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탁.
은구슬이 멈춘 지점은 당연하게도 36이었다.
“어, 어어어···.”
불가능하다, 불가능해!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수만 가지의 생각이 최희의 머릿속을 덮쳤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이치였다.
이미 시현의 언령이 발동된 뒤였으니까, 36이 나온 건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그럼에도 최희는 인정하지 않았다.
“부정행위 했죠?”
“아뇨, 보셨잖아요. 어떠한 스킬도 안 썼다는 거.”
“크윽···. 그런데 어떻게 36이 나와요?”
“하 참. 아마추어처럼 왜 그래요? 카지노가 원래 이런 곳 인거 몰라요? 어디 한두 번 속고 사셨나.”
아까 최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은 시현이었다.
그런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최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럴 거면 내 돈이나 걸라고 할 걸. 36배인데···.’
후회막심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약속한 건 지켜야했기에.
“그래요. 약속했던 대로 고려해볼게요. 단 확신은 못 드려요.”
“좋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한 일이 년 쯤?”
“뭐요?”
“왜요. 약속은 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결정하겠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까칠하다 못해 억지까지 부리기 시작하는 최희.
‘성녀’와 ‘서포터’라는 칭호가 무색하리만치 놀라운 행동이었다.
‘전혀 딴판이군.’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최후통첩을 가하는 수밖에.
“뭐, 어쨌든 간에 또 보게 될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요?”
“회사에서 보겠죠. 관둘 거 아니잖아요?”
“···?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네.”
“아, 그게 뭔 소리냐면···”
그게 무슨 소린지 설명하기 전에 최희의 전화기가 앞서 울렸다.
“잠시 만요.”
전화를 받은 최희는 무슨 청천병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네? 현자리움으로 들어간다고요?!”
최희를 만나러 라스베이거스에 오기 전, 이미 고스헌트를 인수하기로 했던 시현이었다.
.
.
.
현자리움의 헌터기지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전도유망한 신입 헌터들을 모집했다.
면접인터뷰는 모두 말콤이 맡았다.
당초 욕심이 있거나 악한 자들은 아예 받질 않았다.
그저 순종적이고 정의롭고, 입이 매우 무거운 헌터들만 뽑았다.
성대한 계획에 있어서, 정의롭지 못한 자들은 계획을 그르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고스헌트는 통째로 인수하였다.
“최희 씨.”
“네···.”
기세 좋던 그녀는 회사가 강제로 한국으로 이동된 바람에 꼼짝없이 귀국해야했다.
고스헌트에서 퇴사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는 이미 파주시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지금부터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실상 면접이고 자시고 할 게 있겠는가?
그녀는 면접관 면전에 대놓고 욕을 해도 무조건 붙을 터였다.
그럼에도 면접을 보는 이유는?
절차상 관례이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 물어볼 게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시현이 아니라 최희였다.
“그럼 왜 카지노까지 찾아와서 나한테 오라고 했던 거죠? 스토커도 아니고, 생각해보니 어이가 없네요. 어차피 당신 회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 그거 말이죠. 당신이 그렇게 운운하던 최소한의 ‘예의’를 보이려고 갔던 겁니다.”
“아······.”
졌다. 말싸움에서도 졌고 기싸움에서도 졌다.
갑과 을은 애초에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찾아온 최희는 시현에게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
‘이게바로 ··· 오일머니인가···?’
현자리움에서 매일같이 세계로 수출하는 약 4천만 배럴의 원유.
전체원유시장의 40%를 차지하는 양인만큼 현자리움은 압도적으로 거대한 회사였다.
그리고 현자리움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남자, 시현은 더더욱 압도적인 남자였고.
“그럼 이번엔 제가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헌신이라는 건 뭐죠?”
“헌신···?”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는데, 최희 씨 특기에 축복과 헌신이 명시돼있더군요.”
“······?!”
경악스러웠다.
지금껏 자신의 능력을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는 자는 없었는데!
설령 스캐너한테 스캔을 당하더라도 ‘수준차이’ 때문에 들키지 않았던 것인데.
‘저 남자, 수준이 아예 다르잖아....’
물론 시현이 강한 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SS급?
그딴 건 가볍게 씹어 먹는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지구상에선 그에 필적할 존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권능을 가지고 있기에 스캔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설마 행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언령’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 시현이 입 꼬리를 올리며 재차 물었다.
“말씀해보세요. 헌신이 뭔지.”
.
.
.
“세계본부에서 단독적으로 개발한 배지를 상용화하겠다는 말씀입니까?”
현자리움 본사 의장실.
보고를 위해 시현을 기다리고 있던 류건은 세계본부 부의장 존슨과 통화중이었다.
대화주제는 세계본부에서 단독적으로 개발한 ‘방어배지’.
원래는 헌터중앙기구 소속 S급 헌터 이상에게만 보급되던 것이지만,
이제는 그것을 헌터중앙기구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누구에게나 판매하겠다는 게 부의장의 뜻이었다.
-어차피 회사 간에 정보를 다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우리 쪽에선 차라리 배지를 공개적으로 판매하겠다는 뜻일세.
그 말은 즉, 어차피 현자리움과 기술을 공유하게 될 텐데, 그 전에 미리 선수 쳐서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심산이었다.
“기존의 배지는 어쨌습니까?”
-이번에 새로 업그레이드해서 우리 헌터중앙기구의 헌터들은 이미 다 교체한 상태라네.
“의장님이 결정하신 겁니까? 그분께서 이런 결정을 했을 리가 없는데.”
-그건 자네가 알 거 없잖은가? 세계본부 소속도 아니고 말이야.
“이봐요, 부의장님. 나 여기 현자리움 대표입니다.”
-······크흠, 크흠.
아무래도 부의장의 결정인 듯했다.
“그나저나 의장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더 악화되셨네. 그러지 말고 언제 얼굴이라도 한 번 뵈러오지 그러나? 안 그래도 자네를 특별히 더 아껴주셨던 분인데.
“조만간 찾아뵙죠.”
철컥.
“어, 와있었군요.”
마침 면접을 끝내고 의장실 안으로 들어온 시현이 류건 옆에 앉았다.
류건은 급히 전화를 끊고 시현에게 즉각 보고했다.
“중앙기구 부의장이 우리 쪽에 배지를 팔겠다더군요.”
“배지요?”
“예. 몸에 지니고 있으면 위급상황 시 몸에 8중 배리어를 쳐줍니다. 원래는 S급 헌터 이상에게만 보급되던 것인데, 이번에 사업아이템으로 탈바꿈 했다네요. 업그레이드까지 해서요.”
“아아.”
의장의 속내를 이해했는지 시현은 질문하는 대신 답을 내렸다.
“어쨌든 나쁠 건 없네요. 말 나온 김에 우리도 사들입시다, 몽땅 다.”
“예.”
자사 헌터들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싶은 시현이었기에 배지의 값이 얼마가 되었던 최상급으로 주문하라고 지시했다.
“존슨 부의장도 참 욕심 많은 노인네란 말이죠. 저번에 들어보니 10대미궁을 그렇게 쏘다닌다고 하던데.”
“하하, 이쪽에선 유명합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전문탐사 팀을 대동해서 돌아다닌 게 벌써 몇 년 째죠. 아마 구슬이나 열쇠를 찾고있는 것 같은데.”
실은 시현이 이미 세 개나 찾았지만 말이다.
“안타까운 노인이군요. 아무튼, 그래서 지금까지 입사한 헌터가 몇 명이죠?”
“총 574명입니다.”
“으음. 그럼 슬슬 진행해야겠군요.”
“일전에 말씀하셨던 계획말씀입니까?”
끄덕.
시현의 고개가 절로 내려간다.
그 성대한 계획에 한 걸음 성큼 다가섰기 때문이리라.
“그 중에서 조건에 부합하는 헌터들 간추리고 간추려서 계약진행하세요.”
“SSS 시크릿 에이전트 말씀이죠? 알겠습니다.”
SSS 시크릿 에이전트.
자신만의 정예부대를 신설하고자 했던 시현은 그때 그 팀명이 그리웠는지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계약을 거절하는 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비밀유지가 돼야할 텐데.”
“아뇨. 조건에 부합한 헌터들이라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비밀을 누설하지도 않을 테고.”
애초에 말콤의 스캐닝을 이용해 그런 자들만 스카우트했다.
성대한 계획의 비밀이 누설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긴. 가진 권능을 더 좋게 바꿔주겠다는데, 거절할 리가 없겠지요.”
그 계획에 동참한 류건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시현이 열쇠와 구슬을 이용해 특수부대 SSS팀을 양성하리란 것을.
시현은 마치 엔델 족이 인간에게 권능을 하사하였던 것처럼 자청해서 신이 되기로 한 것이다.
신이 인류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스스로 지킬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 SSS팀 팀장은 어떻게 할까요?”
“임장호 씨 한 번 알아보세요.”
마치 미리 점해놓기라도 했다는 듯 시현은 곧바로 임장호를 언급했다.
단순 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잘할 사람은 찾기 힘들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한 번 영입해보죠. 그리고 또 지시할 사항 있으십니까?”
“발전소. 발전소가 필요해요. SSS팀을 빠르게 만들려면.”
현자리움 타운 내에 있는 발전소는 원유를 생산해내느라 숨 돌릴 틈이 없었다.
때문에 SSS팀을 위한 새로운 발전소단지를 건설해야 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만리장성과 맞먹을 정도로 말이다.
“새로운 부지가 필요하겠군요.”
현자리움 타운은 이미 완공된 지 오래, 더 이상 새로운 시설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영토는 외국인투기과열로 인해 남아나는 땅이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또 국유지를 사용해야한다는 건데···.”
그때였다.
지이잉-
이번에도 류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의장님.”
둘은 격식을 차리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류건은 가볍게 양해를 구한 뒤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얼마 안 가 낯빛이 어둑해졌다.
뚝.
이내 전화를 끊은 류건은 코를 긁적였다.
아주 난감할 때만 나오는 버릇이었다.
“뭐 문제라도 있나요?”
“예.”
“음···.”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대답하니 시현은 문득 걱정이 되었다.
하는 일이 잘돼가고 있으면 항상 어딘가에서 제동이 걸려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딱 그러한 경우였다.
“독도해저도시 말입니다.”
“아, 그거였어요?”
안 들어봐도 알 만한 사항이었다.
얼마 전 정부에 독도해저도시 건축허가를 신청했는데 거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일본에서 심하게 반대합니까?”
“예. 우리 정부야 상관은 없지만, 일본 측에서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내비쳤다고 합니다.”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분쟁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흠. 일본이 요새 친한 정책을 펼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던 모양이다.
하기사, 한국의 여야권 인사들이 독도에 방문만 해도 반대 시위를 하는 놈들인데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일본정서상, 일본 국민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모양입니다. 뭐, 일본정부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이런 거겠지요.”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시현은 충분히 두려워할만한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훌륭한 정치적도구이기도 했다.
친한정책을 펼치면서도 한국정부에 쉽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래도 이베 총리는 이미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미친 놈들이. 왜 자꾸 우리 땅에 참견을...'
“뭐, 뾰족한 수 없겠어요?”
시현의 물음에 류건은 머리를 100% 풀가동했다.
마치 면접관에게 즉흥적으로 질문을 받은 취업준비생처럼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그리고 그 결과,
“으음.”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딱! 핑거스냅을 치면서 말했다.
“독도해저도시도 건설하고, 발전소를 지을 부지도 마련하고. 일석이조인 방법이 있습니다.”
류건은 지도를 펼쳐 북한과 일본을 동시에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