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4개월만에 일어난 몬스터 습공.
지난번과 같이 이번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를 강타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예외였다.
이계에서 소환술을 부리고 있을 몬스터들의 계략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한민국은 안전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분명 기쁜 일이었다.
부산물 확보는 둘째치더라도 일단 피해자가 없으니까.
안전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
다만 시현에게는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었다.
잘만하면 이 기회를 살려 현재 판도를 뒤집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민간인 피해가 없는 선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양구가 위험에 빠질 일은 없어보인다.
금강산에 출몰한 몬스터들이 갑자기 남침하지 않는 이상은.
“음?”
머릿속에 일말의 가능성이 피어났다.
만약 놈들을 조종할 수 있다면?
놈들을 조종함으로써 양구군을 습격하게 만들 수 있다면?
우연의 사고처럼 위장해서 양구군을 위험에서 구해낸다면?
민심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헌터기지건설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터!
계획은 그럴 듯했으나 가히 미친 발상이었다.
일단 민간피해가 발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시현은 자신 있었다.
이 계획이 실행되기만 한다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란 자신감.
‘그런 것쯤이야.’
손톱만큼의 민간피해도 없이 몬스터들을 막아낼 자신감이 말이다.
무려 18위계에 달하는 레비아탄을 독식한 시현이 아니던가!
‘뭐가 쳐들어오든 개구리밥이지.’
지난 4개월.
포켓을 늘리고 또 늘려온 시현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노력한 결과, 어느새 SP가 30000을 넘겼다.
굳이 수치로 비교하자면 A급 서포터 30명과 맞먹는 포켓이었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기력탱크!
기력이 많이 필요한 수준의 언령을 무작위로 난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닥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해, 금강산의 몬스터들이 양구군을 덮쳐 와도 단 한 손가락으로 막을 수 있다는 얘기!
‘그런데 어떻게?’
문제는 어떻게 놈들을 조종하는가.
11성 엘리트? 12성 에픽?
놈들에게 마인드 컨트롤쯤이야 누워서 떡 먹는 수준으로 할 수 있겠지만 멀리 떨어져있는 놈들에겐 적당한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단숨에 국경을 넘어가 놈들을 끄집어 와?
‘그럼 위성사진에 남잖아.’
무언가 방법이 필요하다.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할 만한 무언가!
-그가, 그가 오셨다! 자간께서 강림하셨도다!
광신도마냥 땅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앤트고일이 시현의 시선을 빼앗았다.
놈은 북쪽을 향해 길쭉한 더듬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말미잘마냥 꿈틀꿈틀.
순간, 4개월 전 용인에서의 기억이 시현의 뇌리에 스쳤다.
‘그렇지.’
시현은 입맛을 다시며 앤트고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재밌는 걸 달고 있네.”
-으··· 으으응?
앤트고일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
.
.
금강산 군사경계지역.
“어서 피하시라요!”
조선인민군의 목소리가 산릉선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중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봉은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벌건 노을빛의 멋진 절경은 더 이상 없었다.
대신 시커멓고 흉포한 몬스터들만이 존재할 뿐.
“그아아아악!”
중앙에 붉은 별이 그려져 있는 철모가 공중에 휘날린다.
그 아래로 선혈이 터지고 살점이 나부낀다.
푸르러야할 5월의 금강산은 점차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무려 10년.
핵폭탄이후 부랴부랴 헌터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북한이었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가 않았다.
돈! 기술력! 시스템!
모든 것이 부족했다.
북한의 S급 헌터가 딱 한 명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태껏 헌터중앙기구와 중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간간히 버텨온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금강산에 출몰한 놈들은 이전처럼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비싼 값 들여 개발한 현대식 무기로 1차 진압은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헌터중앙기구 북한지사와 평양의 헌터들이 모조리 지원을 와도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도 몇날며칠을 세워가면서 싸워야겠지만.
문제는 그 사이였다.
그 틈에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할 게 분명했다.
그나마 금강산 군사경계지역에서 발생해서 망정이지, 민간지역에서 소환됐으면 틀림없이 막대한 민간피해가 발생했을 터.
쿠웅!
-그으흐흐흐흐. 그어허허허!
그 가운데, 그리폰의 날개를 가진 악마가 살기어린 흉흉한 기를 독가스마냥 살포하였다.
그 즉시 산중의 생기가 신문지 타버리듯 사라졌다.
푸르렀던 빛이 감쪽같이 죽었다.
산속의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개구리가 올챙이로, 올챙이가 개구리로.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
심지어는 나무가 뱀이 되고, 돌멩이가 석탄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시냇물이 와인으로 변하기까지 했다.
놈은 마치 묘기를 부리듯 스스로의 실력에 만족하면서 능력을 부렸다.
과연 연금술의 대제大帝.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철렁거리는 그리폰의 거대한 날개, 윤택이 반지르르한 수소의 육체의 소유자.
연금술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자간(Zagan)이었다.
지구에서나 이계에서나 극히 희귀한 권능이었는데, 개중에서도 자간이 제일이었다.
연금술에서는 그를 따라잡을 존재가 없었다.
-그하하하하! 모조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주겠노라!
자간이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순간이었다.
피융!
기력이 실린 지대공 미사일이 맹렬한 속도로 날아왔다.
하지만,
-어딜 감히!
자간의 손짓 한 번에 미사일이 나뭇가지로 변하더니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자간의 능력.
‘사기적’이라는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을 수 있을까?
그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자아내며 도망치는 군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으흐흐흐. 나무로 변해라!
손바닥에서 기가 쏟아져 나가더니, 도망치던 군인들이 모두 나무로 변했다.
역시 악마군 61위계에 빛나는 자간.
그에게 있어 인간은 그저 일회용 장난감에 불과했다.
-시시하군. 모두 쓸어버려라!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라는 상부의 명령.
자간은 그 명령에 받들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단순히 악마군 뿐만 아니라 수백 마리의 일반 몬스터들까지 대동하였기에 금방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북쪽.
여기를 기점으로 해서 중국의 북동부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우리는 북쪽으로 간다!
-그어어어어어어!
자간이 우렁찬 함성과 동시에 발을 뗀 순간이었다.
-으음?
남쪽에서 흘러오는 에너지가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건!
그 존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전에너지!
개미의 페로몬과도 같은 그것에 살려달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남쪽에서 누군가 애원하듯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앤트고일 녀석이 분명하다!
자간은 계획을 변경했다.
-남쪽에 들렸다가 북쪽으로 간다!
505위계의 앤트고일은 악마군의 입장에서도 소중한 자원이니만큼 먼저 구해야했다.
어차피 남쪽이나 북쪽이나 모두 정벌하게 될 텐데.
순서가 바뀐다고 뭐 달라지겠는가?
‘지금 해버리지 뭐!’
게다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늘로 고공비행해서 가면 10분도 채 안 걸릴 정도.
-남쪽으로 직행한다!
그것이 최악의 선택이라는 걸 모른 채, 그들은 대한민국 양구군으로 내려갔다.
.
.
.
금강산 아래, 38선 남쪽방향으로 이어진 강원도 양구군.
현자리움이 들어설 예정이었던 그곳에서 음침한 기운이 북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움푹 파여진 구덩이 안에서 양손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몬스터.
앤트고일의 짓이었다.
“좀 더 열정적으로 해봐. 왜 이렇게 안 와?”
-고, 곧 올 거다···.
시현은 앤트고일의 더듬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잡아당겨 뽑을 기세였다.
“허튼 수작부리지마. 확 뜯어버릴 테니까.”
꿀꺽.
앤트고일은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이에 집중했다.
사악하고 잔인한 악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순한 양.
대 굴욕이었다.
하지만 시현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4개월 전, 용인에서 앤트고일의 정보를 모두 파악했던 시현은 녀석의 더듬이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여 협박을 통해 북쪽의 몬스터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이었다.
살려달라고.
어서 양구로 오라고!
“거의 다 온 것 같군.”
시현의 계획이 성공했다.
순간, 놈들의 사악한 기운이 양구군의 창공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끼를 물었어.’
그럼 이제 다음단계, 놈들을 처치한다.
“왔군.”
-그어어어어어어!
불그스름했던 노을이 몬스터들의 시커먼 몸뚱이에 가려졌다.
놈들의 노성怒聲이 양구군에 가득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시민들은 기겁하여 즉시 피난을 갔다.
다행히 자간의 부대가 시현에게로 직행하였기에 도중에 발생한 피해는 전혀 없었다.
펄럭-
마침내 자간의 부대가 앤트고일 앞에 착지했다.
시현에게 더듬이를 붙잡힌 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앤트고일 바로 앞에.
-아니······!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자간은 빨래판처럼 쭈글쭈글한 눈을 껌뻑였다.
강력한 헌터들이 앤트고일을 볼모로 잡고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시야에 들어온 건 군데군데 파여진 흙바닥과 시현뿐이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앤트고일! 이게 무슨 망신이더냐!
한 동안 바뀌지 않는 자간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시현이 피식 비웃었다.
“이렇게 스스로 찾아와주니 고마울 따름이야.”
-무, 무어라!
인간이 자신들의 언어를 쓰는 건 둘째치더라도, 자신을 상대로 저런 자신감을 내보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체고만 해도 20미터에 달하는 거구인데, 고작 2미터도 되지 않는 인간 따위가?
-인간주제에!
“그 말, 왜 안나오나했다. 아직도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았나보네.”
-무슨 헛소리를 짓거리는 것이냐.
“하긴. 날 본 놈들 중에 살아 돌아간 놈은 없었으니까.”
-어디서 그런 말장난을! 네 이놈, 앤트고일.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그러나 앤트고일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자간을 보자마자 구덩이 밖으로 튀어나가 그를 맞이했어야 정상이거늘.
자간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날개를 펄럭이며 양손을 뻗었다.
시현에게 최악의 고통을 선사해주리라 다짐하며 기를 정제했다.
그 사이 시현은 자간을 스캔했다.
‘호오···.’
자간이 악마군 61위계라는 것 물론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게 있었다.
‘연금술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처음 보는 능력이었다.
과연 지구에 연금술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시험해볼게 좀 있겠는데.’
시현은 일단 자신의 몸에 적당한 수준의 배리어부터 둘렀다.
자간의 능력을 실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때마침, 시현의 실험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자간이 재빨리 손바닥을 뻗으며 외쳤다.
-주제넘게 우리에게 도전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멍청한 인간들에게 고통을!
촤르르!
고농도로 정제된 기 덩어리가 검푸른 기류에 실려 뻗어나갔다.
-으어어어! 돌멩이로 변해라!
매우 우렁차고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
-음······?
돌멩이로 변하기는커녕 시현은 머리털하나까지도 그대로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생애를 통틀어 이런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런 건 일류 악마들이나 최상위의 엔델 족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이거늘!
자간은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엔 시현이 입을 뗐다.
“돌멩이로 변해라.”
그러자 한 순간.
20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자간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대신 바닥으로 돌멩이 하나가 떨어졌다.
투욱.
시현은 그 위에 발을 올리며 입을 비틀었다.
“연금술이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