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호화로운 별장의 지하벙커.
첩첩산중의 보안이 걸려있었지만 무차별 텔레포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시현은 보란 듯이 가장 안쪽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선, 정장을 갖춰 입은 이들이 한창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
.
.
보기만 해도 혀를 내두를 수준의 첨단회의실.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은 인터넷에 치면 바로 얼굴이 나올법한 사내들이었다.
무슨무슨 국장, 또 무슨무슨 차관 등등.
러시아 권력의 중추에 서있는 정치권인사들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썩은 거지?’
장관? 대통령?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소련의 부활을 꿈꾸는 자들이 꽤 많다는 것.
시현이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나라든, 마피아와 정재계는 때려야 땔 수 없는 공생관계라는 말.
다 옛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권능’이 주어진 이래로 더 심각해진 듯했다.
스스로를 지키라고 부여해준 권능을 서로의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있는 게 바로 그들이었다.
“다, 당신은······.”
러시아 정치인들은 경악하여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현이 이렇게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이가 있었다.
‘ROS? 녀석인가.’
순식간에 스캔능력으로 꿰뚫어보니 과연 ROS의 우두머리였다.
등급은 무려 SS급 헌터, 권능은 무도가.
‘SS급은 처음이네.’
SS급 헌터는 얼마나 강인할지 궁금했었는데 마침 잘 됐다.
이 기회에 느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때였다.
외부에서 긴박한 소리가 전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ROS의 대원들이 출동한 모양이었다.
콰아아!
순간 벽에 허물어졌고, 거대하게 뚫린 구멍 안으로 복면을 사내들이 미친 듯이 아우성을 내지르며 들어왔다.
“죽여!”
“으아아아아!”
스윽-
빠르게 스캔한 결과, A급부터 S급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시현이 관심을 보이는 건 오로지 한 명.
가운데에 앉아있는 ROS의 수장이었다.
“쫄다구는 빠져.”
“···?!!”
콰아아앙!
반탄공.
시현으로부터 척력(斥力)이 발동하여, 달려들었던 ROS놈들이 튕겨져 나갔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너뿐이라서.”
과연 강자끼리는 생각이 통하는 걸까?
“미친 원숭이 새끼가-!”
우두머리라는 놈이 쾌속으로 짓쳐들어 오른 주먹을 뻗었다.
시커먼 기로 응어리진 오른손에는 무도가답게 붉은색 너클이 끼어져있었다.
대충 보아도 수백억에 달하는 무구!
하지만 시현은 기본적인 슈트조차도 입지 않은 상황.
그런 두 남자의 주먹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남자답게 주먹 대 주먹으로, 시현 역시 주먹을 뻗은 상태였다.
그리고,
콰앙!
거대한 스케일과는 달리 요란한 소리는 없었다.
그저 단 한 번의 파동이 터져 나왔을 뿐이고,
SS급 헌터라던 ROS의 우두머리는 온몸이 박살나는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했다.
그리고 이내 세상과 작별, 그게 끝이었다.
.
.
.
ROS의 우두머리는 처치했으니 이제는 사태를 마무리 지을 단계였다.
시현은 러시아 정치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치인들이 대체 뭘 얻어먹으려고 여기 온 거야?”
다른 나라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언젠가는 복병이 되어 돌아올 놈들, 세계를 시궁창에 빠트릴 만한 놈들이었으니까.
헌데 놈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게 돈이 되니까···.”
정녕 ROS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자는 없었다.
그저 돈과 권력.
그 달콤한 것을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 우리한테만 그러지? 지금 세계에서 안 그런 곳이 어디 있다고!”
성깔 있는 민족답게 러시안 정치인들은 되레 시현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 어디 그 잘난 입을 나불거리나 보자.”
시현은 가슴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지금까지 쭉 라이브 방송이 진행 중이었으며 반응 역시 여전히 뜨거웠다.
-Russians? Oh my god!!! FUCK!!!!!
-러시아 정치인들? ㄹㅇ?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영화가 아닌 것 같은데? 스케일이 ㅎㄷㄷ..
-러시아 개객기!!
-인터폴님들! 여기에요 여기!!
세계시민들의 반응을 본 시현은 정치인들을 향해 말했다.
“솔직히 말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만행을 모조리 말해야했다.
수천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는 앞에서.
.
.
.
세계최대의 마피아 조직 ROS를 처단한 시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국으로 무사 귀국해 파주로 돌아갔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온 것을 러시아에서 문제 삼을까 걱정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시현을 보내주었다.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엎드려 절을 할 기세였다.
썩어빠진 부정부패 세력을 직접 잡아주었으니까.
시현이 귀국했을 땐 한국의 매스컴 역시 난리가 아니었다.
현자리움 타운에 기자들이 몰려들어 시현을 찾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인터뷰할 수 없었다.
시현은 단 한 마디만 남기고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키야!
‘훗. 좀 괜찮았나?’
스스로 생각해봐도 꽤 멋있는 말이었다.
혹시 시현의 가치관이 변한 걸까?
어째선지 점점 슈퍼히어로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니까.’
한편으론 유치한 생각이기도 했지만 시현은 사뭇 진지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일단 오늘은 좀 쉬자.’
시현은 도로 들어가 숙면을 취했다.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긴 했지만 그만큼 지구가 깨끗해졌으니 그걸로 된 것이다.
‘아, 맞다.’
그런데 깜빡하고 놓친 게 하나 있었다.
‘ROS랑 세계본부랑 서로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다. 너무 피곤하다. 일단은 좀 쉬어야겠다.
이럴 때를 위해 데려온 직원이 있지 않은가!
시현은 제이슨을 불러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 도서관’을 전이해주었다.
“······제가 할 일인가요?”
“네. 이것만 좀 찾아줘요. 혹시 적대세력이 있는지도 좀 알아봐주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적대세력은 어떻게 할 생각이신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으로, 재활용이 가능한 건 재활용봉투로 분류해야죠.”
그것은, 파주시에 국한되었던 유토피아가 세계로 확장되려는 움직임이었다.
.
.
.
다음주,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실험이 진행되었다.
현자리움 타운 북부 지대.
대한&현자 연구소 연구진이 공동으로 개발한 ‘프로텍터’를 모래땅 한 가운데에 설치하였다.
“후- 떨리냐?”
“네가 더 떨고있는 거 같은데? 대기업 후계자라는 놈이 배포가 그렇게 작아서야.”
“그러는 너는··· 매일 석유 4천만 배럴씩 찍어내는 오일리치잖아···.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결계 외부, 시현과 용수는 간부진들과 함께 곧 벌어질 실험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선보이는 실험인지라 다들 긴장한 상태였다.
“느낌이 좋아. 성공할 거다.”
시현이 마지막으로 받았던 연구결과만 보아도 성공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래, 꼭 그랬으면 좋겠다. 친구야, 우리 일 한 번 내보자. 아자!”
그리고 마침내.
-규모 13800평짜리 1성 던전, 소환합니다.
실험을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이 울렸고, 결계 안에서 안전장치를 몸에 두른 채 서있던 실험자가 컨트롤러를 작동시켰다.
띡-
“······.”
컨트롤러는 작동했지만 주변은 한없이 고요했다.
결계 밖은 물론, 결계 안의 실험지역까지 멀쩡했다.
땅이 꺼지거나하는 일은 없었다.
“뗐구나. 첫 번째 발걸음.”
“으아아아아아!”
그렇다. 마침내,
-1차 실험 성공입니다.
시현의 꿈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
.
.
그로부터 두 달,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현자리움 타운이 완공되었고, 그 주위는 프로텍터로 완전히 보호되었다.
프로텍터 초기 모델의 경우, 최대 10만 평까지 효력이 미치기 때문에 조금만 있어도 모든 곳을 방어할 수 있었다.
즉, 현자리움 타운은 던전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공간이 된 것이다.
또한 시현의 지시에 따라 현자리움은 프로텍터 공장을 대폭 건설해 프로텍터 생산에 주력했다.
동시에 세계 각지에서 뛰어난 연구원들을 영입하여 다방면의 연구도 진행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앞서 나아가, 무기 및 슈트산업에도 발을 들였다.
현자리움에서 최고의 조건을 제시했기에 뛰어난 연구원들은 영입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직장에 들어가는 것만큼 또 좋은 조건이 있을까?
파주시. 연봉. 복지.
국가적 차원의 대폭적인 지원까지!
더욱이 기업총수가 시현인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 탓에 해외경쟁사들이 골머리를 썩혀야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현자리움과 더불어 나날이 고속성장하고 있는 회사가 하나 있었다.
대한그룹.
이용수는 지난 1년간의 뛰어난 실적을 바탕으로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착실하게 다졌다.
이 모든 것이 시현 덕택이었다.
“고맙다, 친구야.”
“소름 돋게 갑자기 무슨.”
그렇게 둘의 우정은 나날이 돈독해져갔다.
“그럼 이제 앞으로 뭐 할 거냐?”
“할 거야 찾으면 셀 수도 없이 많지.”
“정치는 안 하냐? 여기 땅값 올라서 당장 시장선거 나가면 득표율 99% 나오겠던데.”
파주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때문에 시현을 향한 지지율이 하늘을 찌르는 건 당연지사였다.
“정치는 무슨. 일단 헌터기지 안정화가 우선이야.”
던전으로부터 안전해졌다고는 해도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가 열려 몬스터들이 소환될지 모르니까.
“대비를 해야지.”
시현은 성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 헌터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말 강력한 헌터를 양성하고 조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비단 몬스터가 아닌 다른 종족이 불시에 습격 해와도 대항할 수 있도록.
시현은 자신의 손에 담긴 보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면 충분히 가능해.”
권능의 열쇠와 육체의 열쇠 그리고 구슬까지.
마지막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 까짓것 한 번 해보자! 나도 물심양면으로 도우마.”
이용수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시현의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아참, 그런데 뭐 문제가 하나 있다며? 뭔데?”
“흠- 다름이 아니라 지금 새내기 헌터들을 영입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영입이 안 되네.”
어제 헌터양성소에서 수료식이 있었는데, 현자리움에서 건진 헌터는 단 두 명이었다.
예상 같았으면 지금쯤 최소 열 명 이상은 들어왔어야 정상인데······.
“영입팀에서 헛짓거리 하고 있는 거 아냐?”
“그건 절대 아냐.”
시현은 영입본부장 직에 말콤을 임명했다.
스캔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이니만큼 그 누구보다도 영입본부장 자리에 적격인 남자였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건 쓸 만한 헌터들이 영입하기도 전에 다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거야.”
무슨 연유에선지, 양성소를 졸업하는 헌터들 중 자질이 있는 이들은 영입제안을 하기도 전에 해외로 나갔다고 한다.
“해외 어디? 미국?”
“글쎄. 지금 알아보고 있긴 한데 아마 그러겠지.”
안 그래도 어젯밤부터 정보본부장 제이슨이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만사가 잘 풀리나했더니 갑자기 제동이 걸린 듯, 또 어딘가에서 방해하는 세력이 나타난 것 같았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이미 충분히 빠른 거 같다, 친구야.”
용수의 말마따나 너무 정신없이 달려오긴 했다.
가끔씩은 뒤도 돌아보고 해야 하는데···.
“그래, 해장국이나 한 그릇 먹자. 우리 회사식당 주방장 솜씨가 끝내주거든.”
그렇게 말한 시현이 비서를 호출하려던 순간이었다.
지이잉-
급한 용무가 있을 때만 울리는 전화기.
정보본부장 제이슨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의장님.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헌터중앙기구 세계본부의 만행을요!
아무래도 숨을 돌리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