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마지막 전투의 서막을 알리는 움직임이었다.
스스슥-
몬스터들이 머물고 있는 메마른 대지 위에 도달한 시현은 놈들에게 반응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말했다.
“올 킬.”
좌아아아아아악!
레어부터 유니크까지.
수백만을 헤아리는 대 군단이 소멸되었다.
기이한 광경에 뒤쪽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엔델 족의 전사들은 전투를 멈추고 죄다 이쪽을 쳐다보았다.
실로 입이 떡 벌어지는 장면이었다.
-맙소사!
-설마 저 분께서······?
-인간계의 군주라던?!
엔델 족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시현이었지만 이미 실력으로 능력을 증명한 바, 엔델 족에게 명령할 자격은 충분히 갖춘 상태였다.
“전군, 돌격!”
명령이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언령이기도 했다.
난데없이 인간이 나타나 지휘한다는 건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지만 전사들은 결연히 발을 움직여야 했다.
-돌격하라!
-우오오오오오오오!
-동맹인가! 그렇다면 함께 하자!
-보물을 가져오라!
전체 버프기-
시현의 말엔 단순 언령만이 깃든 것이 아니었다.
모든 전사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용맹함의 가호!
전장의 진정한 수호자!
이 많은 병력에 버프를 둘러주더라도 감당할 수 있는 게 바로 지금의 시현이었다.
환골탈태로 뛰어넘은 한계.
뼈와 살을 깎는 각고의 노력으로 도달한 초월 직전의 경지!
절대적 존재 바로 아래 있는 그곳이 시현이 서있는 위치였다.
아무렴 이곳이 기력발전기가 없는 적의 둥지라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시현의 포켓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아무리 물을 길어 와도 바닥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만한 무력을 감당할 몬스터 또한 거의 없었다.
그나마 전설 급은 되어야 한 수 버틸 수 있으려나?
그 나머지는 넉가래에 밀리는 눈발처럼 그저 쓸려갈 뿐이었다.
-우오오오오오오!
-탑을 파괴하라!
-벨제뷔트가 있는 곳까지 전속력으로!
검은 탑.
그 자리는 시현이 맡았다.
푸슛-
타악.
텔레포트로 탑 꼭대기에 우뚝 선 시현은 허리가 굽은 채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몬스터를 보았다.
키는 시현의 반만 한 게, 무척이나 늙은 원로인 모양이었다.
“벨제뷔트냐.”
녀석은 그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시현의 능력에 감탄하였다.
-나의 결계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텔레포트라··· 역시 언령이란 권능은 대단한 거구만.
녀석에게선 싸울 의향이 전혀 없어보였다.
과연 한 종족의 우두머리답게 시현의 강함을 익히 알고 있는 것일까?
시현은 녀석을 스캔했다.
-------------------
벨제뷔트(בעל זבוב)
-227,542살
-신화(Myth)
-몬스터 3위계
권능 : 악(惡)/전쟁
특기 : 지휘/교란/정치
-------------------
‘3위계?’
이건 의외다. 당연히 2위계일 줄 알았는데.
‘1위계는 사탄인 게 확실하고, 그럼 2위계는 누구지?’
생각하길 잠시, 지금은 그럴 궁리를 할 때가 아니었기에 시현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놈을 응시했다.
마침 벨제뷔트가 쭈글쭈글 말라버린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껄껄···. 하기사, 그렇게 강력해진 위리놈을 이겼으면 이는 당연한 결과지.
몬스터 4위계의 위리놈이 수천 만 마리의 몬스터를 흡수했던가?
그렇다면 그 강함은 필경 벨제뷔트를 뛰어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리놈을 죽인 게 바로 시현이니 벨제뷔트로서는 당연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놈은 전의를 상실해버린 것일 터였다.
-솔직히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도다. 그대가 위리놈을 죽이고 헬리움으로 향하는 차원의 열쇠를 차지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거래다.
“거래? 글쎄. 도저히 내가 혹할만한 제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위압적인 존재와 맞닥뜨렸음에도 불구, 벨제뷔트는 쫙 찢어진 눈을 게슴츠레 치켜뜨면서 노련미 있게 말했다.
-껄껄. 사실 거래라기보다는 약속이지. 우리가 다시는 인간계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그거라면 상관없다. 난 네놈을 죽이고 지구로 향할 수 있는 차원의 열쇠를 가져갈 테니까.”
-아니, 아니지···. 차원의 열쇠 따위를 가져간다고 해서 어찌 그분의 강림을 막을 수 있겠는가?
사탄.
그분께서는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며 천지가 그의 기분에 따라 변동할 정도라고, 벨제뷔트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에 이어 시현이 꼭 들어야할 핵심을 말해주었다.
-그분은 신적인 존재. 제약 따위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 할 사이에 인간계든 엔들리에든 강림하실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왕, 사탄이시다.
“그러니까 네놈 말은, 내가 여기서 네놈들을 봐주면 사탄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군.”
신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걸 보면 사탄도 무언가 특별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방심해선 안 된다는 거네.’
“하지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문제는 그거였다.
여기서 평화협정을 맺으나 마나, 어차피 조약은 깨지기 마련이니까.
-그럼 이건 어떠한가? 우리의 보물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해주지.
“우리들? 그 보물은 엔델 족 녀석들의 것이 아니었나? 그들도 그렇게 말하던데.”
-껄껄. 그건 그놈들 입버릇이지.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그 보물들이 자기들의 것이라 빡빡 우기더군.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글쎄. 별로.”
엔델 족이 전쟁을 일으켰던, 보물이 몬스터들의 것이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동족이 아닌 생판 모르는 남이니까, 애초에 믿을 생각도 그다지 없었다.
‘이제야 라파엘이 왜 그렇게 반대를 했나 이해가 되네.’
라파엘은, 그리고 엔델 족은 시현을 속이려 든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안전하게 보물을 얻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시현을 속이고 이용해왔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럼 라파엘은 뭐지?”
-라파엘이라···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온데.
“구슬을 사용할 때마다 나타나는 엔델 족. 모르나?”
-아아, 무슨 말인지 대강 알겠군. 그대는 지금 엔델 족의 특기인 정령술을 말하는 것이야.
정령술.
-놈들은 만물에 정령을 깃들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헌데 수십 년 전, 놈들이 우리에게서 구슬을 딱 한 번 탈환해간 적이 있었다. 허나 놈들도 구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내전을 일으키다가 끝내 구슬을 잃어버리게 되었지.
결국 먼저 전쟁을 일으킨 건 엔델 족이었고, 엔델 족 또한 서로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동족끼리 싸웠다는 얘기였다.
‘몬스터나 엔델 족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군.’
저도 모르게 조소가 흘러나온 시현은 벨제뷔트가 이어 뱉은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라파엘이라는 정령을 구슬에 심어둔 모양이군. 아무래도 세라핌, 그놈의 짓이겠지. 항시 구슬의 위치를 파악함과 동시에 그 소유자를 교란시키기 위해서.
“그럼, 라파엘은 세라핌인가 뭔가의 꼭두각시라 이 말이군. 세라핌은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나를 속여 온 거고.”
-정황을 보자 하니 그런 것 같도다.
“그럼 열쇠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존재는 뭐지? 정령이던가 바로 그···”
-그 존재는 정령 따위가 아닌 절대자의 영역. 차원의 균형을 이루는 자들이지.
“아, 뭐 그런 거였나.”
덕분에 그간 답답했던 부분이 싹 해소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서로 얽히고 얽혀버린 삼파전을 마무리 지을 때였다.
‘살려둬 봤자 언젠간 또 보물을 탐하려 귀찮게 굴겠지.’
벨제뷔트나 세라핌이나, 모두가 보물을 노리는 적일뿐이었다.
“그래서 세라핌이란 놈은 또 어디 있지?”
-그거야 나는 알 수 없는 것. 오로지 사탄만이 알고 계신다.
“흠.”
몬스터들의 수장 벨제뷔트는 여기 있고, 그렇다면 엔델 족의 수장 세라핌은 어디 있는 걸까?
되도록이면 한꺼번에 처리해야 탈이 안 날 텐데.
“그래, 정했다. 넌 오늘 죽는다.”
-후회할 것일지언정 번복하지 않겠는가? 사탄께서는 강림하시자마자 필히 인간계를 가장 먼저 심판하실 것이다······! 더욱이 그 순간이 불과 몇 분도 채 남지 않았거늘!
푸욱-
시현은 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을 뻗었다.
-우웁······? 우욱-!
언령이 깃들지 않은 단순 찌르기 공격이었다.
헌데 몬스터 3위계인 벨제뷔트의 육체가 이렇게 간단히 뚫려버리다니.
놀라운 결과였다.
그 동안 했던 수련의 결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점점 절대적인 존재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으니까.
마냥 헛된 생각은 아니었다.
-쿨럭······! 필경 후회할 것이···
털썩.
종족의 우두머리치고는 허무한 최후였다.
“후회는 무슨.”
지구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보물을 마음대로 사용하게 해준다고?
어차피 약속따윈 안 지킬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죽이는 것이 마땅하였고, 앞으로 다가올 사탄이란 고난은 이러나저러나 시현이 감당할 짐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군.’
이제 곧, 놈들의 진정한 우두머리 사탄이 강림할 것 같았다.
탑을 감싸고 있는 음침한 대기.
하늘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기운.
이 두 가지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아아.”
시현은 발치 아래에 펼쳐진 대지를 바라보았다.
이미 핏빛으로 물든 대지는 땅이라고 말하기도 뭐할 수준이었다.
피와 살이 나부끼며 온갖 비명과 함성이 끊이질 않았다.
몬스터들과 엔델 족의 전사들.
과연 저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 것인지 알고 있을까?
그들의 우두머리를 향한 충성심?
혹은 종족정체성에 대한 유대감?
그것도 아니라면 보물을 쟁취하기 위한 사투?
“후우-”
시현은 시선을 돌려 벨제뷔트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변해버린 사체 아래엔 빛 바란 열쇠가 떨어져 있었다.
‘차원의 열쇠.’
지난번에 에너지를 다 썼던 것인지 빛이 탁해진 상태였다.
‘나 혼자 돌아갈 수 있는 게이트정도는 생성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 돌아가기엔 일렀다.
더욱이 이 전쟁이 다 끝난 것도 아니고.
두려움 없는 미래를 위해서는 걸림돌이 될 만한 후환을 모두 제거해야했다.
스윽-
시선을 멀리 던졌다.
반대편 엔델 족 진영 어딘가에 있을 세라핌의 욕심을 어서 끊어버려야 했다.
그놈이나 벨제뷔트나, 그놈들이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죄악이었다.
‘바로 찾는다.’
찾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라파엘이 세라핌의 꼭두각시라면, 분명 둘의 기운은 같을 테니까.
라파엘의 기운을 따라가면 세라핌을 찾을 수 있을 터.
추측을 끝낸 시현은 아공간에서 육체의 열쇠와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열쇠를 돌려 라파엘을 소환했다.
-또 무슨 일로···
“네 주인을 좀 찾아가려는데.”
-그게 무슨······
시현은 대답하는 대신 라파엘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정도면 됐다. 찾을 수 있어.’
제 할 일을 다 한 구슬과 열쇠는 다시 아공간 안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찾아라.
좌아아아아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완전히 똑같은 기운을 감지했다.
장소는 엔델 족이 세운 전진기지였다.
피-융!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간 시현이 멈춰선 곳은 막사였다.
임시로 지은 막사치고는 대단한 수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 어좌에 앉아있는 존재는 과연 수장이라 불릴만한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세라핌.
놈에게 깃든 그 욕망과 놈의 잔혹함을, 시현은 봐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