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언령술사-94화 (94/100)

# 94

화아아아아아-

빛이 발산하면서 시공간이 멈췄다.

-또··· 만나네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라파엘이었다.

-얼마 전에 육체의 열쇠를 사용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왜 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 라파엘에게 시현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이거, 볼 수 있나?”

-뭘요?

-여기, 이 열쇠.

위리놈을 잡고서 얻은 열쇠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나 라파엘은 그 열쇠가 보이는 것인지 귀청이 떨어지도록 비명을 터트렸다.

-허어어어어엇! 그, 그 열쇠를 얻었다고요?

“···이게 뭔지 아는구나?”

-그, 그건······ 당장 내놓으세요오오옷!

뭔데?

뭐기에 이토록 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지?

그 생각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라파엘이 이어 말했다.

-어디서, 어디서 얻었냐고요!!

“그만, 머리터질 것 같으니까 그만 좀.”

중요한 물건이긴 한 듯하다.

엔델 족이 저렇게까지 발광을 하면서 내놓으라고 하는 거보면 말이다.

혹시 저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은 아닐까?

“무슨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보물이지?”-그건 육체의 열쇠 같은 보물이 아니라고요!

“그럼 뭔데?”

-그건··· 저도 잘···.

“······?”

뭐지, 이 상황?

여태까지 저 난리를 부렸으면서 이제 와서 숨기시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일단 시현은 계속 말했다.

“직접 써보면 알 수 있겠지.”

-안 돼, 안 된다고요!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걸 함부로 써요?

“안 알려줄 거면 말아. 보물이 안 좋은 것도 아닐 테고, 써봤자 나한테 불이익될 건 없을 거 아냐?”

-그래도!

‘정령이 뭐 저래?’

놈들의 보물을 쓸 때마다 누누이 느껴왔지만 저 라파엘이란 녀석과 권능의 정령은 서로 아예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굳이 말하자면 열쇠의 정령은 ‘신’에 가까운 고차원의 존재라면, 라파엘은 그저 일개종족의 구성원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라파엘은 허당이라 이 말이다.

“우리 도와줄 거 아니면 잔말 말고 얼른 육체의 힘이나 줘.”

-그, 그 잠깐만요.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죠? 설마 우리 엔델 족한테 원한이라도······?

“내가 왜 너희들한테 원한을 가져? 너흰 우리의 은인인데. 내가 하려는 건 몬스터들의 파멸, 그것뿐이야.”

-역시! 역시 그랬군요! 그럼 그 열쇠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우리 엔델 족이 보물을 회수하러 갈 때까지 잘 가지고 있어요.

“언제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으라는 거야? 지금 우리 상황이 어떤지 알기나해?”

답답했다.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 쥐어터진 것만 해도 열 받아죽겠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지금 이 상황을 방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렇게 기다리라니.

“저번에도 물었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너희 엔델 족은 왜 지구에 모습을 안 드러내는 거지? 우릴 도와 연합을 맺고 싸웠으면 진즉에 이겼을 텐데.”

생각을 거듭해 봐도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엔델 족이 몬스터들의 싸움에서 고전하고 있다지만, 소수의 병력 정도는 지원 보내줄 수 있지 않은가?

-전쟁은 곧 끝날 테니 걱정 마세요. 우린 몬스터 놈들과 최후의 전쟁을 준비 중이니까요. 놈들도 섣불리 지구를 침략할 수는 없을 거예요!

“최후의 전쟁?”

-네! 조만간 전쟁이 끝나면 우리도 지구에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때, 보물들을 회수해갈게요.

한 번 줬으면 그만이지, 그걸 또 회수해간다고?

‘뭐··· 전쟁만 끝난다면야. 상관은 없지만.’

“그래서, 그 조만간이란 게 언젠 대?”

-으음··· 일년···?

“미친. 그걸 기다리라고?”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이에 놈들은 분명 다시 틈을 노려 지구를 공격할 것이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다시금 하이톤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어, 시간 됐다! 그럼 또 만나욧!

“야, 야! 힘은 주고 가야지!”

라파엘은 힘을 준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열쇠의 힘이 시현의 육신에 깃들었다.

스르르르르르륵-

헌데 이상하게도 성취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진 보물을 사용할 때마다 밀려드는 성취감에 몸 둘 바를 몰랐었는데.

“뭔가 부족해.”

분명 육체의 열쇠와 구슬을 동시에 사용했다.

다시 말해, 열쇠의 온전한 힘을 받은 것이다.

헌데 힘이 가득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끊이질 않았다.

마치 헛배가 찬 듯한 기분.

‘혹시 환골탈태 때문에?’

문득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시현은 한동안 상념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환골탈태로 인해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몸을 새로 지닌바.

그릇이 커진 만큼 담을 수 있는 양 또한 많아진 것이다.

그 말은 즉,

‘더 강해질 수 있다.’

지체하지 않고 바로 실험에 옮겼다.

곧장 류건에게 연락을 취해 개성 기력발전소의 발전기들을 별장으로 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육체의 열쇠에 기를 채워 넣었다.

.

.

.

솨아아아아아아-

그로부터 10분 뒤, 재차 황금빛이 쏟아져 나오면서 라파엘의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광광 때렸다.

-이게 무슨!! 왜 또··· 왜 부르셨죠? 설마 열쇠를 또···?

“아직 배가 다 안찼어.”

-그렇다고 그렇게 남발하면 어떡해요! 그러다가 다 열쇠 닳으면 어쩌려고!

“이거, 내구성이 있는 거였어?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도 사용해보지 못한 건데 그걸 함부로 쓰면······!

“너희 엔델 족도 사용해본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제 말은! 전에도 말했듯 우리는 ‘통제’하에 사용한단 말이에요!

“싱겁긴.”

사소한 언쟁이 있은 후 시현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라파엘에게서 더 얻을 것도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어서 결과나 확인해보고 싶었다.

“됐으니까 어서 힘이나 줘.”

-힘이요? 질문 더 안 해요?

“응. 빨리 돌아가게 힘이나 달라고.”

-음···.

헌데 라파엘은 더 놀아달라는 건지 즉각적으로 힘을 주지 않았다.

권능의 정령 같았으면 벌써 일처리를 끝내고 퇴근했을 텐데.

‘얜 뭐 이래?’

라파엘은 헤헤 머쓱하게 웃어댈 뿐이었다.

“너 뭐야? 네가 힘을 주는 게 아니었어?”

-저는 그저 엔델 족일뿐··· 하하!

그 말은 즉, 전에 보았던 권능의 정령은 ‘엔델 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구슬에는 그런 존재가 없는 건가? 그냥 열쇠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도구일 뿐?’

아무렴 좋았다.

누가 힘을 내어주든, 시현은 힘만 받으면 그만이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끝날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힘이 부여되는 거군.”

-헤헤···.

쉽게 말해, 라파엘은 그저 안내자일뿐 보물의 힘과는 관련이 없는 존재인 듯했다.

아무튼, 엔델 족과 힘을 합쳐야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이내 시공간이 재구동되면서 몸에 힘이 깃들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이제야 좀 차는 기분이 드네.’

요컨대, 아직도 멀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

.

.

며칠 후면 밖으로 나간다는 시현의 말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세간에 떠돌기 시작한 흉흉한 소문은 역병처럼 널리 퍼졌다.

-흠... 이쯤 되면 좀 많이 불안하긴 하네.

-해남에 뭐 보물단지라도 숨겨뒀나? 안에서 2주일 째 뭐하는 거지? 자살한 거 아님? ㄷㄷㄷ

-이번에 하얼빈에서 사람들 많이 죽어서 죄책감이 심했나보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니 무슨 후레쉬맨도 아니고 사람 죽었다고 죄책감이 왜 드냐? 자기 때매 죽은 것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러게. 기력빨렸던 헌터들도 다 깨어났다는데.

-ㅇㅇ괜한 루머 퍼트리지 마라. 인터뷰 한 거 못봤냐?

그나마 며칠 전에 했던 기자인터뷰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청와대 신문고에 시현을 찾아달라는 글이 도배되었을 터였다.

그때 인터뷰에서 시현은 이렇게 말했었다.

-개인단련을 좀 더 하고 싶다.

그 결과 시현은 더 많은 덕후(?)를 양성하게 되었다.

-갸아아아아아악! 울 오빠 단련한대ㅠㅠ

-거기서 더 쌔지면 어쩌려고. 설마 우주 폭발 각?

-ㄹㅇ 폐관수련이었엌ㅋㅋㅋㅋㅋㅋ?

-다치지 말고 쉬엄쉬엄해요 오빠 ㅠㅠ

“다들 걱정이 많구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자신의 SNS에 올라오는 글을 확인한 시현은 휴식을 그만 마치기로 했다.

1분 1초, 수련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새로 얻은 몸에 적응하려면 또 시간이 필요하니까.

언령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심신단련을 속행해왔다.

그 탓에 몇 주 간 만난 사람도 별장에 들린 ‘기술자’ 외에는 전혀 없었다.

스윽-

눈을 감고 정자세를 취했다.

개성에서부터 미친 듯 쏘아지는 기력을 흡수함과 동시에 포켓을 확장했다.

포켓워치에 적힌 숫자는 어느새 최초목표치인 10만을 훌쩍 넘긴 뒤였다.

[SP : 4,478,850]

비로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현이었다.

육체의 열쇠는 이미 여덟 번이나 사용하였고,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힘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환골탈태로 얻은 새 그릇이 가득 찬 것이다.

그리고 염원을 이뤘으니 이제는 그 한계를 돌파할 차례였다.

주어진 힘은 아낌없이 쓰는 것이 옳으니까.

시현의 수련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아가고 또 정진했다.

.

.

.

2027년 겨울, 파주시에 첫눈이 내렸을 때가 되어서야 시현은 집 밖을 나섰다.

설산이 저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져있었고, 앙상하게 뼈만 남아 벌거벗은 나무들은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경계구역 저 아래에선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현은 그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저 달빛 아래에 서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또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하얼빈 전투 이래로 몬스터 놈들은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차원너머 어딘가, 다시 지구로 쳐들어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던전이 숫제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세계는 평화로웠다.

일각에서는 ‘하얼빈의 전투’가 몬스터들의 마지막 발악이라며 종말의 위기는 끝났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시현은 절대 동의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4위계, 7위계, 9위계 등등.

여러 신화급 몬스터까지 희생시키면서 보물을 탈취하려던 게 놈들이다.

이제 와서 포기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 사탄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놈들은 보물찾기놀이를 포기한 게 아니라,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류와 벌일 최후의 전쟁을.

‘그러고 보니 엔델 족과 최후의 전쟁을 치른다고 했던가.’

짐작컨대, 아마 그것 때매 정신이 없어서 지구에 쳐들어오지 않는 것이리라.

저벅-

시현은 아공간에서 환히 빛나는 열쇠 하나를 꺼냈다.

위리놈이 남기고 간 열쇠였다.

아직 사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사용할 단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포켓과 육체의 수준은 정도껏 끌어올렸으니 이제는 새로운 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정신의 열쇠? 아니면 기력의 열쇠?

그게 뭐든 좋았다.

강해지기만 할 수 있다면.

시현은 세 번째 열쇠를 구슬에 꽂고 돌렸다.

철커덕!

솨아아아아아아-

이번에도 역시나 라파엘이 시현을 반겼다.

-이봐요!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잖아요. 그런데 왜 또 육체의 열쇠를··· 어? 잠깐. 육체의 열쇠가 아니잖아?

설마 아니겠지, 라는 뜻이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째서 함부로 사용하는 거냐고요! 내가 사용하지 말했잖아요!

“뭘 그렇게 화를 내. 내가 써보고 알려주면 되잖아?”

라파엘,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언뜻 보면 이중인격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간에, 시현은 힘만 얻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라파엘에게 할 말이 있었다.

“지금 한참 최후의 전쟁을 치르고 있겠지?”

-맞아요. 맞는데···

역시. 몬스터 놈들은 엔델 족과 대 전쟁을 치르느라 지구에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 말이 맞긴 한데, 왜 그 열쇠를 우리허락도 없이 쓰냐고!

“이미 썼으니까 잔소리 좀 그만 해.”

다른 건 다 되면서 이 열쇠만 안 된다?

정말 뭐가 있긴 있나보다.

과연 무슨 힘을 얻을 수 있을지 시현은 잔뜩 기대됐다.

한껏 흥분하면서도 결의에 찬 투로 라파엘에게 말했다.

“내가 그 최후의 전쟁에 낄 수 있게 해줘.”

-에에? 뭐라고요?

“왜 놀라고 그래? 내가 돕겠다는데, 너희 엔델 족에게도 좋은 거 아냐?”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놈들의 고향으로 역습을 가고 싶었던 시현이다.

계속 당하고만은 있을 수 없었으니까.

이제는 먼저 움직여야할 때!

이전보다 수백 배나 더 강력해졌으니 자신이 있었다.

물론 혼자서는 안 되겠지만, 엔델 족과 힘을 합쳐 싸운다면 가능할 것이리라.

더욱이 ‘이 열쇠’의 힘까지 얻는다면!

-하아.... 그럴 수는 없는데...

“왜? 뭐가 그럴 수는 없다는 건데? 몬스터 놈들은 지구로 잘도 넘어오는데, 나라도 못 간다는 법 있나?”

기력도 대폭 늘렸으니 차원의 문 따위를 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전 잘 모르겠어요. 흐잉.

라파엘은 도통 이해 못할 구슬픈 목소리를 냈고, 그와 동시에 시공간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열쇠의 완전한 힘이 발동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점차 빛이 서서히 수그러들었고,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고자 시현이 양팔을 벌린 순간이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아무리 기다려도 ‘새로운 힘’따위는 생기지 않았고,

그 대신 눈앞에 눈부신 게이트가 나타났다.

아무리 봐도 몬스터 놈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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