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여기있습니다.”
은밀한 약속장소에 도착한 시현.
최 회장은 그를 맞이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런 뒤 잘 정리된 각종서류봉투를 건넸다.
복잡할 절차는 간소화하였고, 불필요한 손해를 최소화한 ‘아진물산 무상증여’ 관련서류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 회장의 마지막 발악이기도 했다.
“절차 후 아진물산은 선생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순전히 시현의 것이라 할 순 없겠지만 실소유자라고 해도 무방했다.
지분을 70%나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대주주였으니까.
시가총액 4조 4500억.
그중 3조 1150억이 시현에게 양도될 예정이었다.
그에 뒤따르는 잔 소음이나 문제는 무척이나 골치 아픈 일이지만 그건 최 회장과 류건, 그리고 이명표 장관이 처리해줄 문제.
시현은 그저 받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즉, 절차가 모두 끝나면 한국인 부자 50위 안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무려 3조 1150억!
10년 전이었다면 ‘국내갑부 열손가락’ 안에 들었을 수준이지만.
강산이 한 번 뒤바뀐 만큼 갑부들의 자산총액도 몇 배는 높아졌다.
돈은 돈을 낳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다.’
창창한 앞날이 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를 소유한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도 분명히 있었다.
예컨대, 경영적인 측면에는 자신이 없으니 도움을 청해야할 것이다.
“자, 그럼 다 된 건가?”
“예··· 말씀하신 건 다 해드렸습니다만······.”
“음. 그래, 수고 좀 했겠군.”
시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최 회장의 안색도 밝아졌다.
아진물산을 띠어줬으니 이제 위험천만한 상황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에게 처할 운명도 모른 채.
“그럼 이제 남은여생 잘 즐기라고. 맛있는 콩밥 먹으면서.”
“음···? 콩밥···이라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는 최 회장.
그를 혼자 남겨둔 채 시현이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그 안으로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뭔가, 자네들은?”
“같이 가시죠.”
“뭐, 뭐야?”
최 회장은 사내들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일어서야 했다.
그러고는,
철컹.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쭈글쭈글 늙어버린 뇌에 인지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저 넋을 놓고 사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사내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최귀만 씨, 당신을 살인, 살인교사, 살인청부 및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최 회장은 분노에 찬 눈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다, 당신이 어떻게!”
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서류봉투를 챙기며 간간히 입 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하, 합의했잖은가! 무슨 말 좀 해보라 이거야!”
“흠. 잘 아실 텐데. 합의를 했다고 해서 모든 죄가 용서되는 건 아니라는 거. 이제는 죗값을 치를 차례지.”
그가 저지른 죄는 결코 한두 가지의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비단 시현에게만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 몬스터와 던전을 악용해 여태껏 수많은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즉, 자비란 없을 것이다.
시현은 최 회장에게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헛돈 쓰지 말고 자식들에게나 남겨둬. 발버둥 쳐봤자 사형이니까.”
.
.
.
금일 방송엔 연신 긴급속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시종일관 아진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이른바 넉다운(Knock down).
총수 최 회장의 긴급체포에 이어, 뒤늦게 사생아라고 밝혀진 최민호 이사가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
파장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아진물산은 모회사로부터 완전분리 독립까지!
거대한 경제폭풍이 대한민국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시현이 신경 쓸 건 거의 없었다.
이제 막 손에 넣은 아진물산의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든 말든 걱정할 것도 없었고.
“알아서 잘들 하겠지. 그치?”
“그럼.”
든든한 지원군, 이용수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우리 경제연구소한테나 맡기고, 일단 오늘밤은 축배나 들자고.”
주르르륵-
승리의 날은 역시 양주다.
용수는 양주를 거침없이 들이켠 뒤 시현에게 거칠게 내뱉었다.
“미친놈. 너 말하는 대로 다 된다며. 아예 왕국을 세우지 그러냐.”
“내가 생기라 해서 진짜 왕국이 생기면, 그게 신이지 언령인가.”
“큭큭큭. 그럼 다행이네. 아직은 인간적인 친구여서.”
“아직은? 뭔 소리야.”
“또 모르지. 인간을 넘어 신이 될지도. 넌 지금 딱 그 중간인 거 같은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 그러다 신한테 천벌 받는다.”
“워워. 조심해 임마! 농담이라도 너는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용수가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젓는다.
진심 반 농담 반 섞인 목소리였다.
“쫄긴. 걱정 마라. 언령은 ‘믿음’을 담아 말해야 발동되는 거니까.”
“풉- 이 새끼 가만 보니 사이비가 따로 없네.”
투닥투닥 주고받는 것이, 둘은 여느 친한 친구사이와도 같았다.
쪼르르-
이용수가 시현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묻는다.
“근데 너야말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안전지대를 막겠다는 거.”
“해봐야지.”
“왜, 부모님 때문에?”
끄덕.
시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한반도만 봐도 일 년에 몇 번씩이나 땅이 무너져 내리잖아.”
피해자들은 하루사이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시현이, 시현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대비를 한다고 해도 던전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현은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날 이후 많은 걸 느꼈다.
던전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한 ‘안전지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만 된다면 제 2의, 제 3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한성연구소를 달라고 한거였구만. 네가 말한 ‘그걸’ 개발하려고?”
끄덕.
말없이 내려가는 시현의 고개.
“그래, 잘 해봐라. 아, 그럼 현자건설을 세계최고의 기업으로 만든다는 그 꿈은?”
“동시에 이뤄내면 되는 거지.”
“크크. 새끼, 꿈도 야무지네. 그럼 일단 다니는 회사부터 그만 둬야할 거 아냐.”
“안 그래도 사표 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네.”
띠링-
마침 시현의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
.
.
다음날 아침.
시현은 불과 이틀 만에 다시 헌터중앙기구를 찾았다.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엔 임장호가 아닌 부총장이었다.
‘낌새가 별론데.’
사내 최고의 인재가 퇴사한다는데 안 붙잡을 회사 없으니까.
특히나 개개인의 능력이 중요한 헌터회사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퇴사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신을 설득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딱 잘라서 말해야겠군.’
끼익-
차에서 내린 뒤 본관으로 향하는 길.
“어? 오빠!”
“음?”
예상치도 못한 얼굴이 시현 앞에 섰다.
“되게 오랜만이에요! 그때 거미던전 이후로 처음이죠?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TV에서 소식 잘 들었어요!”
“···그래. 그런데 네가 여긴 왜?”
R&K사의 신입헌터였던 제이.
그녀가 헌터중앙기구에 와있는 것이다!
“너 R&K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맞아요! 그런데 뭐··· 헌터가 한 곳에만 있을 수 있나요? 이직했죠.”
“이직? 설마 네가 그 S팀의 신입누커?”
“네···?! 어, 음···.”
정곡을 찔렀는지 제이는 고양이 눈을 뜬 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뇨! 던전관리국 수색부 소속이에요.”
“······그래. 교육 잘 받았네.”
아무리 봐도 위장직업이 확실하다.
즉, S팀의 누커가 맞는다는 얘기.
‘하긴, 얘 정도면 들어갈 만하지. 어떻게 성장하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생각을 마친 시현은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제는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럼 난 간다.”
“어딜요? 저기 별관 안 가세요?”
제이가 09별관을 가리킨다.
그녀 역시 시현이 시크릿 에이전트라는 걸 이미 눈치 채고 있던 것이다.
“미안한데 앞으로 볼 일 없을 거야, 아마.”
“네...?”
시현은 어서 부총장에게 가 담판을 지어야했다.
제이와 이렇게 우연찮게 만난 건 반가웠지만 그녀와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더욱이 이제는 헌터중앙기구에 올 일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일방적으로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려는데,
“오빠?”
이게 무슨 우연인가?
시현이 들어가려던 본관에서 지원이 나온 것이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지원이 나오다니, 상당히 골치 아플 법한 상황이었다.
“제이 씨랑 아는 사이에요?
“그냥 수습생 동기.”
“아······.”
마주보고 있는 시현과 제이를 보고 질투심을 느낄 법도 했지만 지원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낯빛을 띠며 시현에게 속삭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빠.. 회사 그만 둔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사표를 냈다고 지원에게 직접 말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알게 모르게 언질을 주긴 했지만 아마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방금 총장님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갑자기 뵙자고 하셔서···.”
“총장이? 뭐라는데?”
슥-
지원이 까치발을 든 채 시현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우리 사이에 대해서 알고 있나 봐요. 오빠 회사 그만두지 못하게 옆에서 몰래 도와달라던데요...”
“뭐? 흠···.”
역시, 순순히 놔주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
.
.
부총장 실에 들어가려던 시현은 목적지를 바꿔야했다.
1층 안내데스크에서 그 위층으로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로 총장실이 있는 곳.
똑똑-
“들어오게.”
노크 후 총장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게 웬걸.
소파에 앉아있는 머릿수가 둘이 아닌 셋이었다.
있어봤자 총장과 부총장만 있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더 있는 것이다.
머리에 반짝이를 발라놓은 듯한 은발의 남자.
한국인이 아니었다.
“앉지.”
“예.”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 시현은 혼잣말하듯 조용히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스캔.”
그렇게 말하며 은발의 남성을 응시하자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관련 정보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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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존 스미스(John smith)
나이 : 35
성별 : 남
직업 : 회사임원
소속 : 헌터중앙기구 세계본부 이사회
직급 및 직책 : 의장단/세계본부 등기이사
권능 : 화술(話術)
특기 : 설득
특이사항 1. 박시현의 사직을 직접 만류하고자 상부의 지시를 받고 한국에 옴
특이사항 2. 박시현을 세계본부로 영입시켜 큰 실적을 올리고자 함
특이사항 3. 실적을 올려 의장의 신임을 얻고자 함
특이사항 4. 의장의 신임을 얻어 사내 기밀을 알고자 함
특이사항 5. 사내 기밀을 얻어 미국방산기업 마틴 사(社)로 빼돌리고자 함
성향 1 : 겉으로는 신사적이며 호쾌한 척을 하나 실제로는 간사함
성향 2 :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가학적 성관계(S)를 즐김
성향 3 : 유부녀를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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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안될 새끼로구만.’
상대가 숨기고 있는 것까지 숨김없이 확인할 수 있는 능력.
기존의 존재하는 스캐닝 스킬보다 훨씬 뛰어났다.
스윽.
“반갑습니다.”
시현이 자리에 앉으며 인사하자, 긴장한 듯 보이는 부총장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말했다.
“통역은 내가 해주겠네.”
“아뇨. 통역은 필요 없습니다.”
“정말 괜찮겠는가?”
“그럼요. 어차피 대화는 금방 끝날 텐데요, 뭐.”
“으음? 그게 무슨 말인가?”
총장과 부총장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시현은 스미스만 바라보았다.
스미스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면서.
뱀처럼 교묘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능력.
그의 화술(話術)을 조심해야했다.
희귀한 권능 중에서도 극히 희귀한 권능!
화술에 한 번 빠지게 되면 환술에 걸린 듯 정신이 교란되는 것이다.
이내 스미스가 양 볼에 보조개를 띠며 악수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세계본부에서 온 스미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현은 악수를 받지 않았다.
단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을 뿐.
“아, 마틴 사에 정보 팔아넘긴다는 그분?”
“······?”
“아니면 사디스트라고 불러야 하나?”
“······!!”
스미스는 화장실이 급한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시현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귀국 잘 하시길.”
요 며칠 새, 사람 여럿 보내는 시현이었다.