이는 파도소리.
자신의 몸을 훑어 내리는 파도에 타르칸이 움찔거렸다.
눈을 슬며시 떠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가이아가 청승 그만 떨고 일어나라고 재촉합니다]
‘꿈은 아닌 모양이네’
타르칸이 일어나기 위해 자세를 바로 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그는 기억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시스템 메시지를 떠올렸다.
[현무(玄武)의 정수와 융합합니다.]
[현무가 당신의 본질에 스며듭니다.]
[당신의 격이 변화 됩니다.]
[융합 결과로 일부 스킬들이 변화 합니다.]
‘현무? 격?’
눈에 힘이 풀려 초점이 맞질 않는다.
주위가 어두운 것을 보니 밤이 찾아 온 모양이다.
정기점검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