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언제였던가?
세라핌이란 존재에 대해 라파엘에게 들었을 땐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며 보기만 해도 거룩한 존재일 것이라고.
또한 성스러우며 세상의 만물을 소중히 여기는 대천사와도 같은 평화의 상징!
「신」적인 고차원의 존재일 것이라고.
하지만 그 모든 건 단지 시현의 편견이었을 뿐, 엔들리에의 지나가던 개가 들으면 비웃을만한 헛소리였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에야 세라핌을 둘러싸고 있던 허상의 껍데기가 벗겨져나갔다.
그는 신적인 존재가 아닌 종족 전쟁을 일으킨 원흉!
타 종족의 보물을 탐낸 욕심덩어리!
보물을 쟁취하고자 시현을 속인 악의 축!
그리고 지금, 세라핌을 대면한 시현은 모든 편견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적어도 생김새는 늠름한 대군주의 모습을 생각했건만 정반대였다.
-취리.
드높게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있는 세라핌을 보고서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런 괴물이 또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욕심이란 욕심은 죄다 가지고 있을 듯한 모습이었다.
등 뒤로는 여섯 개의 날개가 달려 있었고, 두상은 뱀을 닮았으며 몸은 붉고 육중했다.
심술궂은 포악한 상정의 폭군이 잘 어울리는 풍채였다.
마치 끔찍한 파충류를 마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일전에 보았던 수호자와 가브레도 역겹게 생겼지만 이놈 세라핌은 그것들과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이놈들은 강할수록 얼굴이 흉악한가?’
그 따위의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지.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선 안 되지만 녀석은 실제로 악했으니까.
“할 말이 있나?”
애시당초 이곳에 온 목적은 원흉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다시는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서,
놈을 단죄하리라 다짐하고 온 것이 바로 시현이다.
세라핌 역시 시현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이미 각오한 듯 보였다.
-모든 것을 듣고 온 모양이구나.
하대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법도 했지만 시현은 전혀 상관없다는 눈치를 내비쳤다.
“그래, 그리고 너는 지금 이 상황이 두려웠던 것이겠지.”
그렇기에 라파엘을 통해 시현이 엔들리에에 오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만약 시현이 헬리움으로 오게 되면 분명 벨제뷔트에게 모든 사실을 듣게 될 테니까.
“헌데 엔들리에의 수호자는 그냥 나를 헬리움으로 보내주던데.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본왕은 그대가 엔들리에에 올 때부터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대의 능력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헬리움으로 넘어왔을 터이니.
정확히 꿰뚫어봤다.
세라핌의 말마따나, 수호자를 마인드컨트롤 해서라도 헬리움으로 오는 방법을 알아냈을 테니까.
“이제 와서 봐 달라는 뜻이냐?”
-그럴 리가. 그런 의미는 결코 없다. 다만 그대의 선택이 궁금하긴 하군. 과연 나에게 무슨 단죄를 내릴는지.
“죽음이지. 보나마나 뻔한 거 아닌가?”
분명 세라핌은 강했다.
굳이 몬스터와 비교하자면 몬스터 사체를 흡수했던 위리놈의 1할 수준?
현재의 시현으로선 마음만 먹으면 벨제뷔트마냥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죽일 수 있었다.
-그럼 나를 죽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당초 네놈이 그런 욕심을 갖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네놈의 그 욕심 때문에 우리가 받은 고통이 얼마나 막대한지 알고 있나?
-헤아릴 수 없겠지. 하지만 어설픈 소리를 하는군. 내가 있기에 욕심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기에 욕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끄덕.
시현은 고개를 숙임으로써 그 의견에 공감해주었다.
“그래, 맞는 말이네. 그래서 난 네놈의 욕심을 없애기 위해 죽이는 거고.”
-그거라면 납득이 가는군.
놈은 뭐가 그리 좋은지 뱀처럼 뾰족한 혀를 날름거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대로 보물을 얻지 못하고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걸까?
아니면 죽음을 달관한 경지에 오른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죽는다고 해서 과연 그 욕심이라는 게 없어지겠는가?
스르륵-
세라핌은 어좌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내가 죽으면 또 다른 자가 어좌에 오를 터인데. 차라리 순종적인 나를 남겨두는 것이 그대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무슨 소리지? 왕위를 이을 계승자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대는 우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세라핌이란 본디 우리의 정신, 상징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본왕이 죽으면 누군가 뒤를 이어 세라핌이 되겠지. 그리고 세라핌의 면류관을 쓰는 자는 거부할 수 없는 욕심을 갖게 될 터.
“그럼 그 누구도 세라핌을 하지 않으면 되겠군.”
-모르는 소리. 세라핌이란 우리의 정신, 자연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시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요컨대 세라핌을 죽여도 똑같은 놈들이 나타난다는 뜻이었다.
-또한 전쟁을 일으켰던 세라핌은 내가 아닌 선대의 왕이시다. 나는 그저 반란군을 제압하고 선대의 뜻을 이은 세라핌일 뿐, 전쟁을 일으킨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니···
즉, 몬스터와의 전쟁을 일으킨 것은 선대先代 세라핌이 저지른 일.
자신은 그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놈의 눈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기엔 억울하다, 이건가?”
-나를 죽여도, 후대의 세라핌은 필경 인간계를 습격할 거란 뜻이니 헛수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동맹을 맺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테지.
“습격? 동맹?”
시현의 생각은 달랐다.
“지구로 향하는 차원의 열쇠가 나한테 있는데, 어떻게 습격을 한단 말이냐.”
-세월은 길고 하늘은 높다. 천고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닿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열쇠가 없더라도, 문명이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차원간의 통로가 형성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한 시현이 죽고 나면 인간들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열쇠는 언제라도 놈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말살이군.”
-······?!!
“네놈들과 몬스터 놈들을 말살한다면 그 누구도 보물을 탐내지 않을 것이고, 전쟁 또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설마 너희 인류만을 위하여 우리 종족을 말살시키겠다는 것인가?
물론. 초기진압이 안 되면 후에 가서 피곤해진다.
자그마한 불길은 언젠간 몸집을 키워 자신을 덮쳐올 것이 분명했으니 자비란 베풀 수 없는 것이었다.
남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우리 집까지 불이 옮겨 붙는 걸 보고 가만히 방관할 수는 없으니까.
‘불이 옮겨 붙기 전에 무너트린다.’
희대의 난제.
아무도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끈을 무력으로써 잘라버리기 위해 시현은 칼을 뽑았다.
좌윽-
순식간에 육체를 강화시키고 오른손에 살기를 담았다.
넘실거리는 기력이 손에 휘몰아친다.
찰나 놈이 살짝 반응했지만 이미 발버둥 쳐봐야 늦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지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스컹!
뚜둑.
팔에 힘을 가득 실어 놈의 목을 베어버린 시현은 밖으로 나가 여전히 전쟁 중인 엔델 족과 몬스터 놈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의 몸에 묻은 피를 보아하니 인간과 별 다를 게 없어보였다.
몬스터건 엔델 족이건 인간이건, 서로 죽이고 약탈하고 모두가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잠시 회의감이 찾아왔던 시현은 등을 돌렸다.
“다만 지금은 떼가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세월은 길고 하늘은 높이니까.
‘언젠가는 답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
.
.
지구로 돌아가고자 차원의 문을 소환한 것은 최후의 전쟁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벨제뷔트가 말하길, 사탄이 강림하길 불과 몇 분도 채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과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빨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런데,
‘···?’
지구로 향하는 차원의 문을 열었는데 어째선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통로는 아득했고 그 끝은 한없이 어두웠다.
‘······?’
무언가 놓친 듯한 느낌.
설마 벌써 사탄이 강림한 것일까?
고민하길 잠깐, 여기서 머리를 굴려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시현은 서둘러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
.
.
“허-.”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지구에 재앙이 떨어졌고 그 재앙으로 인해 지구가 초토화됐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나 적어도 시현이 당도한 전라남도 땅 끝 마을의 조용한 별장은 이미 무너져있는 상태였다.
주변 모든 곳에는 재앙의 잔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엔들리에에, 그리고 헬리움에 갔다 온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것이 파괴돼있었다.
파멸, 그 단어보다 이 상황에 어울릴만한 것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차원이 다른 악(惡)을.
역시 그랬던 걸까.
‘늦었다.’
사탄은 이미 지구에 강림하였다.
시현이 벨제뷔트와 세라핌을 끝장낼 때, 사탄은 지구에 강림해 만물을 파멸로 이끌었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
고작 몇 시간? 아니 겨우 몇 분 만에?
‘설마.’
문득 그럴싸한 생각이 뇌리에 스친 시현은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폐허가 된 허허벌판 속에서 건질 거라고는 거의 없었지만 시야를 넓히니,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멀쩡히 돌아가는 시계가 있었다.
“수집.”
툭.
손으로 이끌려온 시계에는 날짜가 적혀있었다.
“아···.”
시현이 놓친 게 하나 있었다.
각 차원의 시공간은 서로 격리돼있다는 것을.
즉, 지구에서 시간 역행을 해도 다른 차원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지구의 1초가 엔델리에, 헬리움의 1초와 같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2시간 정도 차이나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지구는 헬리움보다 2시간 정도 더 빨랐다.
다시 말해 바로 지구에 강림했던 사탄은 지난 두 시간 동안 세계를 휩쓸었다는 것.
그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럼 다 죽은 거라고···?’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이 찾아왔지만 육안상으로는 그러했다.
솨아아아아-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쏘다녔는데, 결국 남은 것은 후회와 절망뿐이지 않은가.
‘그럴 리 없잖아.’
인간이, 인류가 이렇게 쉽게 끝날 리 없다.
찾아보자.
분명 세계 어딘 가엔 살아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고작 2시간이다.
멀리가지 않고 한반도만 찾아보더라도 생존자는 있을 터.
그러했다.
세상이 멸망했다는 건 단지 시현의 추측이었다.
‘그래, 일단 한반도부터.’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으며 추적의 그림자를 퍼트리려던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
“······!!”
소리의 발원지는 시현의 품속, 셔츠에 달려있던 배지였다.
현자리움이 자체적으로 만든 방어배지였는데, 광범위한 무전기능이 있었다.
시현의 경우, 최측근이랑 연결이 된 배지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헌데 그게 지금 울리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구나···.’
다행이었다.
시현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셔츠 안쪽 주머니에서 배지를 꺼냈다.
취이이익-
시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급박한 류건의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넘어왔다.
-의장님, 의장님? 제 말 들리십니까? 어디십니까?!
말도 안 하고 갑자기 사라졌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이틀 전에 사탄이 강림했다면 이제는 시현이 귀환할 차례였다.
악의 근원을 뿌리 뽑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