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Genocide.
집단학살, 민족학살을 가리키는 말로, 즉 타 종족 몬스터들에게만 적용되는 스킬이었다.
시현이 수차례 실험해본 결과 범위와 위력이 기존 학살 따위의 언령보다 훨씬 강했다.
즉, 시현의 비기 중에 하나.
“Genocide.”
시작되었다.
-크릉?
-크르르르르르를.....
몬스터들보다 더 음침하고 어두운 기운이 공중에 감돌았다.
겁먹은 놈들은 뭔가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닫고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심판은 떨어졌다.
대학살이.
촤라라라라라라락!
800만 중 절반이 싸늘한 사체로 변하였다.
대학살의 범위에서 간신히 벗어났던 놈들은 목숨을 부지했으나 그 위엄에 몸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언령의 후유증.
핵폭탄이 터지면 방사능이 남듯이, 언령에는 몬스터들의 혼을 뒤흔들 2차 공격이 깃들어있었다.
놈들은 단체로 약이라도 한 사발 먹은 듯 몸을 배배꼬았다.
언뜻 보면 좀비가 된 사람처럼,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키오오오오오오오오!
-겁먹지 말거라
-가라, 놈은 힘이 빠졌노라!
불멸의 사신 리치가 겁에 질린 하수인들의 공포심을 누그러트렸다.
역시 몬스터 4위계는 달라도 뭐가 다른 것인가?
시현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놈들과는 자못 비교할 수 없는 힘이 놈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조심해야겠군.’
이제 2차전 돌입이다.
제노사이드를 사용함으로써 그만큼 기력을 많이 소모했지만 아직까진 여유롭다.
더욱이 지금 동료헌터들이 지원을 오고 있는 중일 테니까.
-교오오오오오오!
.
.
.
“굳이··· 우리가 가야하나?”
헌터중앙기구 세계본부.
류건의 지원요청을 받고서 모든 의장단이 긴급히 모여 중대사안을 정하는 중이었다.
지원을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제 생각도 같습니다. 파트너 관계라고 해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우리가 굳이 목숨까지 걸면서 도와야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시현이 이 사실을 본다면 땅을 치며 통탄할 터.
이런 보답을 받으려고 그간 인류를 위해 노력했던 것인가?
허나 애석하게도, 실제로 대부분 이들의 생각이 그러했다.
“박시현에게 신화급은 그냥 식은 죽 먹기가 아닙니까? 네 마리라고 우리가 뭐 도와야하기까지 할까요?”
“그냥 중국지사에 있는 헌터들이나 보내지요.”
“그럽시다. 다른 나라도 명목상 최소한의 지원만 보내고 있다고 하는데.”
NOPEC산하의 국가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하얼빈으로 헌터들을 지원 보내고 있었으나 전력은 아니었다.
그들도 자주국방의 수호를 위해 강한 헌터들은 국가에 남겨뒀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헌터중앙기구 역시 안전한 길을 택할 것으로 보였다.
괜히 나섰다가 피를 볼 수도 있으니까.
어차피 박시현이 다 막아줄 것인데, 뭘 나설 게 있겠는가?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회의 역시 이쯤에서 끝날 것이라 생각한 순간이었다.
“세계 각 지사의 모든 헌터들 하얼빈으로 당장 출동시키게.”
“······부의장님!”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결연한 명령을 내린 부의장은 이어 덧붙였다.
“그리고 배지에 비상기능 발동하도록.”
“그건!”
“예?”
지난 수개월 간 부의장의 지시로 판매한 ‘배지’에는 단순 배리어 기능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지구반대편에 있어도, 문자를 보내듯 배지에 알람을 울리게 할 수 있었다.
헌데 그 사실을 모르는지 몇몇 의장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비상알람기능이라뇨?”
그렇다.
비상알람기능을 포함한 몇 가지 특수기능은 의장단도 모르는 일급기밀.
부의장을 비롯한 핵심인사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핵심인사들조차 알지 못하는 특급기능까지 있었다.
부의장은 이번 기회에 그것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이보게들, 인류가 멸할지도 모르는 것이오. 당장들 정신 차리게! 지금 이익을 따질 때가 아니야.”
“하지만··· 갑자기 이러시면···.”
당황할 수밖에!
이건 마치 가장 나쁜 놈이 갑자기 착한 척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아무튼, 하라면 해야겠지만.
“이번기회에 우리가 활약만 잘한다면, 충분히 세계기구로서 발돋움을 수 있을 터. 지원비용과 포상금을 내걸어 전 세계의 헌터들에게 당장 지원을 요청하게. 최대한 많이 오게 만들어야해.”
계획이 있다는 듯, 노년의 부의장은 야망이 흘러넘치는 눈빛을 지었다.
.
.
.
하얼빈.
몬스터들의 사체가 바닥에 쌓여 사체언덕을 형성하였다.
몬스터들을 그렇게 많이 죽인만큼 시현의 기력 또한 바닥났다.
“기력흡수.”
솨라라라라라!
사체들로부터 기력을 흡수하여 가득채웠다.
이렇듯 몬스터들의 사체는 여러모로 유용했다.
괜히 시현이 영술사를 탐내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한 250만 남았나.’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했다.
리치 녀석이 숨은 채 끊임없이 저주기를 날리는 바람에 시간이 좀 지체되긴 했지만 위험한 상황은 없었다.
-교오오오오오오!
재차 놈들이 달려든다.
시현은 쿨타임이 돌아있는 스킬들 중 최상의 위력을 지닌 것들을 차례대로 발동하였다.
“댄싱소드(Dancing sword).”
“소어랜스(Soar rance).”
“블레이징 플레임(Blazing flame).”
“홀리 크로스(Holy cross).”
좌아아아아-
수두두두두두두둣!
“메테오 스트라이크 리버스(Meteor strike reverse).”
구우우우우우웅!
지면에서 운석이 생성돼 하늘 위로 비산한다.
해괴망측하게 생긴 몬스터 놈들을 짓뭉개고 불로 태우며, 쾌검으로 순식간에 도륙해버렸다.
이대로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고비는 예측치 못한 순간 찾아온다 했던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불길의 브레스를 내뿜는 바알로크.
맹독을 온몸에 담아 시현을 덮치는 히드라까지.
놈들은 작정이라도 했는지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시현의 기력이 어느 정도 빠지길 기다렸던 것이다.
‘어딜.’
사실 거기까지는 그다지 위협이 되진 않았다.
허나 여기에 세레나까지 낀다면?
솨앙!
시현의 위치가 자의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이동되었다.
세레나의 조종술이었다.
찰나, 시현의 몸뚱이를 향해 맹독 브레스가 덮쳐들었다.
‘미친.’
콰아아아아아아-!
‘살짝 모자라.’
시도는 좋았으나 이 정도로 시현을 끝내기에는 살짝 모자랐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시현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을 터!
‘이젠 내 차례다.’
몸의 제어권을 되찾아온 시현은 역동작으로 몸을 비틀었다.
“폭발. 사살.”
퐈즈즈즈즉!
카앙! 촤라락!
바알로크와 히드라 그리고 세레나의 몸뚱이가 찢어져 나가 사체 탑의 일부가 되었다.
15위계의 히드라, 7위계의 발록.
신화급 셋이 동시에 죽는 살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
몸에 불어 닥친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설마···.’
포켓에서 기력이 흘러나오질 않는다.
마치 쇠사슬에 묶여 구속된 것처럼.
-그흐흐···.
그 앞에는 사악한 풍모를 지닌 리치가 흐느끼며 웃고 있었다.
봉인저항버프까지 가차 없이 뚫어버린 리치의 포켓봉인술.
결국 염려했던 일이 터졌다.
그렇게 조심을 하고 또 조심을 했는데도, 역시 물량 앞에서는 장사 없는 것인가?
‘이 새끼들··· 신화급 셋이 미끼를 던져주고?’
포켓봉인.
시현에게 불어 닥친 최초의 난관이었다.
.
.
.
포켓이 봉인된 뒤로 고전했지만 그래도 육체의 열쇠를 먹었던 시현이다.
아무런 버프기도, 스킬도 없이 오롯이 육체에 의지한 채 놈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그나마 신화급 세 마리를 처치한 상태여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애를 먹었을 터였다.
‘후- 슬슬 힘에 부치는데.’
문제는 체력이 모자라다는 것.
체력을 채울 수 있는 기력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만큼 상황은 더욱 더 심각했다.
-크흐흐.. 고독한 영웅이여! 너의 인간들의 볼품없는 단결력을 탓하거라!
아무도 시현에게 지원을 오지 않는 이 상황을 비웃는 리치였다.
자기들은 수백 만 대군이 함께하고 있는데, 시현은 쭉 혼자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세상엔 타이밍이라는 게 있잖은가?
때마침, 그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시현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오빠!”
한국 최고의 서포터 김지원!
그리고 그 뒤에는 류건, 임장호, 강보검, 방어진 등 한국지사 S급 멤버들까지 하얼빈의 중심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모두 현자리움에서 자체 제작한 윙슈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우리도 왔다!”
최희를 포함한 고스헌트 그리고 중국지사까지.
“기력상승버프 최고단계-”
사르르르르!
최희의 버프가 시현의 포켓을 최대로 강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헌터들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헌터중앙기구 세계본부의 지원을 받고 왔습니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다 돕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시현 님을 도울 차례!”
충분히 감격 받을 만한 순간이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시현은 공중에서 몸을 돌려 바닥에 안전히 착지했다.
그 틈에 류건이 재빨리 시현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역시나 봉인이군. 지원 씨! 포켓봉인저주 해제술!”
솨아아아아!
류건의 지시로 지원의 백옥 봉이 즉각 움직였다.
시현의 포켓을 억제하고 있던 저주의 기운이 약해져갔다.
“이걸론 모자라.”
S급인 지원이 리치의 저주를 단번에 푸는 건 불가능했다.
류건은 무전으로 널리 알렸다.
-포켓봉인 해제술 가능한 서포터, 즉시!
고스헌트, 중국지사 등 세계에서 모인 헌터들 중 서포터란 서포터는 전부 손을 뻗었다.
수백 명의 기가 쏟아져나와 시현의 포켓을 감쌌다.
점점 구속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봉인술을 풀었다.
“나머지 몬스터들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류건의 든든한 외침이 시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리치와의 일대일에서 포켓을 봉인당할 일은 더더욱 없었고.
이제는 혼자가 아닌 시현인 것이다.
-그어어어어어어! 감히 나의 봉인술을!
대노하는 리치에게 시현이 도약했다.
콰아아아아아 -!
빛이 번쩍, 한 번 돌았다.
리치의 몸은 곤죽이 되어 터져나갔고,
촤라라라라락!
그 경쾌한 소리는 전승을 알리는 승전보가 되었다.
“와아아아아아!!”
“시현 님이 놈을 쓰러트렸다!”
“우오오오오오오!”
기세가 등등해진 인간들은 몬스터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죽여!”
“본때를 보여주자!”
하얼빈에 헌터들은 점점 더 늘어갔고, 몬스터들의 숫자는 반대로 줄어들어갔다.
이대로 끝나는 듯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두둥!
두두둥!
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듯 여기저기서 강력한 압력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온세상이 검게 물들어갔다.
검은색 페인트를 도화지에 들이부은 것처럼 시커먼 게이트로 가득찼다.
온세상이 게이트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이게 무슨···.”
유례없는 상황에 헌터들은 당황하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들 예감은 했지만 차마 믿고 싶지 않았다.
‘설마...’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쿄오오오오오오오오오!
-기아아아아아아악!
몬스터들의 본대本隊가 지구로 이동하였다.
마치 자기네 집 드나들듯이 자유롭게 나타나 온 세상을 차지했다.
그 수는 수백만 따위의 수준이 아니었다.
도저히 여기 모인 헌터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물량이었다.
“어떻게···.”
포기.
그 단어만이 헌터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B급이던 SS급이던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겁을 먹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 사건을 예견했다는 듯 결연히 상황을 받아들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게 오늘이었을 줄은 몰랐지.’
박시현.
그가 말했다.
“금제의 소환술.”
숫자가 딸린다면 이쪽도 채우면 그만이었다.
인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날아오르라.”
이제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때가 되었다.
“신화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