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시현이 이어 내뱉은 말은 모두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헌터기지? 안 짓습니다.”
“예······?”
말을 어버버거리는 시민단체의 대표와 그의 동료들.
시현의 급작스런 태도에 당황해서는 어쩔 줄을 몰랐다.
눈두덩이 부어올라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하하··· 무슨 말씀이신지!”
“시위 같은 건 앞으로 걱정도 마십쇼!”
시민들은 손에 들고있던 피켓을 부수거나 뒤로 감추기 바빴다.
“그거, 힘들게 만든 걸 왜 다 부수십니까. 가보로 고이고이 간직하셔야죠.”
그러자 이번엔 기자라는 자들이 시현을 에워쌌다.
“그 말은 즉··· 헌터기지건설공사를 철수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혹시 문제가 있는 겁니까?”
“갑자기 마음을 돌린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한 마디만 좀 해주시죠!”
피식.
시현은 먼저 조소를 날린 뒤 대답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어째서 갑자기 마음을 돌린 것인지.”
그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서는 서로를 바라볼 뿐.
부끄러움을 아는 것인지 시현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덕분에 양구군 여러분의 민심은 잘 확인했습니다.”
“저, 그럼··· 헌터기지건설은 아예 철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뇨.”
“그, 그럼···?!”
“대한민국에 헌터기지 지을 때가 설마 양구 밖에 없을까요.”
목적은 이뤘으니 이제는 양구를 떠날 때!
시현은 보란 듯이 환한 미소를 날려준 뒤 양구를 떠났다.
아마 다시는 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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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습공에 관한 뉴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미국, 멕시코, 중국, 러시아, 호주, 인도 등 국토가 넓은 나라는 다 하나같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멕시코의 경우, 128위계의 악마군 군단장 ‘우발’의 부대가 나타나 온 지역을 쑥대밭으로 휘젓고 다녔는데,
미국과 헌터중앙기구의 도움으로 4일 만에 진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의 경우, 뜻밖의(?) 행운으로 금강산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다.
금강산에 출몰했던 자간의 부대가 갑자기 양구군으로 내려간 덕분이었다.
한편 시현의 활약은 세계에서 단연 최고였다.
그 사실에 헌터중앙기구 세계본부에서는 반나절이 넘도록 대책회의를 진행 중에 있었다.
의장단이 모인 이곳 회의실.
근엄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시종일관 의장단 곁을 떠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중책을 논하는 건 의장단의 몫이었으니까.
그들이 이토록 심각한 이유는 몇 달 전에 퇴사한 시현 때문이었다.
“정말로 뭔가 방법이 없겠소?”
미국인 부의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반나절이나 회의가 계속되었지만 딱히 그럴싸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지가 없습니다···.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뭐 트집 잡을 거라도 없겠소? 기력 발전기를 무단으로 사용한 이력이라든지.”
“그 발전기의 기력은 이미 다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아니 내 말은, 그건 헌터중앙기구의 재산인데, 그것도 횡령이 아닌가 묻는 것이오.”
시현이 열쇠에 기력을 채워 넣었을 당시, 기력 발전기를 무단으로 사용한 사실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엄연한 횡령이 맞습니다. 상부의 명령 없이 무단으로 사용했으니까요.”
“그렇지, 내 생각이 바로 그것이라네!”
“하지만···”
“음?”
“그걸로 이제 와서 꼬투리 잡기는 좀 그렇습니다. 이미 그··· 해일군주를 비롯한 여러 몬스터들의 사체로 합의해준 바 있으니까요.”
“허어···. 이것 참.”
부의장이 난감해하자 다른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박시현 씨가 마틴 사의 산업스파이 ‘스미스’도 잡아주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게 안달이 나신 건지···.”
“어이, 이 사람아! 그 정도로 능력이 있으니 붙잡으려 하는 거지.”
“그럼, 그럼. 어쨌든 어딘가에는 소속될 텐데, 이왕이면 우리가 품고 있는 게 나으니까.”
그들은 시현을 마치 물건대하듯 말하고 있었다.
본인이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쁠만한 발언이었지만 시현은 여기 없으니 괜찮았다.
다만, 그의 대리인이 있었다.
“거참. 듣자듣자 하니 너무들 하는군요. 박시현 씨가 물건입니까? 애초에 그를 품을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조직은 없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어떻게 알긴요. 제가 맡아봐서 잘 압니다.”
그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장단 중 유일한 한국인인 류건이었다.
“그래. 마침 말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자네가 매니저였으니 잘 챙겼어야지. 그랬으면 그 자가 회사를 관뒀겠나?”
“부의장님, 말씀이 너무 심하시군요.”
“자네야 말로 무능력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의장단에 들어왔는지조차 의구심이 드는군.”
허허, 류건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계속 듣고 있자니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언제나 느껴왔지만 일흔이 훌쩍 넘은 부의장은 항상 저런 식이었다.
자신의 연륜과 경험이 제일인 줄 아는, 그런 부류의 사람.
‘여기선 도저히 일할 맛이 안 나겠어.’
류건이 섬뜩하게 눈을 뜨더니 잔잔한 미소를 흘렸다.
“저도 뭐,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부의장님께서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셨는지.”
“뭐야?”
부의장이 얼굴을 짓구기며 버럭 화를 냈지만 옆에 앉아있던 중후한 사내가 말렸다.
“그만 하시게. 미스터 류도 자리에 앉지.”
헌터중앙기구의 의장, 버핏이었다.
“자네, 오늘따라 왜 이리 흥분하나? 자네답지 않게. 꼭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맞습니다.”
“···으음?”
“의장님껜 죄송합니다만, 전 여기가 한계인 듯하네요.”
류건은 정장에 달아놓은 의장단배지를 뺐다.
“그만 두겠다는 소리인가?”
“맡았던 프로젝트는 책임지고 끝내놓았으니 안심하십쇼.”
류건은 긍정하는 대신 배지를 데스크 위에 올려놓고 의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덤덤히 회의실을 떠났다.
‘홀가분하네.’
시현에 이어서 류건까지 헌터중앙기구를 관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차례는 한국지사의 말콤과 러시아지사의 제이슨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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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한국만이 축제분위기였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헌터약소국이라 불렸던 대한민국이 불과 몇 달 만에 이렇게나 강대해졌으니.
몬스터 습공을 받고도 그 어떤 피해도 없이 막아내다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현이 강력해진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거나 그거였다.
시현이라는 귀중한 재산을, 대한민국이 타국에 빼앗기지 않고 잘 보관한 것이니까.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물론 아직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타국의 ‘박시현 귀화작전’은 이제 겨우 시작되는 단계였으니까.
청와대에서는 항상 대비하고 있었다.
국민의 민원을 받는 국민신문고처럼, 시현만을 위한 조직을 비밀리에 신설했다.
이른 바, 조직명 로열화이트(Rayal White).
특급인사는 단 한 명. 단연 박시현!
시현의 민원만을 받는 전문 팀을 정부차원에서 만든 것이다.
즉, 시현만을 위한 국가차원의 심부름센터나 진배없었다.
좋게 포장해서 말하면 시현의 대형기획사였고.
“원하시는 거 다 들어주란 말이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이명표 대통령의 말이 관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당황한 비서실장이 서둘러 대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직후 이명표는 이 말도 꼭 잊지 않았다.
“물론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치주의 국가답게 법을 준수하라는 말이었지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다.
쉽게 말해서, 시현이 하고 싶은 거 다 전폭지원해주라는 뜻.
이명표가 이렇게나 극성인 이유는 자명했다.
요즘 하루에도 몇 통씩 타국의 대통령들에게서 전화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통화를 할 때면 꼭 빠지지 않는 주제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시현이었다.
시현덕분에 국력이 드높게 치솟은 것이다.
이러니 이명표로서는 시현을 황제처럼 대접해줄 수밖에.
오늘도 그럴 예정이었다.
똑똑-
지금 막 비서관 하나가 들어와 보고를 올렸다.
“대통령님, 박시현 씨 지금 막 입구 통과하셨답니다.”
“오, 어서 가지!”
이명표가 영빈관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자, 깔끔한 정장차림의 시현이 들어왔다.
서로가 꾸벅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앉으시죠.”
“예.”
둘만 남겨두고 모두가 나갔다.
이명표는 늘 그렇듯 비서실장이나 경호원도 함께 자리하지 않고 시현을 독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직접 간다니까, 왜 이렇게 또 손수 찾아오신 겁니까?”
이명표는 진심이었다.
을이 갑을 찾아뵙는 건 자신의 기준에서 당연한 진리였으니까.
“시간 남는 사람이 찾아가는 거죠, 뭐. 그리고 대통령님은 바쁘시잖습니까? 아시다시피, 전 지금 말만 의장이지 거의 백수나 다름없습니다. 양구에서 공사를 중단해서.”
“농담도 참 매력 있게 하십니다. 허허!”
품위가 없어도 너무 없어 보이는 대통령이었다.
마치 할아버지한테 재롱부리는 손자처럼······.
하지만 이명표는 단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다른 나라의 대통령은 이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하니까!
이것도 능력과 기회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옷이라도 편하게 입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저를 그저 편한 삼촌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좋겠는데. 껄껄!”
“그래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신데, 어찌 그러나요. 그리고 저는 그때 대통령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여전히 간직하고 있거든요.”
“호오오······.”
60이 훌쩍 넘은 이명표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10대 소녀처럼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살면서 이렇게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던가?
이 감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세계최강자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코끝이 찡해진 이명표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충성, 또 충성, 그리고 충성!’
어찌 보면 주책없는 생각이었지만 사실은 신의 한 수였다.
시현이 이명표의 진솔한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종종 뵀으면 좋겠군요.”
시현이 느닷없이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오오···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감동받은 이명표의 모습에 시현은 머릿속에 작년 이맘때쯤이 떠올렸다.
이명표가 헌터관리부 장관이던 시절, 시현의 빚을 모두 변제해주었던 그때.
그 당시의 이명표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그땐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은 시현이 완전한 갑의 위치에 서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지요.”
“예. 앞서 계획했던 헌터기지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철수를······”
“왜 저번에 파주에도 헌터기지를 건설할 예정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아!”
이명표는 서둘러 지도를 펼쳤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표시된 부지가 신설예정구역이었습니다.”
“양구랑 비슷하네요.”
“예··· 다만 개성이랑 인접해있어서 걱정이 되긴 하는군요.”
“아뇨. 걱정하실 것 전혀 없습니다. 북한이든 민심이든.”
북한이 말썽을 피우면 생각해둔 방식으로 해결하면 되고.
파주시의 주민들이 만약 반대에 나선다면······
‘그럴 리가 없지.’
시현은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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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주 뒤.
시현이 예상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났다.
파주시 헌터기지건설 공약실천에 관한 정부 발표가 있은 후, 현자리움이 그 모든 것을 맡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을 때였다.
2주 전 양구에서처럼 파주시 곳곳에 플래카드가 걸렸다.
단, 양구군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플래카드의 내용이 정반대라는 것.
<환영합니다. 조국의 영웅 박시현 의장님!>
<우리 파주시는 헌터기지건설을 적극 지지합니다!>
<국내최고로 안전한 곳, 파주로 오세요!>
물 만난 고기마냥 파주시는 축제분위기였다.
하지만 저기 옆 동네 양구군은 침울한 분위기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