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째앵!
시현이 으르렁 소리치자 바에 진열된 술병들이 산산조각 났다.
힘들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언령의 힘을 깃들여 내지르니 대머리의 러시아인들이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 무릎을 꿇었다.
“커허..어억....”
“어디로 팔아넘겼냐.”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꺼냈다.
글씨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파르르 떨렸음에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꾹꾹 써 내렸다.
슥슥-
“여기... 여기입니다...”
됐다. 놈들은 마인드컨트롤 없이도 순순히 불었다.
겁을 뒤집어쓴 남자가 건넨 메모지에는 언뜻 문장으로 보이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ROS의 우두머리를 찾을 수 있는 장소일 터였다.
“헌데 네놈들도 ROS냐?”
끄덕끄덕.
놈들이 열과 성의를 다해 고개를 숙인다.
우습게도 바 주인장보다 더 찌질한 놈들이었다.
주인장은 그래도 목숨구걸 따위는 하지 않았는데.
“으오오오오!”
이런, 오해였나?
메모장에 적힌 주소를 보느라 잠시 틈을 내주자 놈들이 그때서야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가 기습을 가해온 것이다.
“무식한 놈들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더니. 정말이었군.”
인도적 차원에서 봤을 때 ROS는 확실히 쓰레기집단이다.
인종차별주의. 극단주의. 증오. 폭력.
민족주의. 백인우월사상.
인간쓰레기들!
놈들이 성난 곰 마냥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과연 헌터들답게 현란한 스킬을 발사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시현이 아니었다.
“캔슬.”
현란하 스킬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무無로 돌아가 자연으로 귀결되었다.
“세상에 쓰레기는 필요 없다.”
쓰레기는 치워도 쓰레기!
재활용되는 건 비율상 반에 그치지 않는다.
“네놈들이 그 50%에 속할 것 같지는 않고.”
슥.
결정을 내린 듯 시현은 손을 사악 펼쳤다.
“유언은?”
“좆까는 소리!”
“그럼 뒤져.”
좌아아아악!
.
.
.
“긴 밤 16만원, 여자 추가 시 10% 디스카운트. 어때?”
주소에 적힌 곳, 4층짜리 대저택에 도착한 시현에게, 소위 백마라 불리는 여성들이 덮쳐들었다.
러시아 금발미녀들.
모두 옷을 걸친 듯 만 듯 야시시한 복장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어떤 여성은 엉덩이 사이에 고양이 꼬리가 달려있었다.
저걸 엉덩이에 어떻게 고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못 온 것 같은데.’
빠르게 스캐닝한 결과, 이곳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대형 사창가였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몸을 팔고 있었다.
괜히 대형 사창가가 아닌 것이다.
“우리랑 하려고? 응?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꺄르르, 귀여워라. 우리 귀여운 아시아인. 누나가 괴롭혀줄까?”
그들은 시현을 강간이라도 할 기세로 스멀스멀 다가와 몸을 비벼댔다.
단체로 약이라도 했는지 방에서는 코를 찌르는 냄새가 풍겼고 여기저기에 주사기가 널려있었다.
분명 10년 전의 러시아는 공권력이 매우 강력한 국가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것인지 온가지 불법이란 불법행위가 적나라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응? 여기 내 젖가슴 안 보여?”
한 여자가 혓바닥을 내밀어 시현의 귓구멍에 가져다댔다.
‘이런, 짐승 같은 년들.’
잘못 왔다고 판단하여 다시 텔레포트로 돌아가려던 순간이었다.
“키야아아악!”
여자의 혓바닥은 날카로운 칼날로 변하였고 얼굴은 카멜레온마냥 초록색으로 변색되었다.
몸뚱이는 나무늘보마냥 호리호리한 몸으로 변했다.
다른 여성들도 모두 같았다.
러시아 금발미녀는 다 어디가고 단체로 몬스터로 변해서는 시현에게로 짓쳐들었다.
‘도플갱어?’
일반적인 도플갱어가 아니었다.
도플갱어는 원래 검은색의 그림자처럼 생겼지만 저건 그냥 일반적인 몬스터였다.
파앗!시현은 구석으로 도약해 놈들을 응시했다.
[악마군]
[8성 레어]
[권능 : 변신]
‘변신이었군.’
도플갱어는 사람을 죽이고, 시체와 계약을 맺어 ‘그 사람 자체’가 되는 것이다.
반면 변신은 그냥 변신, ‘그 사람’처럼 변신을 하는 것이다.
유불리를 따졌을 때 변신의 권능이 훨씬 유리하다.
도플갱어는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뭐 어쨌든 간에,
‘ROS 놈들의 아지트가 맞나보군.’
그런데 좀 놀라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저놈들 손발에 특수 장치가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ROS놈들이 몬스터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달아놓은 장치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여기는···’
침입자를 유인해 소리소문 없이 처리하는 악마소굴!
짐작컨대, 이 사창가 전체가 ROS놈들의 사업장 중 하나인 모양이다.
‘제대로 찾아왔군.’
-키요오오오오!
“뒤져.”
촤르르르르륵!
러시아 금발미녀였다면 이렇게 잔인하게는 안 죽였을 텐데.
놈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졌다.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자.’
아무래도 이렇게 심문하듯 쫓아가면 일주일도 더 걸릴 듯하다.
‘한국인들 납치해간 곳을 찾아가면 ROS의 우두머리가 있겠지.’
피랍된 한국인들을 구해줄 마음은 딱히 없었지만 이게 가장 빠른 루트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시현은 곧장 정보를 수집해 한국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의 현 위치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ROS 보스의 얼굴을 알 수만 있다면 당장 위치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관련된 정보가 아예 없었다.
워낙 점조직 적으로 활동하며 늘 그늘에 가려 매스컴에 얼굴을 밝힌 적이 없던 놈들이라 찾을 수가 없던 것이다.
짐작컨대, 부모를 잃고 사회로부터 버려진 전쟁고아들이 아닐까 싶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black list).
이름이 없는 사람들 말이다.
띠리리릭-
때마침 부활교 한국인들의 위치가 파악됐다.
‘4000km?’
피랍된 지 이제 겨우 반나절 지났는데, 그들은 4천 킬로나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단순히 차로 이동한 것이 아닌 모양.
그렇다면 비행수단을 타고 ROS 수뇌부를 향해 이동했을 확률이 높다.
‘곧 만날 수 있겠군.’
스릉!
오늘만 벌써 세 번째 텔레포트였다.
.
.
.
도착한 곳은 여객기 안이었다.
캄캄한 시야에 군수물자 따위가 여기저기 놓여있는 걸로 봐서는 여객기 창고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시현의 뒤로, 숨죽인 채 흐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인?”
“흐... 흐읍...!”
피랍되었다던 열댓 명의 한국인들이었다.
모두 손발이 꽁꽁 묶여 포박당한 채 입은 입마개로 아예 봉쇄된 상태였다.
시현이 입마개를 떼어준 뒤 포박을 풀어주며 말했다.
“부활교?”
“허어어! 신께서 응답하셨도다!”
“음?”
“신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도다!”
“신의 사자시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셨도다!”
“엉엉!”
제대로 찾아온 듯하다.
그들은 선교활동을 온 부활교가 맞았고, 전도지 따위를 길거리에서 돌리다가 스킨헤드에게 붙잡혀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시현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대신 신에게 감사인사를 빌었다.
‘음···.’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샤머니즘을 믿든 부활교를 믿든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는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들. 러시아 법을 어겼다면서요?”
경찰에 걸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모스크바 근교에서 종교행사를 가졌던 모양인데,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허나 그들은 외려 큰 소리로 반박했다.
“하지만 그건 신의 뜻이오!”
“당신들 신은 참 좋은 걸 가르치는군. 정부는 아무 것도 못해주니 알아서 처벌받고 오시죠.”
“으, 으음?”
“이봐요! 잠깐만요!”
무사귀국 따위는 없다!
잘못을 했으면 당당히 죗값을 치르라!
“같은 나라 사람끼리 이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럼 다른 나라 사람끼리는 그래도 되는 건가요? 그리고 언제는 나보고 신의 사자라면서.”
봉사든 선교든 아무리 좋다지만 최소한 다른 나라 법은 존중해줘야지.
“좋은 말로 해선 안 될 것 같으니, 자수해서 죗값을 치르고 와서 국민들께 사과하세요.”
명쾌한 판결을 내린 시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강제 이동시켰다.
“모스크바 경찰서로 가시길.”
수루룩!
.
.
.
짐칸에 시현을 실은 여객기가 어딘가에 착륙했다.
덜커덩.
이내 짐칸이 열리자 바깥에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 복면을 쓴 열댓 명의 남자들이 온갖 무기로 무장한 채 서있었다.
헌데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무기를 앞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뭐, 뭐야?!”
원래였다면, 납치한 한국인 열댓 명이 짐칸에 있어야했지만 안에 있는 건 딱 한 사람.
시현 밖에 없었으니까.
“너 이 새끼 뭐냐고!”
“딱, 발사.”
타앙!
시현이 검지를 한 번 튕겨주자 손끝에서 기탄이 발사돼 거센 속도로 날아갔다.
한 발이 아닌 열여섯 발.
놈들의 숫자에 맞춰 발사한 것이다.
피융!
더없이 깔끔한 소리.
동시에 선혈이 주르륵 흘러나와 아스팔트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털썩.
ROS 조직원들은 저마다 머리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시현이 다가가 그들의 팔뚝을 들춰보니 ROS를 뜻하는 문신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별이 하나 달려있었고, 그 옆엔 숫자 97이 써있었다.
아무래도 간부진을 뜻하는 모양.
바로 죽은 자의 눈을 보고 스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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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보리스랍 스탄코비치(Borislav Stanković)
나이 : 38
성별 : 남
직업 : 헌터 (A급)
소속 : ROS
직급 및 직책 : 중앙회 간부
권능 : 치료
특이사항 1. 과거 크림반도 분쟁지역의 전쟁고아로, 현재 ROS의 중앙회 간부진.
특이사항 2. 스킨헤드로부터 한국인들을 납치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송시킴.
특이사항 3. 아시아인들을 죽일 때마다 팔뚝의 숫자문신을 수정함.
성향 1 : 대의를 위해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음
성향 2 : 아시아인을 증오함
성향 3 : 나치를 존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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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기탄 한 발에 죽은 놈들이었지만 하나씩 스캔해보니 죄다 A급 이상이었다.
시현의 압도적인 무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저벅-
시현은 개중 대장으로 보이는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이놈들이라면 우두머리가 어디 있는지 알겠지.’
“기억추적.”
메모리 트랙킹.
해커의 권능을 가진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
복잡하게 얽혀있는 놈의 두뇌에 기氣가 침투하여 그의 기억을 사진첩 열듯 열람하였다.
‘여기였군.’
여기서부터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다.
‘아주 으슥한 곳에 잘도 숨어있었구나.’
어디,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반인륜적인 짓을 하고 다니는지 드디어 만나볼 수 있을 터였다.
시현은 개인적으로, 그놈들이나 히틀러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인간 말종. 암세포 같은 존재.
어쩌면 몬스터보다도 더 사악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감정이입하니까 또 화나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 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한 번 보자.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또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한 것인지.
그렇게 생각한 시현은 간부의 기억을 따라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
설원 한 가운데에 세워진 별장 지하로 이동한 시현은 뜻밖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