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일이 좀 풀린다싶으면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다른 일이 터진다.
사람 사는 세상이 뭐 다 그렇지 않겠냐마는 이번 건은 좀 심했다.
시현을 찾아온 이명표 대통령은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이렇게 손수 부탁을 한다?
그만큼 답답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겨우 임기 두 달째인데, 벌써부터 큰 위기가 불어 닥쳤으니까.
“그러니까, 할리파 대통령의 짓이라 이거죠?”
“그렇습니다.”
국내의 석유파동은 점차 가라앉았어야했다.
아랍에미리트와 기술협력을 한 대가로, 정상가로 ‘석유공급’을 받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할리파 대통령이 그 약속을 어겼다, 이 말이죠?”
“확실히 어긴 것은 아니지만··· 검토할 시간을 달라더군요.”
이는 사실상 한국에서 먼저 자초한 일이었다.
M던전에서 얻은 정보는 텍사스협약에 따라 7개국에 무상으로 공유해야하지만 한국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먼저 약속을 어긴 건 한국이라고 맹비난하며, 할리파 대통령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갈대처럼 태도를 전환했다.
“그래서 결국은 못 주겠다 이거네요.”
“그렇지요···.”
이명표로서는 속이 탈 지경이었다.
대선 공약으로 기름 값 안정을 내세웠으니 말이다.
“어찌, 방법이 없겠습니까?”
“으음.”
이명표가 애타게 바라보자 시현은 시선을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 영감 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할리파에게 충분히 일러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해?
목숨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시현이 다시는 자신을 찾아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멍청한 것일까?
사과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복수를 해오다니.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아···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하십쇼. 제가 도울 게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이명표는 방법을 묻는 대신 지원을 약속했다.
시현이 무슨 요량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봤자 어차피 자신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방법일 테니까.
“걱정 말고 푸욱- 쉬고 계세요. 아, 우리 현자리움만 좀 도와주시면 되겠네요.”
“어떤 도움 말씀입니까?”
“새로운 사업을 구상중이거든요.”
“계열사설립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뭐, 비슷하죠.”
“호오··· 어떤 영역을 준비하고 계신지?”
“일단 ‘화학’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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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오랜만에 공사현장에 복귀한 시현은 곧장 공사현황부터 물었다.
“몬스터들이 워낙 잘해줘서··· 순조롭게 진행 중에 있어요. 이 정도 속도면 얼마 안 걸릴 듯하네요.”
현자리움 타운이 한창 건설되고 있는 가운데.
서쪽 외곽, 한강과 가까운 지역에 인공호수가 건설 중에 있었다.
이른바 마르지 않는 샘을 말이다.
“관상용으로 지으시는 건가요? 그럼 물고기들이 필요하겠군요. 큭큭!”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뭘 하시려는 건지?”
“일단 지읍시다.”
무지막지한 시설이 엄청난 속도로 건설되고 있었다.
건축허가 같은 거야 뭐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아참, 그리고 또 기발한 생각이 나서 그러는데.”
“또··· 또 뭐가 있나요?”
뛰어난 건축설계업자였지만 이미 시현의 스케일에 많이 놀란 쿠엔틴이었다.
헌데 여기서 또 무언가를 원한다고?
허허, 희소하며 시현에게 물어보았다.
“설마 북한이랑 이어지는 철로라도 만드시려고요?”
“오?”
“······?”
“괜찮은 생각이네요.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허허허···. 아쉽네요.”
쿠엔틴은 못내 아쉽다는 듯 내뱉었다.
그런 대규모의 건축설계를 맞는다면 자신의 경력에 엄청난 이력이 추가될 테니까.
스케일을 뛰어넘어 남북을 잇는다는 건 특별한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 북한의 동의가 있어야겠지만....
아무튼 아쉽게도 그 정도로 큰 스케일은 아닌 듯했다.
“그럼 뭔데요?”
“북한은 아니고, 현자리움 타운을 독도와 연결시킬 겁니다.”
“예? 저기··· 미스터 팍? 여기는 동해부근이 아니라 내륙지방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독도와 연결을 한단 말이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겁니다. 쿠엔틴 씨는 공간만 따로 설계해주시면 되고요.”
“공간이라뇨?! 지금 무슨 말씀하는지 이해할 수가···”
“마치 항구 같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할 아름다운 공간 말이에요.”
“아아······!”
쿠엔틴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독도까지 잇는 이유가 있나요?”
“거기에 DMC를 지으면 어떨까 해서요.”
“DMC라면······”
“독도해양도시.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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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과의 얘기를 끝마친 시현은 양재동의 현자리움 사옥으로 들어갔다.
안내데스크를 거쳐 임원용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가려고 하니 스피드게이트에서 투명패널에 가로 막히고 말았다.
보안요원이 공손하게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저··· 게이트에 사원증 제출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본디 부회장이나 회장급과 같은 최고위층에게는 스피드게이트 옆, 유리문을 의전 차원에서 미리 열어 준다.
사원증 따위를 갖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현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보안요원들이 알아볼 수가 없던 것이다.
또한 오늘은 아진물산을 인수한 이래로 처음으로 방문한 날이었으니까.
연락도 없이 시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터였다.
사실 시현은 그저 업무에 방해가 될까봐 일부러 알리지 않았던 것인데···.
“사원증이 꼭 있어야합니까?”
시현이 난감하다는 듯 선글라스를 벗자 보안요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어! 어어어···?!”
그제야 시현을 알아봤는지 남자는 당황하여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너무 놀라 사고가 멈춘 것이다.
다행히 반대편에 있던 요원이 다급히 리모컨을 눌러 게이트를 열어주었지만···
그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해야 했다.
그런 그의 어깨에 시현의 손이 올라갔다.
“수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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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층 대표이사실.
“아니, 말씀을 하고 오시지. 왜 그냥 오셔서 보안요원 간 떨어지게 만드십니까. 의장님도 참 짓궂은 면이 있으시다니까.”
서류뭉치를 훑고 있던 류건이 서류를 덮으며 물었다.
“말하고 오면 더 불편할까봐 그랬는데. 많이 놀랐답니까? 마지막엔 격려까지 해주고 왔는데.”
“격려라니요?”
“수고하라고 했는걸요.”
“하하.... 그 말 때문에 더 괴로워하고 있을 텐데요.”
수고하라는 말은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회사 안에서 수고하라는 말과 회사 밖에서 수고하라는 말.
“아마 저 같았으면 잘린 줄 알고 조마조마 했을 겁니다.”
“워어··· 그 정도예요? 이상하네.”
“······.”
류건은 지금껏, 시현이 한 점 부족함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생각이 지금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의장님은 사회생활을 한 번도 안 해보셨지...’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간다.
시현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네. 푸훕.’
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정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사람을 키우고 돌봐주기 좋아하는 류건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럼 뭐, 격려금이라도 좀 내려줘요. 휴가도 주고.”
“하하하! 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시현은 고급스럽게 살짝 얼룩진 가죽소파에 몸을 기댔다.
먼저 류건이 보고했다.
“말씀하신 화학부문 신설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인프라구축 상태에 있고요.”
“많이 바쁘겠네요.”
“주 3일 야근은 필수죠. 특히 본사 직원들은요.”
“허어-”
‘욕 나오겠네.’
회사생활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시현이었지만 회사원들의 노고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일꾼은 가족이며 가족이 미래다, 라고 가르침을 주시던 아버지 박종기 덕분이었다.
“이번 일 끝나면 전 직원에게 상여금 일억 원씩 돌리세요.”
“예? 음···. 예?”
류건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싶었지만 되짚어 봐도 분명 ‘상여금 1억 원’이 맞았다.
물론 유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11년 전엔 독일의 포르쉐가 전 직원들에게 1000만원 씩 상여금을 돌린 적이 있었고,
3년 전엔 신기술로 대박을 터트린 구글이 전 직원들에게 3000만원 씩 돌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포르쉐랑 구글이잖아!’
물론 현자리움이 가파르게 성장하고는 있다지만 세계대기업들과 비교하자면 갓난아기와 거인의 차이였다.
“의장님. 전 직원이 8천 명인데, 1억씩 내리면 총 8000억이 필요합니다.”
직원들 배불리는 것을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현 상황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이었다.
“당장 파주시의 공사비용만 생각해도....”
“류건 씨, 아니 류 대표.”
“예?”
“UAE에서 하루에 얼마나 많은 석유를 생산하는지 아십니까? 한화로 약 8천억이 넘는 물량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그의 두 배죠.”
하루에 1~2조.
오일머니가 괜히 오일머니가 아니다.
물론 한정된 자원이라는 게 흠이지만.
“그러니까··· 화학부문을 신설하시는 이유가 기름장사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그거죠.”
“아무 것도 나지 않는 한반도에서요?”
물음에 답하는 것 대신 시현은 검지 하나를 펼쳤다.
한 달만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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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지 정말 한 달이 흘렀을 때 알 수 있었다.
현자리움 타운의 기반시설은 아직도 공사 중에 있었지만 딱 한 곳, 완공된 곳이 있었다.
기력발전소와 인공호수.
기력발전소는 그렇다 쳐도, 인공호수의 이해할 수 없는 시설이었다.
뭐가 이해할 수 없냐하면,
일단 상수관, 송유관, 기력흡수저장장치, 기력주입관, 기력주입캡슐 등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복잡한 시설들이 인공호수 주변에 설치돼있었다.
그리고 외부와 철저히 분리시켜놓은 것도 이상했다.
일급기밀 시설인 냥 인공위성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음··· 의장님 말씀은 여기서 석유를 캐낸다, 이거죠?”
“그렇죠.”
누가 들으면 가히 미친 발상의 계획이었지만··· 류건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적을 보이시겠다는 거군요. 물을 석유로 바꾸는.”
“바로 그겁니다. 하하하.”
‘언령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다만 지속성이 문제일 뿐···.’
그렇다.
물을 석유로 바꾸는 건 언령으로 가능하다.
그 양에 따라 기력이 소모되겠지만 아무튼 가능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호수의 담겨있는 물을 모두 사용하면 주변의 댐에서 언제든지 물을 끌어다 가득 채워 넣을 수 있을 터.
여기 호수 앞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연금술만 부린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의장님이?’
“바쁘실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장 호수의 면적만 해도 석촌호수의 2배.
약 12만평에다가, 1억 배럴에 달하는 물이 담겨있었다.
그 물을 전부 석유로 바꾸려면 한시도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걸 어떻게 다 하시려고.....”
“아뇨. 제가 직접 한다고는 안했는데요.”
“예? 그럼 누가 이걸···”
휘익-
시현은 애완견이라도 부르는 것인지 휘파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저 반대편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쿵!
쾅!
부름을 받은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부지런한 황소처럼!
-우어어어어!
이윽고 시현 앞에 멈춰선 건 몇 달 전 금강산을 습격했던 악마 몬스터.
자간이었다.
위용을 떨칠만한 악마의 무시무시한 날개가 달려있었지만 시현에 의해 묶여있었기에 뛰어온 것이다.
-이... 이몸을 불렀는가....
이제는 시현에게 복종하는 게 좀 익숙해졌는지, 제 주인을 섬기는 것마냥 아주 자연스러운 자간이었다.
“이제부터 네 보직을 바꾸려한다.”
-보직··· 말이냐?
“그래. 아주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어.”
-무, 무엇이지....?
“보아라. 네 근무지다.”
시현이 가리킨 곳은 인공호수 중앙에 두둥실 떠있는 자그마한 인공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