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언령술사-95화 (95/100)

# 95

저벅-

게이트를 통해 나온 곳은 꽃과 나비가 있어야만할 것 같은 지상낙원이었다.

발아래엔 푸른빛의 대지가 놓여있었고 하늘은 에메랄드빛이었다.

전쟁이라는 단어와는 일절 어울리지 않는 그런 공간이 시현의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여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긴 엔델 족의 땅이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구는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건 엔델 족이나 몬스터들의 고향일 확률이 높은데.

만일 여기가 몬스터들의 지역이었다면 필시 흉흉한 게이트가 생성되었을 테니까.

‘그럼 이건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인가.’

그럼 라파엘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시현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던 것일까?

아니면 이게 차원의 열쇠라는 걸 정말 몰랐던 걸까?

‘아니, 알고 있었어.’

확실했다. 구린 냄새가 났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리 마음먹으며 길을 나아갔다.

나왔던 차원의 문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으나 다시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일방통행이군.’

시현에게 주어진 건 오로지 전진뿐이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검은색 나무로 이뤄진 숲을 지나자 거대한 마을이 나타났다.

아니, 도시라고 해야하나?

언젠가 머릿속으로 상상해본 적이 있는 공학도시.

아무래도 엔델 족이 모여살고 있는 도시일 터.

시현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천국 같은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구름이 두둥실 떠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잘 발달한 인간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오지를 여행한다기보다는 적장에 몰래 침입하는 것 같네.’

문득 걱정이 되었다.

엔델 족이 자신을 못 알아보고 적대시하면 어쩌나.

물론 엔델 족이 여기에 산다는 것부터가 추측이었지만.

헌데 아니나 다를까, 도시 입구로 다가서자 우뚝 서있는 기둥 위에 서있는 한 존재가 시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라파엘의 그것과 묘하게 닮은 목소리를 지닌 존재였다.

.

.

.

-환영합니다. 박시현 님.

시현의 생각이 맞았다.

여긴 엔델 족의 고향, <엔들리에>라는 세계였고 시현을 환대해준 존재는 도시의 수호자였다.

생김새 역시 시현이 생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인간과 몬스터를 섞어놓은 정도?

모조리 짬뽕해놓은 듯 괴상한 외양이었다.

-우리는 시현 님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라파엘한테 들으셨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라파엘은 제가 엔들리에에 오는 걸 반대했을까요?”

-음···.

수호자는 고민하더니 이내 함박웃음을 지으며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시현 님을 걱정한 것이겠죠. 우리의 보물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혹여나 몬스터 놈들에게 빼앗길까 염려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래서 말인데, 말 나온 김에 지금 저에게 보물을 양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말하는지, 하마터먼 별 생각 없이 수호자에게 보물을 건네줄 뻔했다.

“아뇨. 일단 제가 보관하고 있죠. 내가 주더라도 전쟁이 끝난 뒤에 줄 테니까.”

-그러시다면 편한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시현 님이 보물을 놈들에게 빼앗기지 않기를 원하는 것뿐이니까요.

수호자는 풀잎으로 만든 찻잔에 마실 것을 따라주었다.

달콤하면서도, 지구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신비로운 향이 고루 퍼졌다.

차에 꿀 따위를 넣은 것 같았다.

“음- 좋네요. 지구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아, 그런데 지구로는 어떻게 돌아가죠?”

-못 갑니다.

“예?”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니,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시현은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의 말을 고찰했다.

‘그래서 엔델 족이 여태까지 지구에 못 온 거였나?’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차원을 이동하려면 필히 차원의 열쇠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차원의 열쇠는 무조건 일방통행!

즉, 지구로 돌아가려면 지구로 향하는 차원의 열쇠가 또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구로 향하는 차원의 열쇠, 그건 누가 가지고 있죠?”

-지구로 향하는 열쇠라··· 지금껏 지구를 습격한 게 누굽니까?

“아- 몬스터, 놈들이 가지고 있군요.”

즉, 엔들리에로 향하는 열쇠는 시현이,

지구로 향하는 열쇠는 몬스터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네요. 엔들리에로 가는 열쇠는 제가 가지고 있는데, 몬스터들은 어떻게 여기로 넘어와서 전쟁을 일으킨 거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시현의 말마따나 차원의 열쇠가 없다면 차원을 넘을 수 없는 법인데.

그 말은 즉 몬스터 또한 엔들리에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것 아닌가?

이상했다.

분명 몬스터들이 엔델 족의 보물을 앗아갔다고 했는데.

‘그럼 설마 전쟁을 일으킨 게 몬스터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무렵, 수호자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몬스터가 악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던 간에요.

“아, 놈들의 고향으로 가는 열쇠는 그럼···”

-따라오십시오.

.

.

.

“썰렁하네요.”

수호자를 따라간 이곳, 신전 같은 건축물의 꼭대기였다.

-모두 최전선에 전쟁을 치르러갔으니까요. 시현 님도 그걸 바라고 온 것이 아닌가요? 라파엘에게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끄덕.

시현은 대답 대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에 놓인 거대한 문에 넋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를 넘어가면 헬리움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이군요.”

헬리움.

수호자가 말하길, 헬리움이라는 곳이 몬스터들의 고향이자 현재 최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라 하였다.

그리고 현재 눈앞에 놓인 게이트는 엔델 족이 ‘차원의 열쇠’를 이용해서 직접 만들어낸 게이트였고.

-이런 방법으로 몬스터들이 지구에 던전을 차원이동 시키는 것입니다.

“아아··· 헌데 제가 헬리움에 가도 되는 겁니까? 라파엘은 그렇게 반대를 하던데.”

-어쩌겠습니까. 이왕 엔들리에로 오신 것, 우리를 도우시겠다는데 더 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죠. 힘을 합쳐 몬스터들을 처치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엔들리에, 처음 와보는 이계였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반나절이 흘렀고.

하루 정도는 쉴 만도 했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비로움이나 흥분보다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복수심이 훨씬 더 컸으니까.

“이제 들어가면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 게이트는 최전방의 가브레 군단과 연결돼있습니다. 제가 가브레 님께 미리 말해두었으니 가브리 님께서 맞아주실 겁니다.

미련 따위는 전혀 없었다.

엔들리에건 엔델 족이건, 어차피 몬스터를 끝장내기 위해 거처 가는 과정일 뿐.

또한 두려울 것도 없었다.

여길 지나 최후의 전쟁에 합류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거니까.

‘끝을 본다.’

시현은 게이트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

.

.

-우오오오오오오!

시현의 발길이 당도한 곳은 수호자가 말했던 대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전쟁터.

헬리움이었다.

-죽여라!

-몬스터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

라파엘과 수호자가 나긋한 성격이었다면 눈앞에 펼쳐진 엔델 족은 문자 그대로 전사!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건 전사들이었다.

물론 우락부락한 외양을 지닌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저마다가 용맹한 자들이었다.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지고 스킬이 끊임없이 발동하는 걸 보니 지금 이 시각에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

그 가운데 멍하니 서있으니 기골이 장대한 존재가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율리안 지대 최전방을 맡고 있는 총사령관 가브레입니다.

“아, 수호자가 말했던 그분···”

-예. 여긴 시끄러우니 일단 외곽의 막사로 가시지요.

그를 따라 바깥쪽의 막사로 들어갔다.

여전히 비명소리가 자욱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방금 그곳보다는 나았다.

-최전방이라 전투가 끊이질 않습니다. 저쪽 너머가 놈들의 최후의 보루인지라,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것이죠.

“전쟁이 거의 끝나가나 봅니다.”

-이 속도라면 반년 안에 끝날 겁니다.

그렇게 말한 가브레는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전사들의 예법인 모양이었다.

-모두 그대 덕분입니다. 엔델 족의 전사들을 대표해 그간 얼마나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백번 맞는 말이었다.

시현이 죽인 몬스터 수만 수천만에다가 신화급만 여덟 마리를 죽였으니까.

엔델 족을 승리로 이끈 건 시현이나 진배없었다.

-그 동안은 몰랐는데, 인간들은 매우 강한가봅니다.

“예? 그게 무슨.”

-얼마 전에 힘을 합쳐 위리놈을 처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아닙니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힘을 합친 게 아니라 시현이 거의 단독으로 처치한 것인데.

아마 소문이 잘못 돈 모양이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튼 전 전쟁에 합류하러 왔습니다.”

-아···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가브레는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비틀었다.

-물론 저도 그대의 실력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도 여기는 최전방입니다.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자칫했다간 목숨을 잃기 십상입니다. 전쟁의 베테랑인 저 역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니까요.

허어- 이게 무슨 꼴인가?

전쟁을 끝내러 온 특급용병에게 신병취급이라니.

-그리고··· 무엇보다 적진 너머에는 벨제뷔트가 있습니다. 해서 우리 또한 쉽사리 전면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벨제뷔트?”

-예. 사탄의 시대 이래로 현재 놈들을 총지휘하고 있는 악마 같은 놈. 놈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우두머리!’

됐다. 이거면 충분하다.

당장 나가서 싸울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저 놈의 목만 따고 오면 끝나는 전쟁이 아닌가?

혼자 싸우는 것도 아니고, 지원군도 빵빵했다.

겁낼 거 하나 없었다.

벌떡!

시현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맡기세요. 벨제뷔트인가 하는 그 놈, 끝장을 내고 올 테니.”

-예? 하지만 세라핌께서는 시현 님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비록 우리의 보물을 사용하셨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은인이신데···

“누가 죽는답니까?”

이건 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 자신감이란 말인가!

가브레로서는 이해 못할 일이었지만, 시현은 아니었다.

전과 비교해서 몰라보게 강해진 시현이었으니까.

수천만 마리의 몬스터를 집어 삼켰던 위리놈과 일대일로 다시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시현은 결연한 모습으로 막사를 나갔다.

시뻘겋게 물든 하늘 아래, 시커먼 탑이 지평선 끝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육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곳에 우두머리가 있다는 것을.

펄럭-

뒤이어 가브레가 따라 나오자 시현이 물었다.

“벨제뷔트인가 뭔가 하는 그 놈한테 지구로 가는 차원의 열쇠가 있겠군요.”

-아, 아마도··· 그럴 것으로 사료됩··· 음?

스스슥!

그동안 얼마나 참아온 것인지, 시현은 대답도 다 듣지 않고 놈들의 진영으로 향했다.

그 성미 급한 행동이 있자마자 가브레 또한 시현을 따라나섰다.

보물을 적들에게 빼앗길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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